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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숲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천선란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5월
평점 :
마음들을 읽었다. 보편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하는 마음들을. 마음
때문에 행복뿐만 아니라 슬픔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슬픔을 머금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인물들을 만났다.
『이끼숲』은
지구의 지상 생태계가 파괴되자 지하 도시를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 갇혀 버린 인류의 이야기다. ‘스스로’와 ‘갇히다’라는 두 표현은
문법적으로 호응하지 않지만 이 책을 설명할 때만큼은 그 어떤 표현보다도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 않을까 싶다. 다시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지하 도시에서는 불합리한 일들에 눈 감고, 노동에 도움
되지 않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답습하면서도, 지상의 실제 상황은 알지 못하니
말이다.
여섯
친구는 그런 지하 도시에서 마음을 나눈다. 첫 번째 작품 「바다눈」의 주인공 마르코는 열다섯
살이 되어 막 독립하고 취직한 뒤 낯선 감정들과 마주한다. 파업에 모든 걸 바치는 회사 선배 커커스를
보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가족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은희를 보면서 마르코는 두려움과 책임감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내 상실까지도. 알지 못했던
마음을 통해 마르코는 울음을 배웠다.
마르코의 친구 의주에게는 비밀이 있다. 자기에게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하 도시에서는 태어날 수 있는 아이의 수가 정해져 있는데, 아이를 한 명만 낳아 키울 수 있는 의주와 의조의 부모는 쌍둥이 자매를 낳고 만다. 「우주늪」은
지하 도시에 등록될 수 없었던 의조가 의주에게 쓴 편지다. 배관을 기어다니면서 의주를 지켜보고
느낀 것들을. 또 어딘가에 존재하는 비밀의 존재와 마음이 잇닿은 이야기를 담아.
누군가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애초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곳. 지하 도시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지만, 그 희생은
너무나 쉽게 감춰진다. 유오의 희생은 건설 사고 카운트 전광판의 1이라는
숫자로 가려진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 숫자에 “이름과 얼굴이
있고 웃음과 내일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숫자 밖으로 유오를 끄집어낸다.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 「이끼숲」은 희생을 충분히 애도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소마와 친구들이 허용되지 않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분출하는, 지하 세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헤치는 이야기다.
꿈과 감정이 소거된 곳, 거대한 시스템에서 언제든 바꿔 끼울 수
있는 나사 같은 존재로 인간을 격하한 사회에 대한 반발심이다. 슬픔이 허락되지 않은 사회에서 한껏 “유별”나게 슬퍼하고자 하는 연약한 마음들이 모여 단단한 마음을 이룬다. 지상에 나가고 싶다는 유오의 소원을 실현하고자 하는 어찌 보면 무모하면서도 단단한 그 마음을.
마음들을 읽었다. 마음들을 들었다. 마음들을 보았다. 세상이 파괴돼도 끝끝내 파괴되지 않을 마음들을. 그렇기에 서로를 끌어안고 실존하는 별과 식물과 흙을 찾아 떠나는, 실존하는
마음들을.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수레는 레일에서 이탈하거나 뒤집혀. 책임감 없는 행복은 위험하고, 행복 없는 책임감은 고통스러운 거야. - P38
살아가는 건 징검다리 건너듯이 원치 않아도 어느 순서에는 반드시 불행의 디딤돌을 밟아야만 하는 것 아닌가. - P69
증오에는 웃음이 필요해. 대상을 우습게 만드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 효과가 길지는 않아. 웃음 뒤에는 더 큰 증오가 오니까. - P105
내 생각이 글자로 옮겨지다니. 엄청난 일이야. 이건 어떤 세상을 옮기는 일이라고. 그래서 매번 문장을 쓸 때마다 건축하는 마음으로 해. 나는 건축도 뭔지 잘 모르지만, 이 지하 도시와 같은 거 아니겠어? 무너지지 않게, 헷갈리지 않게, 망가지지 않게. - P107
그날, 내게 글을 가르쳐주던 치유키가 말하더라. 글을 알면 뭐가 생기는지 알아? 내가 모른다고 했더니, 곧장 답을 알려줬어. 싸우는 힘. - P124
지상이 황무지라고 하더라도 어쩌다 남은 들꽃 한 송이에 그 애는 모든 걸 가진 듯 행복해했겠지. 세계를 지배한 절망보다 나약하게 핀 희망을 사랑했을 테니까.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면서. - P156
사랑하는 사람을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겠다는건 예측 불허의 위험이 가득한 어둠을 헤집는 일인 것이다. 하루에도 수차례 사고가 발생했다. 비록 사고는 숫자로 집계되지만, 그 숫자에도 이름과 얼굴이 있고 웃음과 내일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은 자주 잊지만 말이다. - P157
무모하고 위험한 건 싫다. 따분할 만큼 평온한 일상을 원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게 평화의 기본 조건이라는 걸 그 애를 좋아하고 나서야 알았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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