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룸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종종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종말이 찾아와 집 안에 홀로 갇히게 되는 걸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작은 위안이 된다. 철없는 생각이지만 어쩐지 혼자 살아나가야 할 세상에서 겪을 어려움이란 게 먹는 것이나 입는 것 등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적막하고 목적 없는 행위에서 오는 지루함에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상상은 대개 책장의 책들을 둘러보면서 끝이 난다. 아마도 이게 고립에 대해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좁은 공간에 갇혀 그의 성노리개가 되고 그가 없을 때는 마음을 놓지만 우울하고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립, 감금에 대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가 모르게 세상 어디선가 계속해서 있어왔다. 2006년 나타샤 캄푸쉬 사건에서부터 2009년 요제프 프리츨 사건에 이어 그 뒤로도 줄줄이 터져나온 여성 납치감금사건들이 있고,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에 이르기까지 끔찍한 일들은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이 작품 <룸>은 요제프 프리츨 사건과 제이시 두가드 사건 등을 종합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제이시 두가드는 11살 무렵 납치되었다가 납치범과의 사이에서 딸 둘을 얻었으며 18년 뒤에야 부모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요제프 프리츨 사건은 자기의 친 막내딸을 24년간이나 지하감옥에 가둬두고 근친강간해 무려 7명의 아이를 낳게 한 사건이다. 자기 친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다른 납치감금 사건보다 훨씬 더 역겹다. (그런데 사실 감금하지 않았다뿐이지 친딸을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요제프 프리츨이 딸 엘리자베스에게서 낳은 아들이자 손자인 막내는 발견 당시 다섯 살로서 바깥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아마도 이 다섯 살 아이가 <룸>의 잭으로 재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빠져서 잘됐어. 이제 아프지 않을 거야."
조금 전만 해도 이빨은 엄마의 일부분이었는데 더 이상 아니었다.
"참, 베개 밑에 이빨을 넣어놓으면 밤에 안 보이는 요정이 와서 돈으로 바꾸어준대."
"이 안에서는 안 그래."
"왜?"
"이빨 요정은 방에 대해서는 몰라."
엄마의 눈빛은 벽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깥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있었다. 스키나 불꽃놀이, 섬, 엘리베이터, 요요 같은 것이 생각날 때마다, 그것들이 전부 진짜라는 것이, 바깥세상에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피곤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소방수, 선생님, 도둑, 아기, 성자, 축구선수 등등, 모두 바깥세상에 진짜 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없다. 나랑 엄마는. 우리만 거기에 없다. 우리는 정말 진짜일까? (p. 113)
잭은 바깥세상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다가 다섯 살이 되면서 TV 속의 세계가 채광창 너머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인 것일뿐 실제로 보거나 접한 적이 없어 상상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엄마를 납치해 감금한 '올드 닉'조차 잭은 그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어 잭의 세상에는 그들이 사는 잠긴 방과 엄마만이 있다. 잭은 엄마와 함께 놀고 엄마의 젖을 빨고 벌레와 쥐를 보면 반가워하고 일요일이면 가끔 '올드 닉'이 사다주는 '선물'이 기대된다. 하지만 잭과 달리 엄마는 불행하다. 그녀는 잭이 모르는 세상을 알고 있으며 타의에 의해 그 세상을 강제로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던 것을 갈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잭은 행복하지만 엄마는 불행하다. 그러면 잭은 방 안에 갇혀 있지만 행복하므로 그가 받는 대우가 온당한 걸까? 행복하게 살게 해줬으니 감사하라고 '올드 닉'이 뻐길 수 있는 걸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가져야 할 자유를 빼앗은 뒤 그것이 없어 너는 더 안전하다거나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통, 슬픔, 기쁨을 다른 사람이 대신 느껴줄 수 없듯이 행복이란 감정 또한 대신 판단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선택지 가운데 어느 것도 제한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선택하여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자유로운 상태는 행복의 전제조건이 된다. 잭은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또, 자유로운 활동의 모든 것이 차단당한 상태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잭이 본인 스스로 바깥 세상에서 외따로이 떨어져 최소한의 것만을 취하는 삶을 살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면 온당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분명 잭은 만족스럽게는 살고 있으나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 오줌 쌌어."
"괜찮아."
"하지만 온통 젖었어. 배쪽 티셔츠도 젖었어."
"잊어버려."
나는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엄마의 머리 뒤쪽을 보았다. 바닥은 깔개 같았지만, 문양도 가장자리도 없이 보송보송한 회색으로 벽까지 죽 이어져 있었다. 벽이 녹색이라는 것은 미처 몰랐다. 벽에는 괴물 그림이 있었지만, 잘 보니 사실 거대한 바다 파도였다. 채광창 같은 모양이 벽에 나 있었다. 저건 뭔지 안다. 옆으로 난 창문이다. 수많은 나무 막대기가 창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빛이 있었다.
"아직 기억이 나."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엄마는 내 뺨을 찾아 키스했다.
"아직 온통 젖어 있어서 잊어버릴 수가 없어."
"아, 그거?" 엄마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를 적신 걸 잊어버리라는 뜻이 아니었어. 그냥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지." (p. 268)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엉뚱하고 순수한 질문을 퍼붓는 잭은 사랑스럽다. 도무지 행복하거나 즐거울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잭은 엄마의 보호 아래 구김살 하나 없이 밝게 자랐다. 잭의 엄마가 스스로 아이를 잘 키워냈다고 말하는 데에 반박하지 못할 만큼. 하지만 잭의 할아버지가 말했듯 잭의 존재는 '그 짐승', '올드 닉'을 떠올리게 한다. 잭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올드 닉'이란 사실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는 일에 대한 분노 때문에 머리로는 아이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힘이 들 것 같다. 자기 자신이 악의 씨를 받는 그릇이 되어 또 다른 악의 분신을 만들어냈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겠고. 그래서 성폭행 피해자들 가운데 출산을 한 여성들은 낙태를 하거나 아기를 입양을 보내는 선택을 한다. 그녀들의 인생을 위해, 또는 그 아기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그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잭의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녀는 한두 번의 성폭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유대관계를 맺을 수 없는 좁은 공간에 2년간 홀로 갇혀 있었다. 그 지독한 고독 가운데에서 새 생명이 그녀를 찾아오고, 인터뷰에서 직접 말했듯 아이는 그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고,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게 하는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같은 방에 있을 수가 없구나. 소름이 끼쳐."
"이것이라뇨. 잭은 아이예요. 다섯 살이라고요." 엄마가 고함쳤다. (중략) "저한테는 세상 모든 것과도 같은 존재예요."
"물론이지. 그게 당연해." 할아버지는 눈 밑의 피부를 닦았다.
"하지만 난 그 짐승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p. 363)
잭을 향한 시선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이의 핏줄의 절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아이 너머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보인다. 악의 씨앗. 하지만 속마음은 어쨌거나 아이는 가해자가 아닌 그저 아이일 뿐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키워낼 수밖에 없다. 아이의 핏줄이 염려될수록 더욱 사랑으로 더욱 따뜻하게. 그게 바로 사회와 구성원들이 해야 할 분명한 몫이다. 클레이 박사는 다섯 살 아이의 뇌가 플라스틱 같아서 깡그리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했으나 세계가 뒤집히는 중대한 변화는 결코 잊히지 않는다. 잭은 분명히 기억할 것이고 성장해가면서 자신의 핏줄과 자신이 자란 환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럴 때 잭의 방황이 그간 자신이 받았던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와 인내, 사랑 앞에서 멈출 수 있도록 세상에는 더 커다란 사랑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소설은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거울이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현실에는 있는 것들이 없다.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 차가운 냉기, 온갖 병균, 무서운 위험 등. 소설이 현실의 잔혹하고 끔찍한 면을 따라올 수가 없는 것이 요즘이다. 소설 <룸>이 보여준 것 또한 실제 사건들의 내용에 비하면 부족해 보인다. 사건들에 대해 찾아보면 정말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수렁 가운데에서 <룸>은 거기서도 작은 사랑의 온기가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그게 이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