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픽하이는 진부하다고 했고, 브로콜리너마저는 보편적이라고 했다. 십센치는 우습다고 했고, 악뮤는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했다.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의 수보다도 훨씬 많이 존재한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한 켠에 묻힌 사람들처럼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역시 전승되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 여전히 사랑 이야기는 차고 넘치고 이별 이야기 또한 넘쳐흐른다. 그래서 너무나도 흔해 보이지만 모두 다른 존재들의 결합이 만들어낸 고유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 이야기를 한다.


늘 그래왔듯이, 아마 세상의 모습이 지금과는 조금 달라져도 사랑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다섯 명의 작가는 미래에 존재할지도 모를 어떤 사랑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대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표제작인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이유리)에는 사랑을 잊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수진은 성재와 헤어진 뒤 남은 사랑의 감정을 친구 영인에게 준다. 이를 소설에서는 감정 전이라고 부른다. 감정 전이는 이별 후 남은 사랑을 손쉽게 정리할 방법 같아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이 끝나기 직전 이를 비튼다. 이 소설과 동명의 노래 후렴 마지막 가사가 내 곁에 머물러줘요이듯이 잊어야 하지만 잊히기 싫은 모순적인 마음은 찝찝함을 남긴다. 영인의 남편 민후가 염치없이 그게 진짜 해결일까요?”라고 물은 것처럼 말이다.


이 앤솔러지는 사랑을 단순히 연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폴터가이스트」(김서해)와 「미림 한 스푼」(설재인)의 세인과 주경은 각각 대한민국의 고3과 고1이다. 「폴터가이스트」는 제목 그대로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고3 세인이 주인공이고, 「미림 한 스푼」은 지구 종말이 프로듀스101과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우승자인 특정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주경의 이야기가 나란히(하지만 서로 얽히며) 전개되는 작품이다.


미림맛이 단 일본 술이자, 국내에서는 맛술의 한 종류라고 한다. 서로 다른 작품이기는 하지만 「폴터가이스트」의 세인과 현수는 서로에게, 「미림 한 스푼」의 미림은 주경에게, 작가 J는 지구인들에게 미림 한 스푼이 되어준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자신을 진정으로 믿어주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줄, 대가 없는 사랑 그 한 스푼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김초엽)의 피부 시술자들은 펭귄이나 곰의 피부를 본뜬 인공피부를 이식받은 사람들인데, 수브다니는 그보다 더 독특한 요구를 해서 솜솜 피부 관리숍 사장과 주인공 현을 심히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하는 건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해받지 못한 욕망을 품은 존재들은 너무나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작품 「뼈의 기록」(천선란)은 마지막답게 죽음을 논하며 사랑을 이야기한다. 로비스는 장의사 안드로이드이다. 로비스는 죽음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인간과는 다른 마음으로, 안드로이드만의 방식으로 유가족을 위로하고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니 로비스의 일터는 망자를 향한 다양한 마음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마음을 유가족과 망자와 동료 모미를 통해 로비스가 얻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보다 로비스가 낫다는 생각도 든다.


존재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존재와 다양한 사랑을 나눈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고 이별하기 때문에 노래에서도 소설에서도 사랑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이토록 아름다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사랑을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옷을 입었으면 빨래를 해야 하듯 사랑을 했다면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남은 사람이 깨끗이 치워야 하는 것,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켜야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31

엄마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스스로 시간을 멈추는 것 같았다. 현재를 거부하고 오직 기억만으로 자녀를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사랑이 닳지 않으리라 믿는 것처럼. - P68

어른들은 부고와 장례를 하도 많이 접해서 익명의 죽음 정도는 들으면서 동시에 잊는 것 같았다. 조금 억울하거나 안타까운 죽음은 가까스로 기억해낸 뒤 쉽게 평가하고 또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다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P71

욕망의 형태 역시 처음에는 추상적이고, 마치 조각을 빚듯 구체화하기 전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거라고 했죠. - P134

언젠가는 다시 그 거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싫지 않았거든요.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자기 온몸을 바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요. - P167

당신다운 일을 당신이 해서 좋다고 말해줄걸. - P201

너를 위해 누군가가 시간과 힘을 쓰는 날이 생길 때도 있단다. 그것이 금세 무용해진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그저 네가 원했으니까, 너라는 사람이 이 결과를 필요로 했으니까 노력을 기울였을 거야. 살다보면 아주 가끔 그런 순간을 마주하는 때가 있어서, 그게 나머지 오천이백만 겁의 허름하고 꾀죄죄한 결들을 잊게 만들지. - P212

새긴 문신이 죽어서도 남는다는 걸 알면 멋이라는 대답 대신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해줄까? - P237

모미의 키보다 큰 그림자가 로비스의 발등을 덮었다. 로비스는 혹여나 그림자가 불편할까, 발을 뒤로 물렀다. - P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번째 원고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도 처음이었고, 오늘도 처음이고, 내일도 처음일 것이다. 매 순간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관통한다. ‘알 수 없음의 복판에서 매일매일 헤맨다.


「규칙의 세계」(함윤이)에는 미신이라고 불리는 규칙과 법이라고 불리는 규칙들이 혼재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들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규칙뿐만 아니라 낯선 규칙까지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한국인 인물인 1인칭 화자 성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너무 많은 규칙 속에서 잘 알지 못하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살기 위해 애쓴다.


살기 위해 규칙을 지키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고 소망한다. 그럼에도 미래는 어느 순간에 삶을 어김없이 배반한다. 「긴 하루」(박민경)의 병철은 가까운 사람들의 미래가 한순간에 뒤집히는 걸 목격했고, 자신도 그 선 위에 서 있음을 느낀다. 그가 그렸던 미래와는 다른 낯선 날들을 맞이하겠지만, 그래도 팔찌의 노란 스마일 참처럼 무해한 웃음을 짓는 순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비일상이 일상이 되고, 다시 새로운 비일상을 맞이한 인물은 「태엽은 121/2바퀴」(김기태)에도 등장한다. 12바퀴만 돌리면 충분히 감겼던 태엽이 모르는 사이 반 바퀴를 더 감아야 톱니에 걸리게 되었듯이 주인공과 그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흘러가는 시간에 조금씩 늘어진다. 세월이 꽤 많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비일상적인 일도 일어나지만, 그는 새로움을 꿈꿀 시간이 남아 있다고 느낀다. 마치 높다란 파도들이 정연한 주름을 이루고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알 수 없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공연히 호들갑을”(「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 떤다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며 이를 기준으로 알지 못하는 타인을 재단하는 건 폭력이 되기도 한다. 「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임현석)의 주인공은 자신의 문학적 사상을 잣대로 진영을 교화하려 했다고 말하면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뒤로 숨기려고 한다. 어쩌면 각자가 지닌 고유의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결여된 그의 모습에서 진영은 그 욕망을 목격하고 만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과 광기의 왕국」(유주현)의 윤 여사 역시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마을에 새로 온 사람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다. 그는 자기가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올바른 여성으로 살았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다. 윤 여사는 교장이었던 남편이 은퇴한 후에는 남편의 명함 대신 변호사 딸의 명함을 사람들에게 주고 다니는데, ‘언덕 집에 새로 이사 온 혼자 사는 여성이 딸의 명함을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에게서 비롯된 우월감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윤 여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게도 자신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압박하고 그들을 비극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살았던 언덕 집이 문제라고 숙덕임으로써 자신들이 가한 폭력을 모르는 척 외면한다.


알 수 없음으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앤솔러지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2022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책이 기획될 것이며 스무 명이 넘는 작가 중 자기 작품이 거기에 실리게 될 미래를 몰랐을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추천사 대신 손보미 작가님의 짧은 에세이가 실려 있다. 갓 등단한 신인 작가나 등단한 지 10년도 넘은 작가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계속 쓰라고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한테 와. 네가 우리를 보호할 테니까, 우리도 너를 책임질 거야.
(함윤이 「규칙의 세계」 中) - P39

아주 낯선 나라에서 온 사물이 어느 순간 타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셈이지. 자기만을 부르는 글자까지 생긴 거잖아. 그 점이 좋아서 이 이름을 쓰고 싶었어. 어디서나 이름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하니까. 사실상 가장 강한 부적이지.
(함윤이 「규칙의 세계」 中) - P41

결국 글쓰기란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 나를 쉼 없이 들여다보려는 태도이자 그해 혹은 그 순간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확장하며 돌이켜보는 일.
(임현석 에세이 「내 안의 세계를 존중하는 방식」 中) - P92

무지개 너머 아름다운 어딘가란 결국 허상이야. 그걸 깨닫지 못하면 비극뿐이고.
(유주현 「꿈과 광기의 왕국」 中) - P108

언제부턴가 그저 연결음이 이어진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 적어도 살아는 있다는 거니까.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또 볼 수 있다는 거니까. 세상엔 그런 식으로 확인되는 안부도 생사도 있는 것이다.
(박민경 「긴 하루」 中) - P140

병철은 다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우란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슬픔이라기보다는 열패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박민경 「긴 하루」 中) - P156

돌아보면 우스운 일이 있었고 울적한 일이 있었다. 정말 있었을까 싶은 일들과 정말 없었을까 싶은 일들,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없는 일들이 있었다.
(김기태 「태엽은 12와 1/2바퀴」 中) - P198

소설은 내 삶의 일부였다. 그건 소설이, 소설을 쓰는 행위가 언제나 나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에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무리 실망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설 쓰는 행위를, 내 삶에서 그저 떨구어낼 수 없을 것이다.
(손보미 에세이 「내 삶의 일부」 中) - P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 폴리스맨
베선 로버츠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그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 내가 가진 것들을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한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에 의해 평가당한다. 그 매서운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놀라고 움츠러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나 역시 누군가에겐 가당찮은 재단사 행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를 내 시선만을 기준으로 보니까 말이다. 이 소설의 세 주인공 경찰 톰과 교사 매리언, 학예사 패트릭, 그들 역시 시대의 시선과 법으로부터의 속박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다가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말았다.


톰에게는 결혼 전부터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 패트릭에게 톰은 사랑하는 나의 순경님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1950년대 영국 브라이턴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동성끼리 사랑을 나누기만 해도 범법자가 되었었다. 심지어 문학 하는 남자, 미술 하는 남자도 혐오의 대상이었다.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었던 시대에 그들은 타인의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그러니까, 톰은 정상처럼 살기 위해 결혼했다. 그러나 하필 그가 고른 결혼 상대는 매리언이었다.


매리언은 친구 실비의 오빠인 톰을 짝사랑하다가 끝내 결혼에 성공했다. 매리언과 톰 둘 다 결혼을 원해서 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일치하지 않았다. 매리언이 꿈꾸는 톰과 함께하는 미래 속에 아이는 없었다. 매리언은 아이에게 얽매이지 않고 교사로서 계속 일하고 싶어 했다. 이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여성상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상성을 띠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톰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매리언이 일을 그만두길 바랐지만, 매리언은 굴하지 않았다.


톰이 결혼을 택한 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매리언 입장에서 보면 뒤통수 맞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틀어진 데 대한 책임이 톰에게만 있다고 볼 수도 없을 듯하다. 매리언은 결혼 전 실비에게 이미 톰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톰의 성 정체성을 눈치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면서 톰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길 바랐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 서서 서로에게 자신의 욕구를 관철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과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충돌해서 그들은 상처를 입고, 오랜 시간을 남과 같은 사이로 흘려보내 버렸다. 그렇지만 매리언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데서 더 나아가 고백함으로써 늦게나마 상처를 봉합할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마음이 상처로 완전히 얼룩져서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않았을까.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톰은 집으로 돌아오면 곧장 셔츠를 벗고 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난 늘 톰의 그런 점이 좋았다. 그런데 패트릭 당신과 있을 때는 셔츠를 그대로 입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막 떠오른다. - P49

그러면, 그 모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진저리가 나도록 싫다는 사실을? - P266

우리 사이에 고통만이 아니라 다정함도 있었다는 걸 당신이 알도록. 우리 둘 다 실패했지만 우리 둘 다 노력했다는 걸 알도록. - P3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옮김 / 엘리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고작 이십몇 년간 살면서 혼자 가장 멀리 가본 곳은 집에서 겨우 50km 떨어진 곳이다. 타인과 함께한 것까지 포함하더라도 그 거리가 50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광년이 약 9.46×10km라고 하니 내가 평생 움직일 거리를 다 합하더라도 1광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SF 세계에서는 그 먼 거리를 몇 번이고 오갈 수 있다. 우주 진출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꿈을 유일하게 실현할 수 있는 상상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하지만 상상을 대변하는 건 오로지 남성들의 몫이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남성적인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SF가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의 지평을 넓힐 틈을 후배 작가들에게 제시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SF가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장르가 되는 길의 초석을 팁트리가 깔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테라여, 그대를 따르리라, 우리의 방식으로」는 디아스포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솔테라인들은 제 손으로 지구를 망가뜨린 지구인들의 후손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새로운 집인 레이스월드를 만들어냈다. 소설 속 지구인들은 후손에게 레이스월드라는 가느다란 희망 한 줄기를 물려줬다.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미래 세대가 우리를 어떤 조상으로 기억할지 예상해보며 지구라는 집을 가꿔 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레이스월드조차 없으니 말이다.

 

SF라기보다는 판타지적인 소설 「문이 인사하는 남자」에는 제목 그대로 문의 인사를 받는 남자가 등장한다. 심지어 그의 옷 안에는 키가 1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들이 산다. (그밖에도 남들에게는 비현실적이지만 그에게는 일상인 일들이 몇 가지 더 있다.) 그는 아주 작은 여자들에게 자신의 옷을 집으로 내어주는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당대 사회 여성들의 취약성을 고발하고자 한 듯하다. 하지만 1973년에 출간된 책이라 그런지 여성들을 보호하는 주체가 남성이 아닌 사회적 안전망이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웠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제목 그대로집으로부터 일만 광년떨어진 곳으로 향해 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그칠 수도 있지만, 어떤 작품에서는 인간이 원래 살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사고하는 생명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또는 인간의 욕망을 비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은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이 투영된 공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동안 SF는 비교적 말랑말랑한 작품들 위주로 읽었어서 그런지 작가가 만든 세계에 깊이 빠져드는 게 다른 책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직접적 의미이든 비유적 의미이든간에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된 소설 속 인물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지 못했을지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귀가 유무를 떠나 우리가 돌아갈 집이 모두가 안온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랄 뿐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우리 개념이 약간 바뀌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각자의 삶에서 벌어지는 진짜 드라마에서는 배경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용기가 부족해서 고백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안고 산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잊을 수 없고, 문득문득 떠올라 피식거리게 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웃을 수는 없어서 종내 쓰고 있던 안경을 벗게 하기도 하는, 결코 타인이 대신 견뎌내 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묘지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들려줄 수 없는, 어쩌면 일부러 들려주지 않은 망자들의 이야기는 그들과 함께 묘지에 묻혀 있다. 비올레트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떠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품은 채 망자들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묘지를 가꾸는 묘지지기다. 다양한 상처가 공존하는 그곳을 비올레트는 꽃들로 아름답게 꾸몄다. 묘지라는 공간의 의의를 상실과 추모의 공간에서 정원이라는 편안한 쉼터로 확장시켰다.

 

비올레트가 가꾼 묘지 정원은 그녀의 삶과도 닮았다. 이 소설은 비올레트라는 한 인간이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잃는 비극을 겪고 회복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상실과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을 밟은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은 그녀가 가꾼 묘지에서 진행되는 장례 절차와도 비슷한 듯하다.

 

묘지에는 망자뿐만 아니라 망자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들이 모인다. 장례는 상실로 인한 상처에서 벗어나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장례라는 형식적인 문화는 어쩌면 망자를 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리 예우를 다한들 망자는 그것을 직접 누릴 수 없으니 말이다. 결국 장례는 아직 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슬픔에 계속 잠겨 있지 않고 삶을 계속해나가기 위해,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행해지는 게 아닐까.

 

비올레트의 묘지 정원은 그런 의미에서 그 어떤 묘지보다도 더 아직 살아 있는,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비올레트는 자신이 상실한 존재가 묻혀 있는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을 들임으로써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 필리프가 묘지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과 대비된다.

 

내 마음에도 내가 가꾸어야 하는 묘지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묻혀 있다. 이미 잃어버려 볼 수 없는 것과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함께 품고 살아간다. 앞으로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는지는 마음속 묘지를 어떻게 가꾸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지금 좋아하는 존재들을 곁에 두는 일,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묘지에 수많은 묘비명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흐르는 세월의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추억을 꼭 붙들기 위해. - P21

사실 우리 장의사들이 상대하는 건 삶이라고. 어쩌면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더. 왜냐하면 우리를 찾는 건 남은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이거든. 신부님이 우리한테 늘 온화하게 하시는 말씀 있잖아. ‘형제님들, 우린 죽음의 산파들입니다. 우린 죽음을 출산하니까요. 그러니 생을 누리세요, 꼭 쟁취하십시오.’ - P155

"삶은 절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종이 한 장을 들고 찢어보세요. 찢긴 조각들을 아무리 이어 붙인들, 찢기고 구겨진 자국이며 테이프의 흔적은 영원히 남잖아요." - P246

"비올레트, 담쟁이는 나무들을 숨 못 쉬게 해. 잊지 말고 잘라줘야 해. 절대 잊어선 안 돼. 너도, 생각들이 너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그 즉시 전지가위를 들고 괴로움을 잘라버려." - P5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