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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장례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5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2월
평점 :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스스로 말미암기. 즉, 스스로 자기 존재에 관한 원인과 이유가 되기.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를 조금 더 멋들어지게 풀어 썼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이다. 나와 같은 한국어 화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자유(自由)’라는 두 어절짜리 한자어로 너무나 쉽게 축약해 말한다. 그러고는 쉽게 입 밖으로 내뱉지만, 말소리라는 게 볼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못하듯이 ‘자유’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게 맞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라는 건 틀림 없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자유라는 단어가 흔히 들려오니
말이다. 『K의 장례』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도 자유를 갈망한다. 서로 다른 형태의 자유 세 가지가 뒤얽혀 충돌한다. 그 중심에는
K의 죽음이 자리한다.
K는
두 번이나 죽었다. 첫 번째 죽음은 사회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서 두 번째 죽음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비밀을 지켜준 사람은 그와 인생을 맞바꾼 유령 작가 희정이다. 단조로운 삶을 살던 희정은 극적인 사건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기로 한다. K는
자신을 없애고 희정의 뒤에 숨음으로써 자유를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자유는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었던 듯하다.
인물들은
자유를 여러 번 언급한다. 무엇과 맞바꾸고 무언가를 담보로 한 자유가 맨 먼저 등장한다. K가 자유를 찾은 대가로 희정과 승미는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희정은 자신의 선택으로 유령 작가가 되었지만 자유롭지 못하고, 승미는 부친인 K를 문학적 아버지로 여기지 않지만 희정의 소설과 같이 언급됨으로써 결국 K와
문학적으로 한데 얽히고 말았으니 말이다.
K는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자유를 얻은 듯 보인다. 하지만 K의
자유와 같은 게 정말 자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 K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은 각각 희정과 승미가 일인칭
주인공으로서 자기와 K의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 세 번째
장은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돼 있다. 즉, K는 타인이라는
한 겹의 막을 통과해 전해진다.
희정과
승미는 이야기한다. K의 꼭두각시가 되길 자처한 한 명과, K의
딸이라는 이름표를 떼기 위해 몸부림친 한 명이. 그들은 부자유 속에서 자유를 고찰했다.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K라는 사람은 그들의 존재 원인이
되었었다. 어찌 됐든 K는 죽었고, 그들은 남았다. 그들을 기묘하게 묶었던 끈은 사라졌다. 이제 그들만 남았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것은 산 자의, 절대적으로 산 자의 몫이고, 그리움과 슬픔의 자리에 세상에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놓는 것 역시 산 자의 마음이다. - P19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말해질 수 있다는 자유 속에 방목되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비밀의 함정에 연루시킨다. 나는 가망 없는 비밀의 본색을, 비밀의 유일한 공모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 P36
이상하다. 능동적인 삶을 살아갈 의지가 없었음에도 그가 준 선택의 권한이 내게 자유를 준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 P41
그런 순간에 나는 내게 현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를 떠올리고는 했다. 동시에 나의 고장나버린 어떤 부위가 내게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뇌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속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속지 않는다면 영원히 설득할 수 없는 미로였다. - P72
죽음은, 이별은, 소멸은 간단히 추억으로 교환된다. 갈등과 분노는 안타까움과 위무의 기도에 침윤된다. 소멸한 자의 슬픔과 번뇌에 목소리가 주어진다. 죽은 자가 죽기 전에 쌓은 악덕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서사가 부여되고, 그의 죄는 그와 함께 소멸한다. 남은 자들의 고통은 재갈을 물고 신음한다. 책임을 묻거나 싸울 수 없고, 소멸을 되돌릴 수도 없어서,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통증 같은 것을 귀중한 보물처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산 자들의 세계는, 그렇게 산 자들의 평화를 지속한다. - P73
무엇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떤 사건을 자연스레 잊는다면, 사건이 나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라 해도 때때로 그것을 기억하는 지신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기억과 내 인생 안에서 동거하는 중이다. 내가 끊임없이 생각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나를 포획하고 있는 법이다. K, 그는 나의 아버지이며, 나를 지배하고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이름이다. - P109
아무리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려보아도 문장이 완성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걸, 그게 자신이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을 승미는 다시 한 번 경험했다. 어떤 혼란은 문장이라는 새로운 주거지 안에서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을.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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