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숲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천선란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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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들을 읽었다. 보편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하는 마음들을. 마음 때문에 행복뿐만 아니라 슬픔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슬픔을 머금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인물들을 만났다.


『이끼숲』은 지구의 지상 생태계가 파괴되자 지하 도시를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 갇혀 버린 인류의 이야기다. ‘스스로갇히다라는 두 표현은 문법적으로 호응하지 않지만 이 책을 설명할 때만큼은 그 어떤 표현보다도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 않을까 싶다. 다시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지하 도시에서는 불합리한 일들에 눈 감고, 노동에 도움 되지 않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답습하면서도, 지상의 실제 상황은 알지 못하니 말이다.


여섯 친구는 그런 지하 도시에서 마음을 나눈다. 첫 번째 작품 「바다눈」의 주인공 마르코는 열다섯 살이 되어 막 독립하고 취직한 뒤 낯선 감정들과 마주한다. 파업에 모든 걸 바치는 회사 선배 커커스를 보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가족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은희를 보면서 마르코는 두려움과 책임감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내 상실까지도. 알지 못했던 마음을 통해 마르코는 울음을 배웠다.


마르코의 친구 의주에게는 비밀이 있다. 자기에게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하 도시에서는 태어날 수 있는 아이의 수가 정해져 있는데, 아이를 한 명만 낳아 키울 수 있는 의주와 의조의 부모는 쌍둥이 자매를 낳고 만다. 「우주늪」은 지하 도시에 등록될 수 없었던 의조가 의주에게 쓴 편지다. 배관을 기어다니면서 의주를 지켜보고 느낀 것들을. 또 어딘가에 존재하는 비밀의 존재와 마음이 잇닿은 이야기를 담아.


누군가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애초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곳. 지하 도시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지만, 그 희생은 너무나 쉽게 감춰진다. 유오의 희생은 건설 사고 카운트 전광판의 1이라는 숫자로 가려진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 숫자에 이름과 얼굴이 있고 웃음과 내일이 있었다는 걸잊지 않기 위해 숫자 밖으로 유오를 끄집어낸다.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 「이끼숲」은 희생을 충분히 애도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소마와 친구들이 허용되지 않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분출하는, 지하 세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헤치는 이야기다.


꿈과 감정이 소거된 곳, 거대한 시스템에서 언제든 바꿔 끼울 수 있는 나사 같은 존재로 인간을 격하한 사회에 대한 반발심이다. 슬픔이 허락되지 않은 사회에서 한껏 유별나게 슬퍼하고자 하는 연약한 마음들이 모여 단단한 마음을 이룬다. 지상에 나가고 싶다는 유오의 소원을 실현하고자 하는 어찌 보면 무모하면서도 단단한 그 마음을.


마음들을 읽었다. 마음들을 들었다. 마음들을 보았다. 세상이 파괴돼도 끝끝내 파괴되지 않을 마음들을. 그렇기에 서로를 끌어안고 실존하는 별과 식물과 흙을 찾아 떠나는, 실존하는 마음들을.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수레는 레일에서 이탈하거나 뒤집혀. 책임감 없는 행복은 위험하고, 행복 없는 책임감은 고통스러운 거야. - P38

살아가는 건 징검다리 건너듯이 원치 않아도 어느 순서에는 반드시 불행의 디딤돌을 밟아야만 하는 것 아닌가. - P69

증오에는 웃음이 필요해. 대상을 우습게 만드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 효과가 길지는 않아. 웃음 뒤에는 더 큰 증오가 오니까. - P105

내 생각이 글자로 옮겨지다니. 엄청난 일이야. 이건 어떤 세상을 옮기는 일이라고. 그래서 매번 문장을 쓸 때마다 건축하는 마음으로 해. 나는 건축도 뭔지 잘 모르지만, 이 지하 도시와 같은 거 아니겠어? 무너지지 않게, 헷갈리지 않게, 망가지지 않게. - P107

그날, 내게 글을 가르쳐주던 치유키가 말하더라.
글을 알면 뭐가 생기는지 알아?
내가 모른다고 했더니, 곧장 답을 알려줬어.
싸우는 힘. - P124

지상이 황무지라고 하더라도 어쩌다 남은 들꽃 한 송이에 그 애는 모든 걸 가진 듯 행복해했겠지. 세계를 지배한 절망보다 나약하게 핀 희망을 사랑했을 테니까.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면서. - P156

사랑하는 사람을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겠다는건 예측 불허의 위험이 가득한 어둠을 헤집는 일인 것이다. 하루에도 수차례 사고가 발생했다. 비록 사고는 숫자로 집계되지만, 그 숫자에도 이름과 얼굴이 있고 웃음과 내일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은 자주 잊지만 말이다. - P157

무모하고 위험한 건 싫다. 따분할 만큼 평온한 일상을 원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게 평화의 기본 조건이라는 걸 그 애를 좋아하고 나서야 알았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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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스물셋 앤드 앤솔러지
김청귤 외 지음 / &(앤드)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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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던져진다라는 표현이 제일 정확하지 않을까. 내가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등 떠밀린 것뿐이니 말이다. 내던져졌을 때 잘 착지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노력했더라도 완벽하게 준비하기란 불가능하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십 대 중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스물셋이야말로 바로 그 경계선을 넘어가는 시점이 아닐까.


여덟 명의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스물셋에 맞이해야 하는 내던져짐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법소녀, 투쟁!(김청귤)의 여성들은 내던져질 때 어디로 어떻게 착지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마저 박탈당했다. 마법소녀들의 희생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안위가 지켜지지만 정작 마법소녀는, 그리고 마법소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의 안위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법소녀들은 목소리를 낸다. 우리가 원하는 삶은 그게 아니라고, 우리도 꿈을 꾸는 한 사람들이라고, “투쟁한다.


그들의 투쟁 덕분인 걸까. 어디로 내던져질지는 그래도 정할 수 있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인어의 독백」(신종원)의 한나는 스스로 전례가 되고자 했으나 연극에서 퇴장하고 자기의 결말을 찾아간다. 「아직은 무제(無題)(이상욱)의 미연은 영화를 통해 사해를 속박에서 풀어주려는 것처럼 자신의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여명의 코믹스」(임국영)의 우니도 만화를 포기하지 않고 붙잡는다. 그들은 내던져지면서 상처를 입었더라도 굴하지 않는다.


내던져짐의 형태는 세상에 존재하는 스물셋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서로 처한 환경이 다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기에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 그저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다. 「청춘 미수」(이서수)의 김아혜는 미수를 속단하고는 자기의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 미수는 그저 정답이 없어서 헤맸을 뿐인데.


내던져진 채 헤매는 사람들끼리도 갈등한다. 「스토커」(윤치규)의 세 인물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각자 가정에서 보고 자란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미숙해서 불안정했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어차피 관계는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래도 괜찮다.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서이제)처럼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완결되지 못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시작될 수 있으니 말이다.


스물셋들이 어쩌다 발을 디딘 세상은 꽤 잔인하다. 「망한 연애담: 세상을 망하게 한 사랑」(황모과)의 세상처럼 많은 사람이 사랑을 외치지만 그 이면에는 혐오가 가득하다. 혐오로 무장한 세상이 망해야 망하지 않을 수 있는 역설적인 이상한 세상에 스물셋들은 내던져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망하지 않았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마법소녀는 마법소녀에서 은퇴해 또 다른 마법소녀가 되어야 했지만, 사람들 눈에는 편하게 사는 걸로 보이나 보다. 우리는 우리들의 생을 태워 사람을 구했다. 싸우다가도 죽었고, 은퇴해서도 이른 나이에 죽었다. 스물셋. 받침에 ‘ㅅ’이 들어갈 때부터 중반이 되는 거라며, 마법소녀는 어리고 젊어야 한다는 이유로 은퇴당하는 나이였다. 마법소녀는 언제나 어리고, 젊고, 싱그러워야 했으니까. - P34

끝내 내가 알게 되었던 건, 너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그건 어쩌면 세연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계속 너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 지나치도록 네 마음을 궁금해했다는 것만큼 명백한 사실이었다. - P73

영화는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내게는 창을 열 수 있는 힘이 있었으므로 창을 넘어설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려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 P81

날개 없이 날아오르자. 날개가 없으면 날개 때문에 추락할 수도 없으니까. 오로지 추락하겠다는 나의 의지로만 추락하자. - P121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상대가 마음의 문을 닫을 때 내 속에서 녹슨 문이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는 걸. - P138

사람은 누군가를 흉내 내기 위해 반드시 그가 되어야만 할까? - P171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최민혁은 진실을 말하는 게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고 가끔은 적당히 서로를 속이고, 또 알면서도 속아 주는 게 관계를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 P201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나는 내 가능성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폐기하고 싶지 않아. - P245

아무것도 아닌 내가 비록 변변찮더라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럴 때면 새삼 깨닫는다. 내가 그린 컷의 크기는 앞으로도 일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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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는 그림 - 숨겨진 명화부터 동시대 작품까지 나만의 시선으로 감상하는 법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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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본다고도 하고 읽는다고도 한다. ‘읽다라는 단어에는 글을 소리 내 말하거나 이해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소리 따위가 전하는 내용이나 뜻을 헤아려 알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림을 읽는다는 말은 낯설기는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니 그림 역시 책처럼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의미를 분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체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훈련해야 한다. 훈련이라고 하니 거창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내보일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그 자신감을 갖기 어려울 뿐이다. 한국에서 성장했다면 정답을 외우는 데에만 10년 이상을 보냈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몸에 밴 정답을 찾는 습관을 쉽게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나는 전공 과제를 할 때 논문을 아주 많이 참고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논문을 찾아 읽고 글을 쓸 시간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처음으로 참고 문헌 하나 없이 과제를 했는데 다행히 점수를 잘 받았다. 좀 극단적인 방식인 듯하지만 어쨌든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은 주체적으로 읽는 게 어렵다.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너무나 부족해서 내가 틀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내가 읽는 그림』은 틀릴 걱정은 하지 말라며 용기를 심어준다. 미술계 종사자뿐만 아니라 시인, 문화평론가, 방송 PD 등 다양한 필진이 그들만의 눈으로 미술 작품을 읽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을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작품을 읽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뿐이다.


나도 다시 쓰고 싶어졌다. 작년 이맘때쯤 미술비평론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미술 글쓰기를 향한 갈망과 절망을 동시에 키웠었는데, 그 후로 절망이 갈망보다 더 커져서 쓰지 못했다.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미술을 이야기해도 될까, 나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쓰고 싶다. 문학을 이야기할 때 정답이 없다고 하니 미술도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해석이든 괜찮다는 말은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무책임함을 책임져 보고 싶다. 비난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으니 말이다. 몇 달 전에 사놓고 책장에 고이 꽂아둔 미술 글쓰기 책을 조만간 꺼내 읽어봐야겠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누군가 기록을 해서 역사가 되면 그 사실은 죽지 않고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계속 남는다. 앞으로는 어떤 사건들이 기록될까? 어떤 이미지가 미술관에 걸리고, 어떤 이미지가 교과서에 남을까? 이 그림은 1854년에 그려졌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불타고 있다. 그림이 존재하는 한 교회는 계속해서 언제까지나 불타고 있을 것이다. - P18

베케트가 스스로에게 이러한 물음을 되묻는 이유는 세상이 우리에게 건넨 답들이 너무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술가는 이미 주어진 답들 사이에서 ‘만약’이라는 가정 속에 상황을 견주는 일보다, 세상에 없는 답을 발견하는 일을 작업으로 실천합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 답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니, 평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마주하면 어떨까요? 예술은 늘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서 비롯된 미미한 감각을 지지하는 법이지요. - P63

무엇을 그렸는지 잘 보이지 않으면
우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본다.
그리고 다른 각도로 살펴보고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래도 알 수 없을 때는 관습적이고 고정된 시각을 덜어내고
다른 방식으로 보려고 노력해본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과 마주할 기회를 찾기 위해. - P75

과거의 나를 직면할 용기를 내는 것은 꽤나 힘겨운 일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된다. 선택적 망각이다. 뇌가 스스로 하는 자기 합리화일까. 우리는 대부분 미화된 과거를 안고 살아간다. - P90

진심.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 진심이라는 단어의 무게. 진심의 무게는 내뱉는 이와 감당하는 이에게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 P124

드디어 탈출한 초록색 정수리.
바깥에 나와 자유의 냄새를 맡은 뒤 온몸에 밀착된 부목을 원수처럼 훑어보다가, 문득 깨달아버렸습니다. 나를 옥죄고 있는 부목도 한때 꿈이 있는 나무였다는 것을. - P172

눈물과 미소, 어느 쪽이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을 믿느냐다. 믿게끔 만들 수 있느냐다. 어느 쪽을 믿고 싶은가, 그것이 곧 진실이다. 그러므로 진실은 곧 거짓의 시작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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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장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5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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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스스로 말미암기. , 스스로 자기 존재에 관한 원인과 이유가 되기.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를 조금 더 멋들어지게 풀어 썼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이다. 나와 같은 한국어 화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자유(自由)’라는 두 어절짜리 한자어로 너무나 쉽게 축약해 말한다. 그러고는 쉽게 입 밖으로 내뱉지만, 말소리라는 게 볼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못하듯이 자유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게 맞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라는 건 틀림 없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자유라는 단어가 흔히 들려오니 말이다. K의 장례』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도 자유를 갈망한다. 서로 다른 형태의 자유 세 가지가 뒤얽혀 충돌한다. 그 중심에는 K의 죽음이 자리한다.


K는 두 번이나 죽었다. 첫 번째 죽음은 사회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서 두 번째 죽음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비밀을 지켜준 사람은 그와 인생을 맞바꾼 유령 작가 희정이다. 단조로운 삶을 살던 희정은 극적인 사건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기로 한다. K는 자신을 없애고 희정의 뒤에 숨음으로써 자유를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자유는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던 듯하다.


인물들은 자유를 여러 번 언급한다. 무엇과 맞바꾸고 무언가를 담보로 한 자유가 맨 먼저 등장한다. K가 자유를 찾은 대가로 희정과 승미는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희정은 자신의 선택으로 유령 작가가 되었지만 자유롭지 못하고, 승미는 부친인 K를 문학적 아버지로 여기지 않지만 희정의 소설과 같이 언급됨으로써 결국 K와 문학적으로 한데 얽히고 말았으니 말이다.


K는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자유를 얻은 듯 보인다. 하지만 K의 자유와 같은 게 정말 자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 K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은 각각 희정과 승미가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자기와 K의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 세 번째 장은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돼 있다. , K는 타인이라는 한 겹의 막을 통과해 전해진다.


희정과 승미는 이야기한다. K의 꼭두각시가 되길 자처한 한 명과, K의 딸이라는 이름표를 떼기 위해 몸부림친 한 명이. 그들은 부자유 속에서 자유를 고찰했다.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K라는 사람은 그들의 존재 원인이 되었었다. 어찌 됐든 K는 죽었고, 그들은 남았다. 그들을 기묘하게 묶었던 끈은 사라졌다. 이제 그들만 남았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것은 산 자의, 절대적으로 산 자의 몫이고, 그리움과 슬픔의 자리에 세상에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놓는 것 역시 산 자의 마음이다. - P19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말해질 수 있다는 자유 속에 방목되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비밀의 함정에 연루시킨다. 나는 가망 없는 비밀의 본색을, 비밀의 유일한 공모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 P36

이상하다. 능동적인 삶을 살아갈 의지가 없었음에도 그가 준 선택의 권한이 내게 자유를 준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 P41

그런 순간에 나는 내게 현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를 떠올리고는 했다. 동시에 나의 고장나버린 어떤 부위가 내게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뇌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속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속지 않는다면 영원히 설득할 수 없는 미로였다. - P72

죽음은, 이별은, 소멸은 간단히 추억으로 교환된다. 갈등과 분노는 안타까움과 위무의 기도에 침윤된다. 소멸한 자의 슬픔과 번뇌에 목소리가 주어진다. 죽은 자가 죽기 전에 쌓은 악덕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서사가 부여되고, 그의 죄는 그와 함께 소멸한다. 남은 자들의 고통은 재갈을 물고 신음한다. 책임을 묻거나 싸울 수 없고, 소멸을 되돌릴 수도 없어서,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통증 같은 것을 귀중한 보물처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산 자들의 세계는, 그렇게 산 자들의 평화를 지속한다. - P73

무엇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떤 사건을 자연스레 잊는다면, 사건이 나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라 해도 때때로 그것을 기억하는 지신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기억과 내 인생 안에서 동거하는 중이다. 내가 끊임없이 생각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나를 포획하고 있는 법이다. K, 그는 나의 아버지이며, 나를 지배하고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이름이다. - P109

아무리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려보아도 문장이 완성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걸, 그게 자신이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을 승미는 다시 한 번 경험했다. 어떤 혼란은 문장이라는 새로운 주거지 안에서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을.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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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에디터스 컬렉션 15
메리 셸리 / 문예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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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이 좌측 상단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생명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한 프랑켄슈타인과 이제 막 눈을 뜬 그의 피조물을. (95페이지 삽화. 위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를 환기하여 삶의 덧없음을 나타나고자 했던 과거의 화가들이 떠올랐다. 욕망의 결과에 대한 경고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은 고향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 이상을 욕망했다. 그는 생명의 기원을 밝히고 싶어 했고 그의 지독한 욕망이 괴물을 만들어냈다. 정확하게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사람보다 훨씬 신체적 능력이 월등하고 똑똑하나 흉측하게 생긴 생명체를.


눈을 뜨자마자 창조주에게 버려지고 이름 없이 그저 괴물이라고 명명되어버린 괴물은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겉모습이 흉측하지만 마음만큼은 순수했다고 할 수 있다. ‘괴물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였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괴물을 반기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괴물의 겉모습만 보고 마음을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듯이 괴물도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지만 아무도, 심지어 창조주마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괴물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싶다는 보편적인 욕망을 충족할 수 없었다.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과 괴물의 처지가 대조되어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괴물의 비범한 능력은 두려워했다. 마치 백인이 흑인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비인간으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이 괴물을 창조한 것을 후회했지만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기 잘못을 자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괴물은 자기 잘못을 인정했으니 그는 자신이 괴물이라고 여기는 존재보다도 못한 인간이 된 셈이다. 심지어 뒤로 갈수록 괴물보다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괴물은 타인에 의해 비인간이 되었다. 그러니 괴물은 괴물이라고 불려서 정말로 괴물이 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선만 사용한 그림체가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소설에는 언급되지 않은 요소가 간혹 그림에는 있기도 했는데,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러한 상상력 덕분에 소설을 더 생생하게 읽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표지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생명의 원인을 밝히려면 우선 죽음을 수단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 P82

삶은, 비록 고뇌 덩어리라고 해도 내겐 소중한 것이오. 그러니 난 삶을 지킬 것이오. - P184

그런데 내가 내 적들에게 호의를 가져야겠소? 아니오. 그 순간부터 나는 인류, 아니 누구보다 나를 만들어 이토록 참을 수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 내몬 자와의 영원한 전쟁을 선포했소. - P262

내 심장은 사랑과 동정에 민감하게 만들어졌소. 그러니 불행 때문에 악과 증오로 내 마음이 뒤틀릴 때면,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그 변화가 가하는 폭력을 참아내야 했소. - P436

하지만 그게 사실이오. 타락한 천사는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오. 하지만 신과 인간의 적인 바로 그 악마조차 외로움 속에서도 친구와 동료 들이 있소. 그런데 나는 혼자요. - P439

나는 여전히 사랑과 우정을 갈구하고 여전히 버림받았소. 그건 정말 불공평하지 않소? 인간들은 모두 내게 죄를 저지르는데 왜 나만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거요?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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