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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세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특히 뉴스를 볼 때 들곤 하는데, 갖가지 생각지도 못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참 많다는 걸
깨닫고 그제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거기를 꽉꽉 채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참 협소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자신의 견문을 넓히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누구나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로 떠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그 다음 방법은 소설책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보다는 소설책을 읽는 건데, 이 방법을 통하면 뉴스에서처럼 기분 나쁜 소식만 접할 필요도 없고, 여행에서처럼
여행지의 겉모습만 볼 위험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되어볼 수도 있다. 모든 소설들이 다 그렇지만,
《그랜드마더스》에서도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랜드마더스》는 네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나는 도리스 레싱을 엘리스 먼로와 혼동해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이 지리한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들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표제작인 첫 번째 소설 <그랜드마더스>을 읽으면서부터 정말 깜짝
놀랐다. 등장인물들이 어느 정도 지리하기도 한 일상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꽤나 파격적으로 삶을 살고,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로즈와 릴은 학창시절부터 친구가 된 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서도 같은 동네에서 이웃하여 사이좋게 살았다. 그들의 일상은 로즈의
남편이 떠나고 릴의 남편이 죽으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로즈는 릴의 아들과, 릴은 로즈의 아들과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묘한
관계는 두 아들들이 다른 여자들과 결혼을 한 뒤 일단락되는가 싶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된 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리면서 이야기는
다시금 안개 속에서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한밤중에 잠이 깨어 물을 마시러 가거나
평소처럼 어두운 집 안을 거닐고 싶어도 로즈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이안이 우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을 막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랬더니 이안이 어둠을 더듬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옆에 눕더니 폭풍우 속의 구명띠인 양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로즈는
실제로 파도가 캄캄한 밤에 썩은 이빨 같은 일곱 개의 바위 위로 달려들어 쏟아지며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을 떠올렸다. (p.
39)
가끔 해외 뉴스에서 딸이나 손녀 나이의 여자와, 아들 뻘인 나이의 남자와 결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외모가 뛰어난 연예인들이라면
일단 외견상 엇비슷해 보이기도 하니 그런 조합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연애를 하는 걸 보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니 나이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억지로 이해하는 척 넘어가곤 한다. 그런데 <그랜드마더스>의
두 커플은 친한 친구이자 이웃으로 서로의 엄마를, 서로의 아들을 나눈다. 엄마들은 젊고 아름다웠고, 사내 티가 나기 시작한 소년들도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인연을 생각해보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관계였다. 내겐 꽤나 충격적인 조합이었고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참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가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인생을 사는 이들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생각은, 이 커플들 그 사이에 이방인처럼 끼어들게 된 두 며느리 메리와 한나의 위치에 대해서였다. (세상이 변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관계도 어느 정도 바뀌어 가고는 있지만 아직 모두 바뀌지는 않았다.) 세상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가족에 끼어드는 이방인과도 같다. 서양
여자들은 자신의 성씨를 잃고 남자의 성씨를 따르고, 남자의 성씨를 물려받은 아이를 기른다. 우리나라의 여자들도 남자의 가족에 끼어드는 이방인
신세인 것은 마찬가지다. 아들에게 연인과 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 시어머니들은 아들을 빼앗은 며느리들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며느리들로선 시댁이 '가족처럼 지내자'거나 '딸처럼 생각한다'고 말해도 결코 핏줄을 나눈 가족이 될 수도 없고 딸이 될 수도 없는 사이라는 걸
안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누그러져 서로 어울리게 될 수 있기는 해도 말이다. 그래서 메리는 남부러울 게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도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런 여자들의 모습을 메리와 한나가 대표하고, 아들과 그 어머니의
관계를 두 커플이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빅토리아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가
낯선 곳에 가서 잠을 자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신기했다. 자신에게 간밤은 지금껏 있는지도 몰랐던 가능성과 공간의 문을 연 것과 같았다.
빅토리아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만의 방이 있었으면. 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나만의 집, 나만의 아파트는 너무 거창해서 차마 꿈도
꾸지 못했고, 그저 혼자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자신만의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토머스의 방에서 눈알을 번들거리던 야생동물들이 잡으러
와서 자신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나만의 방이 있다면 매리언 이모가 피곤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 내킬 때 잘 수 있을 텐데. 침대 옆에
전등도 하나 놓고 그걸 끌 수 있을 텐데. "나만의 공간, 나만의……." (p.
108)
두 번째 작품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는 우연히 풍족한 백인 가정 스테이브니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 흑인 소녀 빅토리아가
자신이 사는 세계와 다른 환경을 갖고 있는 스테이브니가를 동경하고, 그 속에 섞이길 바라지만 그저 잠시 발을 들여놓았다가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빅토리아는 돌봐주던 이모가 몹시 아프던 날 학교 친구의 부유한 집에서 잠을 자게 된다. 아예 드러눕게 된 이모를
간호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시절에 스테이브니가에서의 하룻밤은 빅토리아에게 마음속 위안이 되는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 아픈 이모를 혼자
돌보았지만 이모가 죽고 나자 그녀는 어리다는 이유로 혼자 있지 못하고 이모 친구의 집에서 양육된다. 빅토리아는 예쁜 아가씨로 자랐고,
스테이브니가의 토머스는 그녀에게 반한다. 그들 사이의 열정이 지속된 동안 빅토리아는 토머스의 아이 메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에겐 알리지 않고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녀는 흑인 남자 샘과 결혼을 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토머스의 모습을 본 뒤 메리를
그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의외로 토머스는 아이의 존재를 쉬이 인정하고, 스테이브니가에서는 아이를 반기고 사랑해준다. 그녀는 샘에게서 낳은
'까만 요정' 딕슨과 피부색이 옅고 천사처럼 상냥한 메리가 누리게 될 다른 세상을 걱정스러워한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를 폐지한 지 150년이 더 지났지만 백인 사회에서 흑인들의 사회적 위치는 여전히 그들과 같지 않다. 흑인 소녀
빅토리아는 아홉 살인데도 영양부족으로 예닐곱 살처럼 작고 가녀리다. 빅토리아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하고 이모네 집 거실에서 간이침대를 펴고
자는 반면 스테이브니가의 부엌은 이모의 집이 모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크다. 빅토리아를 스테이브니가에 데려간 토머스의 형 에드워드는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고통에 공감하며 괴로워하는' 아이였지만, 빅토리아를 집으로 데려가야 했을 때 흑인 소녀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훗날 빅토리아가 토머스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는 부유한 백인 가정에 빌붙으려는 협박범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된다.
스테이브니가는 부유한 백인 가정치고는 흑인과 가난한 이들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이고 친근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그런 집안조차도 빅토리아의
생활 환경(그나마 형편이 나은 흑인 가정)과 비교하면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있다. 백인의 피가 섞인 메리는 분명 빅토리아나 배다른 동생
딕슨과는 다른 더 좋은 것들을 누리게 될 것이고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저 백인의 피가 절반 섞였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메리의
옅은 피부색으로도 다른 백인들은 여전히 흑인으로 취급할 터다. 과연 세상에서 인종 차별이 사라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인종 관련 갈등 소식을 언제쯤 완전히 듣지 않게 될까?
우리 모두는 데로드를 조금 사랑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싫어할 만한 점이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상대의 호감을 사려고, 상대의 의견에 맞추고 동의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대단히 아름다운 소년이었으며, 이윽고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 생각에 잠긴 것 같은 매력적인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발하는 어렴풋한 미광을 보면서 우리는 사막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농담하곤 했다. 데스트라의 눈도 그랬다. 우리는 그의 통치자
여부를 의논하면서 우리가 항상 지켜볼 테니 잘해낼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p. 200)
<그것의 이유>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역사 속에 있지 않은 낯선 세상이다. 포악한 왕이 죽고 그의 현명한 아내
데스트라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라는 그야말로 황금기를 구가한다. 그녀는 정치 싸움을 종식시키고 훌륭한 차기 지도자 육성을 위해 자기 자식 데로드가
포함된 열두 명의 아이들을 육성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 12인 위원회는 차기 지도자로 데로드를 뽑는다. 그러나 문화를 사랑하고
풍족하며 모든 것이 순탄하게 굴러가던 나라는 문란하고 황폐해지며 차별을 일삼고 전쟁과 싸움을 우선하는 나라로 변해간다. 위원회는 데로드에게
끊임없이 면담을 청하지만 데로드는 이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12인 위원회에서는 데로드와 12호만이 살아남는다. 지팡이를 짚고
어렵사리 데로드를 찾아간 12호는 위원회가 지도자로 뽑았던 데로드가 사실은 무지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기 지도자를 뽑았던 아이들은 데스트라의 현명하고 훌륭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지도자로 택할 만큼 현명해지거나 훌륭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친구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그를 지도자로 뽑는다. 아이들의 어리석은 결정에 데스트라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다. 데스트라는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외면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을 간과했다. 그리고 위원회는 외면에 가려진 진실을 보지 못해 나라를
끔찍한 지도자에게 맡겨 버린다. 그토록 풍요롭고 우아한 문화를 보유한 나라가 고작 지도자의 외양 때문에 망국의 길에 들어서게 된 셈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은 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늙은 12호는 자신의 아름다운 며느리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의 의미와 며느리가 이해한 의미는 매우 달랐다. 그리고 어쩌면 12호는 자신이 내뱉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데로드를 찾아간
이후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이란 어리석은 나머지 겉모습에 얼마나 속기 쉬운지, 나름 현명했던 그조차도 늘그막에서야 인정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정말 심각하게 외모에 집착하는 나라이다. 12호의 며느리처럼 '아름다움은 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문구 그대로 받아들인다. 말로만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뿐 다들 외면의 아름다움에 매달리고 그것을 추구한다.
그래서일까? 데스트라의 풍요롭던 나라가 한낱 지도자의 외양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처럼
외양에 집착하게 된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는 암담할 지경이다. 외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정도가
심해진 탓인지 내면의 아름다움을 키우는 독서 인구, 독서량은 점점 더 줄어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양을 가꾸는 데 들이는 돈의 반의 반만이라도
내면을 가꾸는 데에 투자한다면, 우리나라 문화는 더욱 융성하고 범죄율은 낮아질 것이다. 이러한 '큰 변화'를 위해선 '단계적인 작은 변화'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작은 변화들마저 경쟁의 경쟁을 위한 사회 시스템에 막혀 이뤄지기가 어렵다.
슬픈 일이다. 부디 외양에 눈이 멀어 나라를 망쳐버린 12인 위원회와 같은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슬프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두툼한 편지 꾸러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는 베티가 약속을 지켰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약속을 했다. 대프니는
그녀에게 쓴 편지들, 그의 가장 좋은 모습, 그의 본질, 그의 실체, '본연의 나'를 담고 있는 그 편지들을 읽었을 것이다. 읽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가 아들에게, 그들의 아들에게 말했다면 지금쯤 편지가
왔어야 했다. 전화가 오고 초인종이 울렸어야 했다. 아이는 스무 살이었다. 스물하고도 몇 달, 그리고 며칠. 사실을 안다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나이가 됐다. (p. 422)
쌍방이 서로를 똑같은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하나가 더 많이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거나 하는 조금씩의 차이는 날 수밖에 없다. <러브 차일드>는 바로
이러한 동일하지 않은 크기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주인공 제임스는 '사랑하는'
친구 도널드를 따라 다니며 여러가지 수업과 강의를 듣고 사고의 변화를 겪는다. 밖에서는 '수다스럽게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여자'인 어머니가
'대놓고 물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입을 여는 법이 없고 심지어 그럴 때조차 말이 많지 않은 남자'인 아버지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라디오를 켠 채
조용히 바느질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을 본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여자를 만나게 되기를 꿈꾸던 제임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영국여인
대프니와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유부녀였고, 제임스는 징집병으로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하던 중이었다. 케이프타운을 떠난 이후 그는
소문을 듣고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낳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는 평생 대프니를 자신의 사랑으로서 가슴에 담고 산다. 한편
대프니의 친구이자 이웃인 베티는 대프니의 남편 조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듯하지만('조는 자기 부인 옆에 누웠는데 사람 좋은 조, 모두의
친구이며 혈색 좋고 쾌활한 그가 그렇게 거기에 누워 있었고, 베티는 그를 모른 채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대프니에 대한 사랑이 더욱 큰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제임스와 결혼한 헬렌은 제임스가 마음에 담은 여인과 두
사람의 아들을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고 그를 위로한다.
병사로 징집된 수많은 청년들 가운데 제임스는 남다른 진중한 면을 가진 청년으로 묘사된다. 그는 생각이 깊고 예의바르게 보인다.
그런 그의 외양은 때로는 놀림감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산다. 하지만 그가 진짜 사랑을 아는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집에 가버린 밤이면 홀로 전등 앞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어머니에게 다정한 아들이 되어 주지 못한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참다못해 아들의 관심사에 대해 말을 꺼낼 정도로 아버지에게 살가운 아들도 되지 못한다. 그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안쓰러워 밖으로만 겉돌
뿐이다. 그리고 며칠간의 사랑을 나눈 것이 다였지만 그의 평생의 사랑이 된 대프니에게는 찌질이처럼 군다. 그리고 만나보지
못한 자기 아이의 태어난 날짜를 매일 챙겨 셀 정도로 집착한다. 그런 남편을 이해하며 보듬어주는 아내 헬렌에게는 고마워하면서도 이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꽤나 인간적이면서도 이기적인 모습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데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법인데, 제임스의 모습으로 그것을 확인하자니 영 껄끄러웠다.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의 단점을 누군가 콕 찍어
지적하면 불편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은 허상이고 대프니와 함께 했던 며칠이라는 시간만이
진짜였던 것처럼 구는 것이 얄밉다. 나의 모습 중 어느 것만이 진짜이고 어느 것은 가짜일 리 없다. 나의 모습 모든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편지 속에 털어놓은 것들이 그의 가장 좋은 모습일지는 몰라도 그의 본질이나 실체, '본연의 나'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가 그렇게 믿으려
하는 것뿐이다. 그가 마음 한구석을 다른 곳에 두고 어디 한 군데는 비어 있는 상태로 가족을 대하는 모습도 그의 본질과 실체, 본연을
이룬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부끄럽지 않았을까?
어려운 환경에서 만난 사랑이었고, 끝내 얻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더욱 더 격렬하게 그리워했다. 사랑의 크기와 깊이는 저마다
다르고 만난 기간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지만, 상황이 사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만일 그가 헬렌을 케이프타운에서 만났고, 전쟁이 끝난 뒤 영국에
돌아와서 대프니를 만났더라면 그는 헬렌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수백 명이 열에 달아오른 몸으로 갑판에
누워 한숨을 쉬고, 먹은 것도 없이 속을 게우려고 구역질을 했다. 아침이면 일어서라는 명령에 난간에 달라붙어 그걸 움켜쥐거나 서로를 부여잡았다.
속이 울렁거리지 않는 운 좋은 병사들이 재빨리 호스로 물을 뿌리며 갑판을 닦으면 그들은 따가운 바닷물 줄기를 피해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누웠다. 아니, 맥없이 쓰러졌다. 또 물이 부족해졌다. 그걸 보면서 그들은 이렇게까지 서쪽으로 멀리 우회할 계획이 아니었을 거라고
유추했다. 그렇다면 그건 뭔가를 피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 척, 또는 한 척 이상의 U보트가 그들을 따라붙은 것이었다. 그들은 목이
말랐다. 희한하게도 날은 너무 더운데 불덩이 같은 몸으로 덜덜 떠는 병사들이 있었다. 일사병이었고, 그들은 의무실로 올라갔다. (p.
309)
제임스는 징집되어 훈련을 받은 이후 총 한번 제대로 쏴보지 못한다. 내내 배를 타고 이동하다가 독립운동의 바람이 거센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 주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계속해서 불평하는데, 뱃멀미가 심해서 고통이 심했던 데다 인도에 머물며 이겨내야
했던 권태가 너무도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생각만 해도 힘들 것 같다. 몇 개월을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고 지내야 하고, 사람을 미치게 하는
권태 속에 살아야 한다면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진짜 피바람 몰아치는 전선에서 싸워야 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불평은 복에 겨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차라리 총을 들고 싸우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 상황에 있었다면 분명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장에 있었던 이들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평생을 괴로워한다. 아니면 장애를 갖게
되어 전쟁 이후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곤란을 겪기도 한다. 제임스가 징집될 무렵 어떤 여인이 말했듯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참혹한 전장이 주는 고통 속에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일시적으로 뱃멀미와 권태로움, 더위와 싸우는 편이 나은
법이다.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수만큼 거기에는 수많은 인생이 있다. 사람이란 모두 비슷한 것 같은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쩌면
이다지도 다른 생각을 품고 다른 선택을 하며 다른 인생을 사는지.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나는 놀라곤 한다. 그리고 마치 관음증처럼
타인의 삶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그것은 그저 호기심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살아나가고 있는지 그 기준을 남들의 삶을 통해 얻고
싶어서이다. 《그랜드마더스》도 여러 형태의 인생을 내게 보여주었다. 흥미롭게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이야기를 정리하며 나는 읽을 때보다 더
많은 여러가지를 깨달았다. 짤막한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 이 책을 읽기
전보다 읽은 후의 나는 분명히 0.1%쯤은 더 발전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