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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ㅣ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에픽하이는 진부하다고 했고, 브로콜리너마저는
보편적이라고 했다. 십센치는 우습다고 했고, 악뮤는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했다.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의 수보다도 훨씬 많이 존재한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한 켠에 묻힌 사람들처럼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역시 전승되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 여전히 사랑 이야기는
차고 넘치고 이별 이야기 또한 넘쳐흐른다. 그래서 너무나도 흔해 보이지만 모두 다른 존재들의 결합이
만들어낸 고유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 이야기를 한다.
늘
그래왔듯이, 아마 세상의 모습이 지금과는 조금 달라져도 사랑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다섯 명의 작가는 미래에 존재할지도 모를 어떤 사랑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대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표제작인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이유리)에는 사랑을 잊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수진은 성재와 헤어진 뒤 남은 사랑의 감정을 친구 영인에게 준다. 이를 소설에서는 ‘감정 전이’라고
부른다. 감정 전이는 이별 후 ‘남은 사랑’을 손쉽게 정리할 방법 같아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이 끝나기
직전 이를 비튼다. 이 소설과 동명의 노래 후렴 마지막 가사가 “내
곁에 머물러줘요”이듯이 잊어야 하지만 잊히기 싫은 모순적인 마음은 찝찝함을 남긴다. 영인의 남편 민후가 염치없이 “그게 진짜 해결일까요?”라고 물은 것처럼 말이다.
이
앤솔러지는 사랑을 단순히 연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폴터가이스트」(김서해)와 「미림 한 스푼」(설재인)의
세인과 주경은 각각 대한민국의 고3과 고1이다. 「폴터가이스트」는 제목 그대로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고3 세인이
주인공이고, 「미림 한 스푼」은 지구 종말이 프로듀스101과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우승자인 특정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주경의 이야기가 나란히(하지만 서로 얽히며) 전개되는 작품이다.
‘미림’은 ‘맛이 단 일본 술’이자, 국내에서는 맛술의 한 종류라고 한다. 서로 다른 작품이기는 하지만
「폴터가이스트」의 세인과 현수는 서로에게, 「미림 한 스푼」의 미림은 주경에게, 작가 J는 지구인들에게 “미림
한 스푼”이 되어준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자신을
진정으로 믿어주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줄, 대가 없는 사랑 그 한 스푼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김초엽)의 피부 시술자들은 펭귄이나 곰의 피부를
본뜬 인공피부를 이식받은 사람들인데, 수브다니는 그보다 더 독특한 요구를 해서 솜솜 피부 관리숍 사장과
주인공 현을 심히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하는 건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해받지 못한 욕망을 품은 존재들은 너무나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작품 「뼈의 기록」(천선란)은 마지막답게 죽음을 논하며 사랑을
이야기한다. 로비스는 장의사 안드로이드이다. 로비스는 죽음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인간과는 다른 마음으로, 안드로이드만의
방식으로 유가족을 위로하고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니 로비스의 일터는 망자를 향한 다양한 마음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마음을 유가족과 망자와
동료 모미를 통해 로비스가 얻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보다 로비스가 낫다는 생각도 든다.
존재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존재와 다양한 사랑을 나눈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고 이별하기 때문에
노래에서도 소설에서도 사랑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이토록 아름”다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사랑을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옷을 입었으면 빨래를 해야 하듯 사랑을 했다면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남은 사람이 깨끗이 치워야 하는 것,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켜야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31
엄마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스스로 시간을 멈추는 것 같았다. 현재를 거부하고 오직 기억만으로 자녀를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사랑이 닳지 않으리라 믿는 것처럼. - P68
어른들은 부고와 장례를 하도 많이 접해서 익명의 죽음 정도는 들으면서 동시에 잊는 것 같았다. 조금 억울하거나 안타까운 죽음은 가까스로 기억해낸 뒤 쉽게 평가하고 또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다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P71
욕망의 형태 역시 처음에는 추상적이고, 마치 조각을 빚듯 구체화하기 전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거라고 했죠. - P134
언젠가는 다시 그 거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싫지 않았거든요.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자기 온몸을 바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요. - P167
당신다운 일을 당신이 해서 좋다고 말해줄걸. - P201
너를 위해 누군가가 시간과 힘을 쓰는 날이 생길 때도 있단다. 그것이 금세 무용해진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그저 네가 원했으니까, 너라는 사람이 이 결과를 필요로 했으니까 노력을 기울였을 거야. 살다보면 아주 가끔 그런 순간을 마주하는 때가 있어서, 그게 나머지 오천이백만 겁의 허름하고 꾀죄죄한 결들을 잊게 만들지. - P212
새긴 문신이 죽어서도 남는다는 걸 알면 멋이라는 대답 대신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해줄까? - P237
모미의 키보다 큰 그림자가 로비스의 발등을 덮었다. 로비스는 혹여나 그림자가 불편할까, 발을 뒤로 물렀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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