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3. 박선우(2)

 

 

 

 

 

 냉장고에서 차가운 우유를 마셨다. 잠에서 깨면 안경을 쓴 뒤에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었다. 그 뒤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오늘은 제일 먼저 안경을 사야 될 것 같아 일단 다른 일정들은 나중으로 미뤘다.

 오빠에게서 뺏은 보라색 머리핀을 꼽고 옷을 입었다. 오늘은 학식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아침을 때우기로 했다. 맨발에 슬리퍼 신고 설렁설렁, 땅에 키스하려는 듯이 갔다. 도착한 편의점 햄과 배추, 계란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초코우유를 사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먹으며 어제 일을 생각했다. 벌써부터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경을 던진다는 것은 그걸 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건 그 사람들 스스로 자기의 눈을 지저분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예외는 있겠지만그리고 난 어제 자기 눈을 용광로에 던져버렸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걸. 던질 수밖에 없었는걸.

 

 어제 진로 상담 때, 도수가 높은 안경을 낀 대머리 담임 쌤과 내가 서로 마주 앉아서 1학년부터 2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표를 보고 있었다.

 “선우야.”

 “... .”

 “1학년 1학기 때 평균, 기억하려나?”

 “57점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너도 느끼겠지만 점수가 안 오르고 가만히 있지?”

 “ ... .”

 “박선우양, 넌 지금 점수가 제자리걸음만 걷고 있어. 내 말 알아듣겠지? 발전이 없다고. 비교과 영역에선 애들보다 잘하는데 성적이 문제야. 대학에는 성적이 조금이라도 상향세를 보이는 학생들을 선호해. 지금도, 잘하긴 하지만 그렇게 성적이 어중간하면 문제가 있어요. 네가 원하는 저 일본의 메이지 대학엔 꿈도 못 꿔! 선우양, 새 학년 들어가선 성적 쭉쭉 오를 수 있지? 그렇지? 열심히 해!!! 넌 꼭 할 수 있어!”

 

 그 때 하늘은 더럽게 맑았던 걸로 기억한다.

 

 “.... ..”

 

 그리고 그걸로 진로 상담은 끝이 나버렸다.

 

 망할 선생. 가다가 똥이나 밟아버리라지.

 망할, 선생, 가다가, 똥이나, 밟아, 버리라지!!!

  

 그래. 선생이 말한 대로, 난 어중간한 사람. 노력과 실력이 서로 맞아 돌아가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았다. 아무리 일본어 단어를 열심히 외워 봐도, 토일 빠짐없이 교과서를 1번 이상 정독해도 시험을 치면 중간에서 플러스마이너스 5. 그게 내 레벨이었고 그것이 나였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만 날아갈 수 없는 애벌레.

 .............

 젠장!!! 나보고 또 무얼 어떻게 해보라는 건데, 이게 한계인데.

 

 학교를 나와 비틀린 걸음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처음으로 술 마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도 열불 나는 마음도 싹 다 날아가 버리고 기분 좋은 기분만 엑기스로 남겨놓는 물건, 그게 그들에겐 술이었나 보다. 나도 그렇게 해주는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결국, 그 후 답답해서 미치고 환장하는 마음을 못 이겨 하수구에 안경을 떨어뜨렸다. 첨벙하며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 조금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서히 시야가 좁아진 것을 느껴 또 다시 답답해졌다. 결국 그 대가로 기숙동에 돌아가는데 애 많이 먹었다. 어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까인 상처가 그 증거였다. 방에 돌아온 후에 남은 것은 내가 바보짓을 했다는 자괴감뿐이었다.

 

 

 이상하게 달면서 씁쓸했던 초코우유를 다 마시고 샌드위치는 좀 남겼다. MP3를 끼고 편의점에서 나와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차가운 바람을 온 몸으로 맞았다. 안경끼지 않아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그래도 간판은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걸어가는 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색색의 간판에 적혀진 글자를 읽었다. 김씨네 곰탕, 원조 고려홍삼, 앨리스 네일숍, 똥 싼 바지옷가게다, 서림 문구, 베타 문방구점, 김성일 변호사 사무소. 한 자씩 읽을 때마다 잡념이 비워졌다. 그때 어디선가 옛날 노래가 나온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 길이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난 웃을 수 있을까.’ 우울했던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건물들 중 제일 키가 크고 넓은 건물의 1층에 안경점이 있었다. 턱에 붙어 있는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자동문이 열리고 점원이 걸걸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따분한 인사를 뒤로 하고 안경을 죽 둘러보았다. 마음에 드는 무테 몇 개를 써보고 그중 한 개인 둥글넓적한 모양에 하얀색 안경다리를 지닌 것을 점원에게 맡겼다.

 시력검사를 끝내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만들어 먹었다. 물 온도 조절을 잘못했는지 코코아가 너무 뜨거웠다. 입으로 여러 번 후후 불었는데도 뜨거웠다. 참고 먹었다. 목구멍이 급속도로 데워지는 차원을 넘어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안개너머로 옛날의 오빠와 내가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으이구, 목 데이겠다! 천천히 먹을 수 없겠니? 누가 코코아 뺏어 먹디? 아이 몰라. 늦었는데 그런 거 상관 쓸 필요 없잖아! 하이튼 따지고 그려요. 에코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에이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 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저 반대편에서 나오는 안개너머의 소리. 안경 나왔습니다! 긴장이 풀리듯, 눈 뜬 꿈을 깼다.

 대금을 지불하고 안경과 안경닦이를 받았다. 안경점을 나와 기숙동으로 갔다.

 

  코코아를 한 잔 더 끓여 탁자에 올리고 한동안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흐릿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봤다.

 미치도록 묻고 싶었다. 보고 싶지도 않던 그 인간이 왜 나타났는지, 그것도 하필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나타났는지 가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여기 없었다. 그래서 미치도록 원망했다. 나 혼자 갇힌 방에서 온갖 욕설들을 늘어놓았다. 늘어놓다가 갑자기 그 인간의 미소가 떠올라서 그만뒀다.

 일단은 자자. 자고나서 전공공부나 하자. 지금 이렇게 욕지거리를 해봤자 아무런 득도 없다. 머리만 아플 뿐이다. 나는 설렁설렁 침대에 가서 누웠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니 아, 또 그 인간의 얼굴이 떠있었다. 정말 질리게도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제발 좀, 동생 이제 다리 쭉 뻗고 자려고 하는데, !! 짜증을 내도 그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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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똥싼 바지는 실재헸단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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