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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옮김 / 엘리 / 2022년 8월
평점 :
내가 고작 이십몇 년간 살면서 혼자 가장 멀리 가본 곳은 집에서 겨우 50여km 떨어진 곳이다. 타인과 함께한 것까지 포함하더라도 그 거리가 50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광년이 약 9.46×10km라고 하니 내가 평생 움직일 거리를 다 합하더라도 1광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SF 세계에서는 그 먼 거리를 몇 번이고 오갈 수 있다. 우주 진출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꿈을 유일하게 실현할 수 있는 상상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하지만 상상을 대변하는 건 오로지 남성들의 몫이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남성적인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SF가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의 지평을 넓힐 틈을 후배
작가들에게 제시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즉 SF가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장르가 되는 길의 초석을 팁트리가 깔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테라여, 그대를 따르리라, 우리의
방식으로」는 디아스포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솔테라인들은 제 손으로 지구를 망가뜨린 지구인들의 후손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새로운 집인 레이스월드를 만들어냈다. 소설 속 지구인들은
후손에게 레이스월드라는 가느다란 희망 한 줄기를 물려줬다.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미래 세대가
우리를 어떤 조상으로 기억할지 예상해보며 지구라는 집을 가꿔 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레이스월드조차
없으니 말이다.
SF라기보다는 판타지적인 소설 「문이
인사하는 남자」에는 제목 그대로 문의 인사를 받는 남자가 등장한다. 심지어 그의 옷 안에는
키가 1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들이 산다. (그밖에도
남들에게는 비현실적이지만 그에게는 일상인 일들이 몇 가지 더 있다.) 그는 아주 작은 여자들에게 자신의
옷을 집으로 내어주는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당대 사회 여성들의 취약성을 고발하고자 한 듯하다. 하지만 1973년에
출간된 책이라 그런지 여성들을 보호하는 주체가 남성이 아닌 사회적 안전망이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웠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제목 그대로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떨어진 곳으로 향해 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집’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그칠 수도 있지만, 어떤 작품에서는 인간이 원래 살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사고하는 생명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또는 인간의 욕망을 비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은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이 투영된 공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동안 SF는 비교적 말랑말랑한 작품들 위주로 읽었어서 그런지 작가가 만든 세계에
깊이 빠져드는 게 다른 책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직접적 의미이든 비유적 의미이든간에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된 소설 속 인물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지 못했을지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귀가 유무를 떠나 우리가 돌아갈 집이 모두가 안온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랄 뿐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우리 개념이 약간 바뀌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각자의 삶에서 벌어지는 진짜 드라마에서는 배경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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