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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 - 강인욱의 처음 만나는 고고학이라는 세계
강인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6월
평점 :
나는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아끼는 건 수백 권의 책,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앨범, 인형들. 내가 재밌게 읽은 책이 계속 읽혔으면 좋겠고, 위로받았던 음악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가닿았으면 좋겠고, 내 애착 인형은 오래오래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나는 물질들에 둘러싸인 채 물질들에 집착한다. 결국 사라지고 말 것들을 사라질 시간 틈에 조용히 새긴다.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려 왔다. 그 틈 사이사이에서 거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운이 좋게도 사라지지 않고 우연히 먼 미래에 발견되는 건 유물 혹은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유물과 유적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고 벌어진 시간의 틈을 메워 과거의 삶들을 잇는 일이 바로 고고학이다.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은 고고학이라는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에 독자가 발을 잘 내디딜 수 있게 이끈다. 먼저 고고학이란 무엇인지 설명한 뒤,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방법과 유물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고고학을 둘러싼 음모와 오해를 터놓으며 고고학의 의의를 되새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과 AI로 인하여 변화할 고고학의 미래를 논하며 책을 끝맺는다.
나는 고고학을 잘 몰랐다. 뭔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 것만 같고, 나와는 크게 연관이 없는 분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고고학은 보통 사람의 이야기다. 토기나 화장실과 같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 우리처럼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낸 과거 사람들의 흔적을 그러모으고 맞추는 일이다.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 하나쯤 없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멈출 일은 없지만, 그런 보통 사람 한 명 한 명이 모여야 세상을 굴릴 수 있다. 사회 구성원이 사회를 지속시키고 역사를 만든다. 역사는 전부 그렇게 만들어졌다.
고고학은 평범함에서 역사를 찾아낸다. 유물과 유적에는 평범함과 역사가 묻어 있고, 그 생김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 왔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물질적 삶을 비물질적인 디지털 형식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이 글 또한 엄밀히 따지면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책 말미에 디지털과 고고학의 상관관계를 언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고학의 연구 대상은 물질에서 비물질로까지 확대되었지만, 디지털이라는 비물질적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다시 물질적인 수단을 활용해야 함을 역설한다. 우리는 비물질의 틈에서 물질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경제적 가치를 잃고 오래전 폐쇄되었던 웹사이트의 일부가 단계적으로 개방되었다. 잃어버린 인류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이들은 그곳에서 다시 힘을 모을 수 있었다. 각국의 탐사대는 지난 일 년간 총 130페타바이트의 데이터를 발굴하였고, (중략) 각종 매체는 이 탐사가 유기체로서의 인류를 연구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서이제, 「자유낙하」, 『낮은 해상도로부터』, 2023, p.272.)
몇 달 전 이런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작품은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지구에서의 사료가 전부 소실되는 상황을 그린다. 화성의 인류는 고대 지구인의 역사를 연구하고 기념관에 자료를 전시한다.
그러니까 물질이 비물질이 되고 다시 비물질이 물질이 되더라도, 인류가 지속되는 한 고고학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우리로 있게 한 흔적들을 찾기 위해. 사라져 버린 방대한 시간의 틈에서 그들을, 우리를 발견하기 위해.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과거가 지금보다 찬란했는지 또는 미개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끊임없이 해석한다. 따라서 과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석에 해석을 더하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이런 점에서 고고학은 현대라는 렌즈로 과거를 바라보는 카메라와 같다. - P37
내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이 어딘가에 묻혀 있고, 그것이 수천 년 뒤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발견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 고고학적 유물은 이러한 0에 가까운 가능성을 뚫고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기적 같은 인연은 사실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유물 모두에 숨어 있는 것이다. - P78
사소해 보이는 유물을 형식으로 모아서 그 시간과 공간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그 집단, 나아가 민족, 때로는 국가별로 고유한 문화를 볼 수 있다. 이는 수학의 프랙탈fractal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하나의 현상은 융합돼서 전체를 반영하고, 전체의 모습은 하나의 현상으로 표출된다는 뜻이다. 고고학자가 바라보는 사소한 토기의 차이가 사실은 각 국가나 집단 간의 큰 문화 차이를 반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고고학자는 하나의 유물에 숨어 있는 과거의 모습을 보고자 하고, 또 과거의 모습은 사소한 유물에 남아 있다. - P107
한국은 예전부터 차돌이 풍부한데, 차돌은 잘 깨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어도 석기를 제대로 가공할 수 없으니, 그냥 거칠게 만든 찍개를 더 선호했다. 도구의 역사는 단순한 기술의 발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술은 각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도구의 유무만으로 사람 간의 우열을 판단하는 것은 지난 시절의 인종주의적 시각의 연장일 뿐이다. - P126
인간의 죽음을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이고 살아 있는 자들에게 체화시키는 과정이 무덤이다. 우리가 때만 되면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고 또 파묘를 해서 이장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믿음이다. 고고학자가 죽은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을 통해서 과거 사람의 삶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무덤이야말로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담긴 과거 사람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 P192
신라 대릉원의 경우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조사했고, 그곳에서 나온 유물은 지금도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가 되었다. 그 옆에는 더 많은 고분이 있고, 그 고분을 발굴한다면 그에 못지않은 엄청난 보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는 그곳을 발굴할 계획이 전혀 없다. 발굴은 곧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장 파괴될 위험이 없다면 굳이 발굴을 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고고학자의 첫 번째 미덕이다. - P219
유형화된 책이나 신문이 사라지고 디지털사회가 된 지금, 만약 인터넷이 사라지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아마 이 시대를 기록하는 자료는 대부분 소실되는 셈이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디지털 자료는 책과 같은 유형의 출력물로 백업해서 보존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디지털을 가장 확실히 보존하는 것은 아날로그라는 구시대의 유산인 셈이다. - P325
고고학의 매력은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것에 대한 배려에 있다. 유물 속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고고학자의 노력처럼 우리 사회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역사에 기록된 왕이나 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 하나하나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유물 하나하나를 모아서 역사를 만든다. 바로 고고학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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