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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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된 이유는 늦잠 자고 싶은 아침마다 억지로 일어나야 하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성경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과 거기에 대해 내가 품는 이해불가와 공감불가의 감정을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신의 뜻을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이해하기란 어렵다는 에두른 변명뿐이라 반감은 더 커졌을 뿐이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종교를 가진 이들이 그렇잖은 이들보다 사회에 더 해악을 끼치는 게 소름이 끼쳐서, 라는 이유가 하나 더 들러붙었다. 성경과 종교에 대해 이런 반감이 있는 나였기에 주제 사라마구의 신작 제목이 <카인>임을 알자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이 진흙에서 빚어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에서 내쫓긴다. 그들은 여호와가 빚어내지 않은 다른 인간들을 만나 농사를 짓고 카인과 아벨이라는 아들들을 둔다. 이 아들들이 자라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가축을 기른다. 몇 번에 걸친 제사에서 신이 아벨의 제물은 거두나 카인의 제물을 거부한다는 게 명백해지자 카인은 으스대는 아벨을 죽인다. 여호와가 나타나 아벨을 찾고, 카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똑부러지게 하나하나 따지고 든다. 여호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카인을 그의 땅에서 내쫓되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게 하는 징표를 남긴다. 카인은 방랑하다가 작고 추레한 도시에서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진흙을 밟는 일을 맡는다. 그리고 그 도시의 여주인인 릴리스의 눈에 들어 그녀의 정부가 된다. 성적으로 부실했던 릴리스의 남편은 아내의 부정에 관대했으나 직접 그 현장의 소리를 듣고 나니 질투가 불타올라 카인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여 그는 다시 조용한 남편으로 돌아갔고, 릴리스는 카인의 자식을 잉태했으며, 카인은 길을 떠난다. 카인은 이상한 여행을 하게 되는데, 마치 시간여행처럼 과거에 가 있거나 미래에 가 있거나 또 다른 현재에 가 있거나 하며 여호와가 저지르는 온갖 잘못을 목격한다. 아들 이삭의 목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칼을 빼앗아 이삭을 살리고, 죄 없는 아이들이 있었을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의 비가 내리는 사건을 겪었으며, 금송아지 숭배에 혹한 사람들 3천 명을 살육하는 시나이 산 아래의 현장을 목격했다. 선하고 충실한 신자 욥의 신실함을 시험하기 위해 신이 사탄을 시켜 그의 재산과 가족을 빼앗고 온몸을 종기로 뒤덮는 것을 보며 카인의 분노는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도달한 곳은 아름다운 산 위에서 건조되고 있는 노아의 방주 앞이었다. 그는 수많은 동물들, 노아의 가족과 함께 인류 마지막 후손으로서 방주에 오른다.

 

 

아벨을 죽인 것은 너다. 맞습니다, 하지만 선고를 하신 것은 주이시고, 나는 그저 처형을 했을 뿐입니다. 저곳을 덮은 피는 내가 흐르게 한 것이 아니며, 너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악을 택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망을 봐주려고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도 실제로 포도밭에 들어가는 자와 마찬가지로 도둑입니다, 카인은 말했다. 저 피가 복수를 외치고 있다, 하나님이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주께서는 진짜 죽음과 일어나지 않은 또 한 번의 죽음 양쪽에 복수를 하시게 될 겁니다. 무슨 말이냐. 들으면 언짢으실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말해 봐라. 간단합니다, 나는 주를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벨을 죽였습니다, 따라서 의도로 보자면 주도 죽은 것입니다. 그래, 네 말뜻을 알겠다, 하지만 신들에게는 죽음이 금지되어 있다. 아, 압니다, 하지만 주를 비롯한 신들은 주의 이름으로 또 주 때문에 저지르는 모든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p. 40)

 

 

성경의 수많은 모순과 공감불가한 일들 가운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역시 나를 화나게 하곤 했다. 카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에 농작물을 제물로 바쳤으며, 아벨은 목동이었기에 양을 바쳤다. 신은 아벨의 제물은 거두었으나 카인의 제물은 내친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한 끝에 그를 살해하고 만다. 이에 대해 종교인들은 카인이 진정 신실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변명하는데, 저자는 오히려 아벨이 카인을 향해 으스대고 뻐겨 카인의 자존감을 건드렸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분명 동생을 죽인 카인의 죄가 가볍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신이 부당한 편애를 통해 카인을 구석으로 몰아갔다. 카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이에 대해 카인은 자신이 살던 땅에서 추방당해 방랑자가 되고, 신은 신이기 때문에 아무런 추궁도 징벌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신을 향한 카인의 자기 변호가 무척이나 통쾌하다.

 

저자의 딴지는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이뤄진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내쫓기게 되는 상황부터 시작된다. 에덴 동산 꼭대기에 서 있는 선악과에 대해 '만일 정말로 그들이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가 바라지 않았다면 그냥 그 나무를 심지 않거나 다른 곳에 두거나 철조망으로 둘러싸면 될 일(p. 14)'이라고 빈정댄다. 나 또한 자신이 창조해낸 인간들을 믿지 못하고 자꾸만 시험하고자 하는 신의 의도가, 그 시험에 낙제한 이들보다 더욱 불순하다고 믿기 때문에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기 바빴다. 먹어선 안될 것을 먹은 그들의 죄를 가리켜 원죄라고 하는데, 바른 말을 하자면 아담과 하와가 사는 곳에 먹어선 안될 과실수를 보란듯이 두고 먹지 말라고 시험한 신의 행동이 원죄라면 원죄일 것이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 앞 칠판에 뻔히 보이는 답안지를 붙여두고 보면 혼난다고 윽박지르는 선생이 있다면 얼마나 욕을 먹을지 생각해 보라.

 

죄를 저지른 하와는 아담에게 복종하리라는 신의 저주를 받는다. 그래선지 성경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끊임없는 차별을 겪는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하와는 겁 많은 남편 아담을 대신해 천사 아자엘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얻는다. 이때 그녀는 아자젤이 자신의 젖가슴을 만지게 해준다. 그 외의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처음으로 일어난 성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저자의 작품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는데, 그 세계의 여자들은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폭력으로 식량을 틀어쥔 남자들에게 몸을 판다. 평상시라면 여자들에게 있어 그러한 행위는 문란하다며 삿대질을 당하고도 남았을 법한데, 결국 이렇다 할 방법이 없는 남편들은 여자들을 '권력자들'의 방으로 보낸다. 이는 여자들 위에 군림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권위를 자랑하는 남자들이 가장 험난한 시기를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 조롱하는 주제 사라마구의 시각을 보여 준다.

 

성경에서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가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성경 외전에 따르면 하와 탄생 이전 아담이 진흙으로 창조될 당시 릴리스라는 여자가 함께 진흙으로 빚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릴리스가 아담에게 복종하지 않자 아담이 불만을 표시해 릴리스는 추방되어 사탄과 결합해 온갖 괴물 같은 것들을 낳았다고 한다. 사실 신이 특정 성별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아담과 릴리스가 함께 빚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가부장제 사회가 자기 주장을 가진 여자를 내치기 위해 릴리스에 대한 험담을 덧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 주장을 가진 릴리스를 아예 정전에서 빼버린 것일 터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릴리스는 한 도시의 주인으로서 건재하여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까지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존경심을 갖게 해주지 못하고 아이를 만들어 주지도 못하며 성적으로 만족을 주지도 못하는 남편 대신 카인을 택한다. 성경이 품고 있는 성적차별에 대한 저자의 또 다른 독설인 셈이다.

 

 

롯이 소알로 들어갈 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여호와는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려 그 도시와 온 들과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였다.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왜 그녀가 그런 벌을 받아야 했는지 그 이후로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호기심을 치명적인 죄로서 벌하고 싶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지능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다. 만일 하와가 아담에게 그 열매를 먹으라고 주지 않았다면, 하와 자신이 그것을 먹지 않았다면, 그들은 여전히 에덴동산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 생활이 얼마나 지루할지 잘 알고 있다. (p. 116)

 

 

카인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도 아이들이, 죄 없는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아브라함은 공포에 질린 신음을 내뱉지만, 그뿐이다. 이미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고 신을 진노케 했을 타락 가운데 탄생했을 아이들 또한 한 줌의 재가 되었을 것이었다. 제대로 된 피임법도 없던 당시에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에는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있었겠는가. 카인은 여호와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그들의 하나님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팔이 안으로 굽는 이 신은 자신의 민족은 보살피고 죄를 저질러도 회개했다며 봐주기 일쑤이다. 반면 자신의 민족이 아닌 인간들에 대해서는 똑같은 죄를 저질러도 그 몇 배의 벌을 내리려고 하며 그간 신경도 안 썼으면서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결국 여호와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서는 그들을 창조시켜 주지도 않았고, 그들을 돌보거나 지켜주지도 않는 신을 믿을 이유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연인이었다면 당장 헤어지자고 할 정도로 여호와라는 신은 끊임없이 질투하고 시험하려 한다. 이런 종교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 점을 깨달았는지 신약에서는 태도가 조금 바뀌긴 하지만 역사가 어디로 가나?) 특히 그들과는 아예 다른 땅에서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의 민중들은 어째서 그렇게 혹해 있는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 종교란 것이 혹세무민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이 나라에서 이 종교가 누리는 말도 안 되는 권세와 벌이는 온갖 악덕을 보면 뭐, 그 신에 꼭 어울리는 신도들인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카인>은 나의 성경에 대한, 그리고 종교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드러내며 신을 향해 그의 죄를 사이다처럼 상쾌하게 톡톡 쏘아붙여준다. 읽는 내내 크게 공감하며 즐거웠는데, 소설의 마지막 카인의 활약에서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반전 아닌 반전이 있다니, 하핫! 그가 추방을 당해 처음으로 얻은 직업인 '진흙을 밟는 자'의 숨겨진 의미가 마지막에서야 벗겨진다.

이 작품은 주제 사라마구가 사망 1년 전 출간한 작품이다. 보통 죽음을 앞두게 되면 마음이 약해져 없다고 믿는 천국에라도 들어가려고 애를 쓰며 회개 아닌 회개를 한다는데, 마지막 작품이 이토록 강렬하니 그의 신념 때문에라도 정말 신이 있다면 그를 천국에 들여보내줬을 것이다. 물론 구약의 신이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겠지만 주제 사라마구가 지적했듯 옹졸하기 짝이 없는 신이고. 없다면? 없으면 그가 옳은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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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해리 포터를 쓸 수 있다 - 판타지와 SF 창작을 위한 모든 것
올슨 스콧 카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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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만 봐서는 판타지 소설 집필을 위한 가이드처럼 보이지만, 실은 SF 소설 집필을 위한 책이다. 원제는 <How to write Science Fiction & Fantasy>로서 판타지는 SF집필에 살짝 곁들인 정도인데, 우리나라에선 판타지 쪽이 인기를 얻는 터라 '해리 포터'의 이름을 갖다붙인 모양이다. 사실 제목만 봐서는 그리 선택하고 싶지 않은 책인데, '해리 포터'의 인기도에 편승한 삼류 작법 책 같기도 하고 독자에게도 아류작이나 써내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내가 이 책을 산 이유는 나는 '해리 포터'를 쓰고 싶기 때문이다-_-;;) 최근엔 판타지나 SF 할 것 없이 독자들의 장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취향이 다양해져 SF 마니아들도 적지 않으니 다음 개정판 제목은 SF 소설가 지망생을 위한 제목으로 개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야 이 책이 주로 담고 있는 SF소설 집필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작법책을 재미있게 읽는 나이긴 하지만 이 책은 특히 더 재미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딴짓하지 않고 쭉 읽어나갔다. 단순히 소설 쓰기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콕 찍어 SF(판타지)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소설의 설정에 대해 다분히 과학적(으로 보일 법한)인 조언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SF소설 속에서 인간이 처하게 될 상황에 대한 가르침이 꽤나 상세하고 친절하며 매우 유쾌하다. 이를테면, 77페이지에서 저자는 우주가 광속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며, 그 어느 것도 빛보다 빠를 수는 없으므로 다른 성계로 가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비행이 가능할 수단이 있어야만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태양계에선 다른 생명체를 만날 수 없으리란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뭐,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서도) 저자가 조언하는 광속 회피 수단은 다음과 같다.


1. 초공간(3차원이 아닌 차원의 이동 방식)

2. 세대항행선(우주선 내에서 세대를 거듭해 인류를 존속시키는 방식)

3. 동면 여행, 램 드라이브(우주의 물질을 연료로 이용한 방식)

4. 시간 확장(시간 지연; 지구인과 우주인의 상대적 시간)

5. 앤서블(The ansible, 시간 확장 세계에서 통신은 즉각적으로 가능한 방식)

6. 워프 속도(광속을 초월한 속도, 저자는 '스타 트렉'을 예로 들면서 이 방법을 비웃고 있다 ㅋ)


SF를 쓰기 위해 어느 정도의 지식은 당연히 갖춰야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서툰 지망생일 때는 이런 작은 조언들도 고마운 법이다.



만약 '무구바살라'가 '빵'을 뜻한다면 그냥 '빵'이라고 말해라!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는 개념에만 신조어를 사용해라. 만약 당신의 초점 인물이 '무구바살라'가 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가 그것이 토착 곡물에서 추출되는 약 성분을 방출하는 특별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약 성분이 원주민이 갖고 있는 듯한 텔레파시 능력의 근원으로 판명된다면, 당신이 빵을 무구바살라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것은 정말로 다른 것이고, 낯선 이름이 덧붙여 주는 중요성을 가질 만하다. (p. 105)



그러고보니 요즘에는 글쓰기 전반에 관한 책뿐만이 아니라 SF나 판타지 등 세부적인 장르 글쓰기에 대한 책도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주직업으로 작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업으로도 글쓰기를 많이 하다 보니 출간되는 책의 종류도 다양해지는 모양이다. 사실 이 책이 미국에서 첫 출간된 것은 1991년으로 벌써 20년도 더 전이지만 SF소설 작법에 관한 틀은 지금도 유효하다. 책에 쓰일 법한 과학적 사실도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5장 같은 경우는 미국의 출판 시스템에 관한 내용이라서 아쉬운 점이 있다. 그래도 어쨌거나 글쓰기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이런 좋은 책이 지금이라도 나와준 것이 기쁘다. 난 한 번도 읽거나 보지 못해서 몰랐지만, SF소설 및 영화로 잘 알려진 '엔더의 게임' 저자의 글쓰기 책이니 도움이 될 것도 분명하다. 또, 많은 SF 및 판타지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니 해당 작품들을 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SF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이라도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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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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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북극의 한파가 몰아친다고 아우성이다. 어쩐지 요 네스뵈의 나라 노르웨이의 추운 겨울을 조금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눈이 오지 않는데도 창 밖을 내다보면 거리의 헐벗은 나무들은 눈더미를 얹고 있을 것 같고 공터에는 기묘한 눈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을 것만 같다. 눈사람들은 커다란 몸 안에 무언가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을 품고 있을 테고,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옆을 신나서 뛰어다니는 것이다.

작가가 글을 써낸 순서대로 읽을 생각으로 그 순서를 검색해 책장에 차례대로 세워놓았었다. 그래서 순서에 맞춰 처음 읽은 작품도 <박쥐>였다. 하지만 지금 시기에 이 제목처럼 어울리는 작품을 읽지 않을 수가 없어서 곧바로 <스노우맨>으로 뛰어넘었다. 또한 아무래도 최근작이니만큼 더 재미있을 것도 같았고, 그 예상이 맞았다.


가정이 있는 여인들이 아무 흔적도 없이 자꾸만 사라진다. 그들이 사라진 곳엔 아무도 세우지 않은 눈사람만이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개별적인 사건, 가정에서 벗어나고픈 여인들의 가출이라고만 생각했던 사건을 강력반의 형사반장 해리 홀레는 연쇄살인으로 의심한다. 그리고 그에게 날아든 살인범의 편지. 과거의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파트너의 자리엔 아름답지만 퇴폐적인 눈빛을 한 여형사 카트리네가 나타나 명민하게 일을 돕는다. 여인들은 계속해서 죽어가고 그들의 수사는 집요하게 이어진다. 홀레는 증거를 얻기 위해 참여하고 싶지 않던 TV토크쇼에도 참여하는 등 열정적으로 수사에 임한다. 천천히 범인을 뒤쫓는 추격망을 좁혀가지만 잡았다싶어 다가가보면 헛다리만 짚고 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위기의 순간 홀레는 범인의 올가미에서 타깃을 풀어낸다.


하얀 겨울이면 친근하게 마당을 장식하곤 하는 눈사람이 무서운 메시지를 담은 모형으로 사용되어 무척 흥미로웠다. 마치 공포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들었는데, <스노우맨>이 진짜 공포소설이었다면 살인을 예언하는 눈사람에게는 어떤 마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포소설이 아니기에 눈사람은 그냥 눈사람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예고장보다도 위압적인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다만 피해자들은 눈사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몰랐지만 말이다. 피해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라보는 정경에 스쳐가듯 보이는 눈사람, 바로 그 지점에서 독자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경고라도 해주고 싶지만 사건은 예정대로 벌어지고야 만다.


남편과 다른 핏줄의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들은 창녀인가?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이들을 책임지지도 않고 여전히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사는데,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은 육아를 담당하면서도 신체의 자유는커녕 세상의 시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그녀들이 핏줄이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란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나자 그 자리에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이 남았다. 그녀들이 죽음으로써 과연 세상은 더욱 좋아졌을까?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해주는 엄마가 있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아닐까? 이 세상에 그 누가 다른 사람의 과오에 대해 대신 벌할 자격이 있겠는가. 자기 자신의 티끌도 제대로 털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 했듯이 아무도 누군가를 대신 벌할 자격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그저 끊임없이 자신의 과오와 티끌을 덜어내고 털어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뿐이다.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자신이 죽게 될 순간을 맞닥뜨린 피해자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페이지에선 나조차 숨을 죽였고, 홀레가 사건 현장에서 증거를 찾으려 애쓸 때 나는 저자가 스치듯 깔아놓는 복선이 있는지 살폈다. 그럼에도 홀레가 엉뚱한 사람을 범인이 아닌가 생각하면 나 역시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자가 보여주고 감추는 그대로 깜박 넘어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가면서부터 범인의 윤곽을 어느 정도 잡은 터라 신중한 홀레 반장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쥐>에서보다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에 응원하고 싶은 기분이 많이 들었다.


책 띠지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영화화되는 <스노우맨>의 주연을 맡을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마이클 패스벤더라는 인물이 해리 홀레 역을 할 예정인 모양이다. 책 출간으로부터 벌써 몇 년이나 지난 터라 많은 것들이 바뀐 모양이다. 내가 너무 늦게 읽은 거다. 진작에 읽었어도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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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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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종말이 찾아와 집 안에 홀로 갇히게 되는 걸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작은 위안이 된다. 철없는 생각이지만 어쩐지 혼자 살아나가야 할 세상에서 겪을 어려움이란 게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등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적막하고 목적 없는 행위에서 오는 지루함에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상상은 대개 책장의 책들을 둘러보면서 끝이 난다. 아마도 이게 고립에 대해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좁은 공간에 갇혀 그의 성노리개가 되고 그가 없을 때는 마음을 놓지만 우울하고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립, 감금에 대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가 모르게 세상 어디선가 계속해서 있어왔다. 2006년 나타샤 캄푸쉬 사건에서부터 2009년 요제프 프리츨 사건에 이어 그 뒤로도 줄줄이 터져나온 여성 납치감금사건들이 있고,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에 이르기까지 끔찍한 일들은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이 작품 <룸>은 요제프 프리츨 사건과 제이시 두가드 사건 등을 종합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제이시 두가드는 11살 무렵 납치되었다가 납치범과의 사이에서 딸 둘을 얻었으며 18년 뒤에야 부모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요제프 프리츨 사건은 자기의 친 막내딸을 24년간이나 지하감옥에 가둬두고 근친강간해 무려 7명의 아이를 낳게 한 사건이다. 자기 친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다른 납치감금 사건보다 훨씬 더 역겹다. (그런데 사실 감금하지 않았다뿐이지 친딸을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요제프 프리츨이 딸 엘리자베스에게서 낳은 아들이자 손자인 막내는 발견 당시 다섯 살로서 바깥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아마도 이 다섯 살 아이가 <룸>의 잭으로 재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빠져서 잘됐어. 이제 아프지 않을 거야."

조금 전만 해도 이빨은 엄마의 일부분이었는데 더 이상 아니었다.

"참, 베개 밑에 이빨을 넣어놓으면 밤에 안 보이는 요정이 와서 돈으로 바꾸어준대."

"이 안에서는 안 그래."

"왜?"

"이빨 요정은 방에 대해서는 몰라."

엄마의 눈빛은 벽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깥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있었다. 스키나 불꽃놀이, 섬, 엘리베이터, 요요 같은 것이 생각날 때마다, 그것들이 전부 진짜라는 것이, 바깥세상에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피곤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소방수, 선생님, 도둑, 아기, 성자, 축구선수 등등, 모두 바깥세상에 진짜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없다. 나랑 엄마는. 우리만 거기에 없다. 우리는 정말 진짜일까?​ (p. 113)


잭은 바깥세상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다가 다섯 살이 되면서 TV 속의 세계가 채광창 너머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것일뿐 실제로 보거나 접한 적이 없어 상상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엄마를 납치해 감금한 '올드 닉'조차 잭은 그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어 잭의 세상에는 그들이 사는 잠긴 방과 엄마만이 있다. 잭은 엄마와 함께 놀고 엄마의 젖을 빨고 벌레와 쥐를 보면 반가워하고 일요일이면 가끔 '올드 닉'이 사다주는 '선물'이 기대된다. 하지만 잭과 달리 엄마는 불행하다. 그녀는 잭이 모르는 세상을 알고 있으며 타의에 의해 그 세상을 강제로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던 것을 갈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잭은 행복하지만 엄마는 불행하다. 그러면 잭은 방 안에 갇혀 있지만 행복하므로 그가 받는 대우가 온당한 걸까? 행복하게 살게 해줬으니 감사하라고 '올드 닉'이 뻐길 수 있는 걸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가져야 할 자유를 빼앗은 뒤 그것이 없어 너는 더 안전하다거나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통, 슬픔, 기쁨을 다른 사람이 대신 느껴줄 수 없듯이 행복이란 감정 또한 대신 판단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선택지 가운데 어느 것도 제한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선택하여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자유로운 상태는 행복의 전제조건이 된다. 잭은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또, 자유로운 활동의 모든 것이 차단당한 상태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잭이 본인 스스로 바깥 세상에서 외따로이 떨어져 최소한의 것만을 취하는 삶을 살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면 온당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분명 잭은 만족스럽게는 살고 있으나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 오줌 쌌어."

"괜찮아."

"하지만 온통 젖었어. 배쪽 티셔츠도 젖었어."

"잊어버려."

나는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엄마의 머리 뒤쪽을 보았다. 바닥은 깔개 같았지만, 문양도 가장자리도 없이 보송보송한 회색으로 벽까지 죽 이어져 있었다. 벽이 녹색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다. 벽에는 괴물 그림이 있었지만, 잘 보니 사실 거대한 바다 파도였다. 채광창 같은 모양이 벽에 나 있었다. 저건 뭔지 안다. 옆으로 난 창문이다. 수많은 나무 막대기가 창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빛이 있었다.

"아직 기억이 나."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엄마는 내 뺨을 찾아 키스했다.

"아직 온통 젖어 있어서 잊어버릴 수가 없어."

"아, 그거?" 엄마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를 적신 걸 잊어버리라는 뜻이 아니었어. 그냥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지." (p. 268)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엉뚱하고 순수한 질문을 퍼붓는 잭은 사랑스럽다. 도무지 행복하거나 즐거울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잭은 엄마의 보호 아래 구김살 하나 없이 밝게 자랐다. 잭의 엄마가 스스로 아이를 잘 키워냈다고 말하는 데에 반박하지 못할 만큼. 하지만 잭의 할아버지가 말했듯 잭의 존재는 '그 짐승', '올드 닉'을 떠올리게 한다. 잭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올드 닉'이란 사실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는 일에 대한 분노 때문에 머리로는 아이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힘이 들 것 같다. 자기 자신이 악의 씨를 받는 그릇이 되어 또 다른 악의 분신을 만들어냈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겠고. 그래서 성폭행 피해자들 가운데 출산을 한 여성들은 낙태를 하거나 아기를 입양을 보내는 선택을 한다. 그녀들의 인생을 위해, 또는 그 아기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그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잭의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녀는 한두 번의 성폭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유대관계를 맺을 수 없는 좁은 공간에 2년간 홀로 갇혀 있었다. 그 지독한 고독 가운데에서 새 생명이 그녀를 찾아오고, 인터뷰에서 직접 말했듯 아이는 그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고,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게 하는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같은 방에 있을 수가 없구나. 소름이 끼쳐."

"이것이라뇨. 잭은 아이예요. 다섯 살이라고요." 엄마가 고함쳤다. (중략) "저한테는 세상 모든 것과도 같은 존재예요."

"물론이지. 그게 당연해." 할아버지는 눈 밑의 피부를 닦았다.

"하지만 난 그 짐승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p. 363)



잭을 향한 시선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이의 핏줄의 절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아이 너머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보인다. 악의 씨앗. 하지만 속마음은 어쨌거나 아이는 가해자가 아닌 그저 아이일 뿐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키워낼 수밖에 없다. 아이의 핏줄이 염려될수록 더욱 사랑으로 더욱 따뜻하게. 그게 바로 사회와 구성원들이 해야 할 분명한 몫이다. 클레이 박사는 다섯 살 아이의 뇌가 플라스틱 같아서 깡그리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했으나 세계가 뒤집히는 중대한 변화는 결코 잊히지 않는다. 잭은 분명히 기억할 것이고 성장해가면서 자신의 핏줄과 자신이 자란 환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럴 때 잭의 방황이 그간 자신이 받았던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와 인내, 사랑 앞에서 멈출 수 있도록 세상에는 더 커다란 사랑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소설은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거울이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현실에는 있는 것들이 없다.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 차가운 냉기, 온갖 병균, 무서운 위험 등. 소설이 현실의 잔혹하고 끔찍한 면을 따라올 수가 없는 것이 요즘이다. 소설 <룸>이 보여준 것 또한 실제 사건들의 내용에 비하면 부족해 보인다. 사건들에 대해 찾아보면 정말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수렁 가운데에서 <룸>은 거기서도 작은 사랑의 온기가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그게 이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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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아 4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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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를 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을 때, 2호가 나왔다. 2호를 부랴부랴 읽자 얼마 지나지 않아 3호가 나왔고, 3호를 읽고 나니 4호가 나왔다.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숙제가 주어지는 듯한 그리 좋지 못한 기분이다. 이래서 내가 꾸준히 무언가를 챙겨 보거나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TV드라마든 내용이 이어지는 웹툰이든 챙겨야 하는 게 있다는 것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사실 읽은 시간이나 다음 호가 나올 때까지의 기간을 생각해보면 <미스테리아>는 격월을 열심히 지켰다. 그저 내가 그동안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매번 출간될 때마다 "또 나왔네, 또 나왔어!"할 따름이다. 이번에도 한 달은 빨리 지나갔고 숙제 4호가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나는 지난 3호를 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나왔다고 구시렁거리며 며칠 전 구입했고 손이 비자마자 집어들었다. 이제 또 금방 5호가 나오고, 나는 또 구시렁대며 구입하고 부지런히 읽고 흡족한 얼굴로 책장을 덮겠지.

 

P.D. 제임스, 루스 렌들, 헨닝 망켈이라는 1~2년 사이 세상을 떠난 세 명의 미스터리 작가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책에 적힌 대로 정말 '거장'인지는 모르겠다. 요새는 하도 여기저기에 거장이라고 붙여싸서 '뭔 놈의 거장이 이렇게 많냐?' 싶을 때가 많으니. 그런데 두 사람이 여성 작가라는 사실이 시선을 끌었다. 요즘에야 여성 작가들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집필하지만 20세기 초반 같은 여자들에게 열악한 시대에 애거서 크리스티 외에 다른 인물들이 있었을 줄이야! (맙소사! 당연히 있었겠지!) 작년에 읽은 슈테판 볼만의 <여자와 책>에서 이야기한 '여성 작가의 수가 극히 적었을 거라는 잘못된 선입견'에 해당되는 판단이다. 또한 왠지 미스터리 같은 살인이나 죽음 같은 불유쾌한 장르 쪽에는 더더욱 그러리란 선입견도 내 머리 한쪽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 편견을 깨준 코너였다. P.D. 제임스의 <죽음이 펨벌리로 오다>와 루스 렌들의 <활자잔혹극>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사실 이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죽음이 펨벌리로 오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피에르 르메트르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는 그의 책 <오르부아르>에 호기심이 생겼다. 제목만 봐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데다 프랑스 작가라 어쩐지 베르나르 베르베르 류일 것 같은 선입견(!)이 작용해 관심을 두지 않았더랬다. 그리고 요즘 처음 보는 작가가 너무나 많아서 그 역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신인인가 했었는데 벌써 우리나라에 작품도 몇 권이나 번역된 적이 있는 양반이었다. 예전엔 요새처럼 방앗간 문턱 닳도록 서점 사이트를 드나든 게 아니라서 소식에 둔감했던 탓인 모양이다.

 

아, 이번에도 유성호 법의학자의 실제 사건을 다룬 코너는 흥미로웠다. 최근 뉴스에 자주 오르락거리는 어린이 학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 코너는 실제 사건인 탓에 흥미로우면서도 마음이 아픈데, 이번엔 아이들 이야기라 더욱 씁쓸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한두 살짜리 어린애들을 자기들 기분에 따라 때리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끔찍한 일이 줄어들긴커녕 사회안전망이 부실해지면서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어린 아기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저자의 끝맺음이 유독 가슴을 저미게 했다.

 

일본 책인 <밀실입문>을 연재하는 코너는 이것저것 배울 점이 많다. 이번엔 나중에 집을 짓고 살게 되면 담을 없애거나 낮게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ㅎㅎㅎ 하지만 어쩐지 갈수록 지루한 느낌이 드는 코너이다. 요즘의 미스터리는 밀실 안에서 벌어진 신묘한 살인보다 살인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와 심리를 다루다 보니 밀실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 또한 내가 밀실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밀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를 알고 싶은 독자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번 호에 실린 네 단편들 중에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단편인 <구부전>과 <원주행>이 마음에 들었다. <구부전>은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뱀파이어화라는 설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원주행>은 사건을 해결한 인물이 너무나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사실이 꽤나 코믹한 요소로 작용했다. 사실 일어난 사건이나 사건 풀이가 보잘것없어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경찰이 금세 해결했을 테지만, 사건을 해결한 뒤에도 회사에 계속 다녀야 한다며 비밀 유지를 신신당부한 주인공의 모습이 친근했다. 사건 풀이를 했다고 회사에 못 다닐 이유는 없지만서도 살인자들에게 신상이 알려져봤자 좋을 게 없고, 그냥 평범한 1인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 또한 미소를 자아냈다.

 

한 달 뒤, 다음 5호 숙제는 어떨는지 기다려진다. 그래도 벌써 나왔다며 구시렁대긴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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