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평점 :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학교 부근 상가 옆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늘 있다. 흡연자들끼리
정한 동네의 비공식적인 흡연 구역인 셈이다. 구청에서 흡연으로 인해 민원이 많이 발생하니 흡연을 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 스티커도 붙였지만 소용없었다. 다들 무시하고 담배를 피운다.
벌금과 같은 강제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같은 곳에서 계속 담배를 피울 것이며, 민원도 계속 발생하고, 담당 공무원은 반복되는 일에 시달릴 것이다. 만약 조례를 제정해서 꽤 큰 액수의 벌금을 매긴다면 어떨까. 그건
너무 가혹하고 정 없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도시 전략이 흔히
사용된다. 일찌감치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대중을 이루어서 대중이 양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이 아닌 한국에서는 도시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아직 인간(대중)을 믿고,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도 집단과 소속감을 강조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우리 학교’, ‘우리 가족’의
‘우리’가 ‘we’가
아니라 ‘울타리’의 의미를 지닌다는 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 나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라는
단어가 우연한 동음이의어가 아니라, 1인칭 복수 대명사로 시작해 울타리라는 의미까지 갖게 된 것은 아닐까. ‘나’라는 1인칭 단수
대명사의 주체가 ‘우리’라고 인식하는 대상들을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올 수 있는 범위로 정한 데서 ‘우리(fence)’라는
단어가 유래했다고 하면 말이 꽤 되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이건 일개 학부생의 근거 없는 발언이다.)
어쨌든, ‘우리(we)’를
‘우리(fence)’ 안에 넣는 행위가 현대 도시에서는 ‘방’으로 연결되었다. 집단과
소속감이라는 한국인의 심리에서 노래방, 찜질방, PC방과
같은 방이 기인했으며, 이러한 프라이빗한 공간에 나와 같은 공동체의 사람만 들인다는 것이다. 일반론적인 내용이지만, 나라는 개인에 적용했을 때는 맞는 부분도
있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집단도 소속감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일반적인 한국인들처럼 남들의 시선을 좋아하지 않고 프라이빗한 공간을 선호한다. 단, 나는 그 프라이빗한 공간에 혼자 있어야 한다. 한국의 별종인 셈이다.
나는 인간도 잘 안 믿는 진짜 별종이다. 그럼에도 도시 시스템이
문제라는 생각은 못 했었다. 공동체를 그토록 싫어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결국 한국의 도시에서 나고 자라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사는 건 꿈도 못 꾸는 거의 완전한
도시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도시가 왜 이런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활동한 건축가로서 한국 도시를 바라보았다. 내가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들에 관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신 질문해주고 생활 공간인 도시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라 불리는 한국의 도시인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도시 시스템에 의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서구의 도시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으며, 항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신호등 위치의 차이를 발견한 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양심이나 시민의식 같은 형이상학적 정신문화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어차피 대중이란 질서 따위 지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질서를 ‘지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기 위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도시 전략을 수립해 온 것이다. 그래서 캠페인이나 선도 같은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과정은 낭비로 여겨진다. - P26
건설 방식과 건축 재료가 변하면서 쐐기돌의 존재 이유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인식에 일단 각인된 무의식과 기억은 ‘취향’이란 이름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지속됐다. 지금도 고풍스럽게 보이고 싶은 건물의 창문에는 이런 ‘쐐기돌 장식’이 흔하게 쓰이지만, 그런 장식이 왜 남게 되었는지에 대한 속사연에 관심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83
사는 문제에서 개인의 버릇과 선호는 ‘옳다, 그르다’로 따져지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유아 시절 가족생활에서 체화한 감각적 경험에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자신과 맞지 않는 공간은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지만, 아무도 왜 그런지는 자문하지 않는다. 익숙함에 기인한 좋다, 싫다만 있을 뿐이다. - P108
도시는 아무도 ‘도대체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해’라는 자문을 하지 않는 전대미문의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 맹목적인 높이 경쟁에 몰두했고, 맨해튼은 서로 너무 밀집해 햇빛도 들지 않는 수천 개의 유리 상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층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시민은 자신의 집은 점점 어둡고 황량해진다는 사실은 잊은 채, 길 건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다른 건물의 꼭대기만 바라보게 되었다. - P171
소위 트렌드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 상징들은 도시 공동체의 시간과 기억을 ‘휘발성’으로 변질시켜, 세대가 달라도 서로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 같은 도시적 경험의 축적을 말살시킨다. 그 많은 서울의 식당 중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맛을 공유하는 곳이 도대체 몇 군데나 될까. 거리를 점령한 회려한 간판은 강렬한 자극을 주며 시민을 집단적 기억상실증으로 이끄는 머릿속 지우개다. - P184
남을 못 들어오게 자기 단지를 막으면, 자신도 남의 단지에 못 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그렇게 도시가 진화하면 결국 자신이 도시에서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잘 가꾸어진) 자기 단지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단지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런 도시의 암울한 미래 시나리오는 지금 당장 내가 얻게 될 분양 이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멀고 비현실적인 가치일 뿐이다. 공공의 이익은 멀고 모호하지만, 개인의 이득은 쉽고 직관적이다. - P227
자신의 집을 나서면 철저하게 수동적인 ‘객’의 입장으로 하루 종일 누구의 공간도 아닌 공공 공간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타인의 공간에서만 지내게 된다. 현대인은 갈 곳이 없다. 그나마 내가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스마트폰 화면 속뿐이다. 겨우 10여년 만에 대부분의 현대인이 스마트폰 화면 속에 매몰돼 버린 현상이 과연 그만큼 그곳의 세상이 가치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 도시 어디에도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어서 그곳으로 ‘떠밀려’ 간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 P2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