
너에게 7. 이슬비(2)
이틀이 가고, 해와 달은 숨바꼭질을 질리지도 않고 했다.
슬비는 나와 항상 먹던 점심도 먹지 않고 내 눈을 보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 많았던 48시간 중 나와 슬비가 눈을 맞춘 시간이 4초, 그것도 어제 저녁 집에 돌아갈 때에 나를 조금 흘겨본 것이 다였다. 나는 얼빠진 채로 등교했고, 내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칠판만 계속 쳐다봤다. 산송장이 따로 없었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칠판에 빨간 분필이 둥둥 떠다녔다. 이것은 나만이 보는 환각,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
칠판에 슬비가 큼지막한 글자로 나타났다. 탁, 탁, 타다닥, 슬비. 탁, 탁, 타다닥, 슬비. 탁, 탁, 타다닥, 한 번 더 슬비. 그 ‘슬비’들은 칠판의 구석구석들을 점령해 나갔다. 하지만 수업 시간 종이 울리자 나는 그 많던 슬비들을 어느 샌가 나타난 지우개로 닦아버렸고, 파란 분필로 큼지막하게 공부라고 썼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 지금은 벌써 귀가 시간.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정말 기계처럼 공부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더 이상 낭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다잡으며 공부했다. 머릿속 필요 없는 생각들은 다 처리해가며 답을 적었다. 나 혼자서도 만족해서 기분이 좋아졌더랬다. 아싸, 오늘은 빨간 비가 아니라 빨간 눈이 내리는 날이구나. 내 인생 그렇게 빠른 야자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잘 간다, 기분이 좋다 한들, 비워지는 기억이란 없었다.
분명 지웠을 터인 슬비가 다시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공부라는 글자로 가득 채웠을 터인 칠판이 지워지며 슬비를 지운 흔적이 나타났다. 그것은 지운 것이라고 치곤 너무나 선명했다. 이제 내가 활개를 칠 시간이라며 슬비는 나의 마음에 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가운데에서 시작해 네 개의 모서리까지. 빨간 분필로 다시 ‘슬비’가 써졌다.
이제는 억누를 수도 없고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다.
그래. 시험공부는 사실 도피처였다. 눈앞의 문제를 제쳐두고, 그것보다 이것이 좀 더 중요하다며 계속 붙들고 있었던 은신처였다. 이렇게 계속 도피해서 내 좋을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가짜를 진짜로 믿으면 진짜 나와 슬비는 어찌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락뿐이었다. 어둠뿐이었다. 허나, 내가 그렇게 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젠장, 처음부터 이랬으면 될 것을.
얄미운 녀석이 차마 목소리는 못 내고 노크 소리만 키워서 노크를 해왔다. 증오했던 그 녀석을 지금은 받아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녀석이 나에게 조언을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누군가가 이기적이라고 하겠지만 뭐 어쩌겠어. 이게 진짜인 걸.
돌아가는 길, 그 녀석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하고 길가로 좀 비껴가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최대한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 것처럼 그 녀석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혼잣말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응. 엄마. 왜요?”
ㅡ 너, 슬비 신경 쓰이지?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ㅡ ....음.. 너 그거 가지고 애타는 거 여기서도 보이거든? 그 정도 떠는 거면 어린아이도 알겠는데?
“아.... 그랬구나.(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좀 빨리 말해주지.)”
난 심술궂게 생각했다. 그걸 알았으면 내가 문을 잠그더라도 그래도 끈질기게 노크해보지. 그랬다면 슬비와 이렇게 떨어질 이유도 없고 내가 너에게 미안한 마음도 안 가졌을 텐데.
“그래서 말인데, 내가 그 애에게 어떻게 말 걸면 될까. 우리는 요 며칠 말이 없었잖아. 나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말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만해야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하지만 그 애 내가 말 걸면 나가 버리는 건 아닐까 해서.”
ㅡ 음, 그렇단 말이지...
“네.”
ㅡ 내 생각엔 말이야, 네가 그 애를 화내게 한 이유를 알면 될 것 같은데.
“화나게 한 이유?”
ㅡ 응. 한번 그걸 생각해보면 어때?
내가 슬비를 화나게 한 이유. 내가 슬비를 화나게 한 이유,,,라. 음, 난 그저 슬비가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장난 쳤는데, 슬비는 단번에 화를 냈었지. 내가 한 번 더 그러니까 슬비는 내가 싫다는 눈초리였어. 난 그저 궁금해서 한 건데. 정말로. 그렇다면, 슬비는 장난을 싫어했던 거였나?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슬비에게 곤란한 걸 물어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슬비도 곤란한 눈치였지. 그렇다면 내가 빠져줘야 하는 건데, 난 자꾸 슬비에게 물어봤으니까.
아.. 내가 조금 더 천천히 들어왔으면 되는 거였는데.
“내가 조금 더 조심스럽게 들어왔다면, 이렇게 일이 커지진 않았을 건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조금만이라도 조심했다면 이런 일이... 되진 않았을 텐데.”
부끄러웠다. 정말로 싫어했던 그녀에게 고백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ㅡ 되돌리면 돼.
“에?”
ㅡ 되돌리면 된다고, 네 잘못을 알았으니까. 이번엔 그, 슬비라는 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화해를 하면 되잖아. 언제든 기회는 있으니까.
“.......”
ㅡ 이렇게 슬비라는 애를 보내고 싶진 않을 거 아냐. 그치? 너도 그 애랑 화해하고 싶어서 나에게 말을 건 거잖아?
그녀석이 약간 웃음을 띤 채로 나에게 말했다. 그녀석의 그 말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네, 알았어요. 그렇게 해볼게요.”
그렇게 말하고 난 끊으려고 했는데 그녀석이 갑자기 말을 했다.
ㅡ 잠깐.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아나, 얘 또 말 시켜)”
ㅡ 앞으로 나에게 무슨 할 말 있음 그냥 마음속으로 생각만 해도 나에게 들리니까 그렇게 알아두라고.
“알았어요. 끊을게요.”
머쓱하네.
전화를 끊고 기숙동으로 곧장 갔다. 기분은 말할 것도 없이 상쾌. 가슴에 있던 응어리가 이제야 풀린 기분이었다. 앞으로 내가 가야하는 길이 확실히 보였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생각해 놓았던 것을 바로 실천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살고 있는 기숙동 604호방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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