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부터 일만 광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옮김 / 엘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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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작 이십몇 년간 살면서 혼자 가장 멀리 가본 곳은 집에서 겨우 50km 떨어진 곳이다. 타인과 함께한 것까지 포함하더라도 그 거리가 50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광년이 약 9.46×10km라고 하니 내가 평생 움직일 거리를 다 합하더라도 1광년에 미치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SF 세계에서는 그 먼 거리를 몇 번이고 오갈 수 있다. 우주 진출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꿈을 유일하게 실현할 수 있는 상상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하지만 상상을 대변하는 건 오로지 남성들의 몫이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남성적인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SF가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의 지평을 넓힐 틈을 후배 작가들에게 제시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SF가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장르가 되는 길의 초석을 팁트리가 깔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테라여, 그대를 따르리라, 우리의 방식으로」는 디아스포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솔테라인들은 제 손으로 지구를 망가뜨린 지구인들의 후손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새로운 집인 레이스월드를 만들어냈다. 소설 속 지구인들은 후손에게 레이스월드라는 가느다란 희망 한 줄기를 물려줬다.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미래 세대가 우리를 어떤 조상으로 기억할지 예상해보며 지구라는 집을 가꿔 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레이스월드조차 없으니 말이다.

 

SF라기보다는 판타지적인 소설 「문이 인사하는 남자」에는 제목 그대로 문의 인사를 받는 남자가 등장한다. 심지어 그의 옷 안에는 키가 1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여자들이 산다. (그밖에도 남들에게는 비현실적이지만 그에게는 일상인 일들이 몇 가지 더 있다.) 그는 아주 작은 여자들에게 자신의 옷을 집으로 내어주는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당대 사회 여성들의 취약성을 고발하고자 한 듯하다. 하지만 1973년에 출간된 책이라 그런지 여성들을 보호하는 주체가 남성이 아닌 사회적 안전망이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쉬웠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제목 그대로집으로부터 일만 광년떨어진 곳으로 향해 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그칠 수도 있지만, 어떤 작품에서는 인간이 원래 살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사고하는 생명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또는 인간의 욕망을 비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은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망이 투영된 공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동안 SF는 비교적 말랑말랑한 작품들 위주로 읽었어서 그런지 작가가 만든 세계에 깊이 빠져드는 게 다른 책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직접적 의미이든 비유적 의미이든간에 집으로부터 일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된 소설 속 인물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지 못했을지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귀가 유무를 떠나 우리가 돌아갈 집이 모두가 안온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랄 뿐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우리 개념이 약간 바뀌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각자의 삶에서 벌어지는 진짜 드라마에서는 배경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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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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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가 부족해서 고백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안고 산다.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잊을 수 없고, 문득문득 떠올라 피식거리게 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웃을 수는 없어서 종내 쓰고 있던 안경을 벗게 하기도 하는, 결코 타인이 대신 견뎌내 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묘지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들려줄 수 없는, 어쩌면 일부러 들려주지 않은 망자들의 이야기는 그들과 함께 묘지에 묻혀 있다. 비올레트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떠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품은 채 망자들의 이야기가 모여 있는 묘지를 가꾸는 묘지지기다. 다양한 상처가 공존하는 그곳을 비올레트는 꽃들로 아름답게 꾸몄다. 묘지라는 공간의 의의를 상실과 추모의 공간에서 정원이라는 편안한 쉼터로 확장시켰다.

 

비올레트가 가꾼 묘지 정원은 그녀의 삶과도 닮았다. 이 소설은 비올레트라는 한 인간이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잃는 비극을 겪고 회복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상실과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을 밟은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은 그녀가 가꾼 묘지에서 진행되는 장례 절차와도 비슷한 듯하다.

 

묘지에는 망자뿐만 아니라 망자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들이 모인다. 장례는 상실로 인한 상처에서 벗어나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장례라는 형식적인 문화는 어쩌면 망자를 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리 예우를 다한들 망자는 그것을 직접 누릴 수 없으니 말이다. 결국 장례는 아직 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슬픔에 계속 잠겨 있지 않고 삶을 계속해나가기 위해,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행해지는 게 아닐까.

 

비올레트의 묘지 정원은 그런 의미에서 그 어떤 묘지보다도 더 아직 살아 있는,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비올레트는 자신이 상실한 존재가 묻혀 있는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을 들임으로써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 필리프가 묘지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과 대비된다.

 

내 마음에도 내가 가꾸어야 하는 묘지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묻혀 있다. 이미 잃어버려 볼 수 없는 것과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함께 품고 살아간다. 앞으로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는지는 마음속 묘지를 어떻게 가꾸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지금 좋아하는 존재들을 곁에 두는 일,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묘지에 수많은 묘비명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흐르는 세월의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추억을 꼭 붙들기 위해. - P21

사실 우리 장의사들이 상대하는 건 삶이라고. 어쩌면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더. 왜냐하면 우리를 찾는 건 남은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이거든. 신부님이 우리한테 늘 온화하게 하시는 말씀 있잖아. ‘형제님들, 우린 죽음의 산파들입니다. 우린 죽음을 출산하니까요. 그러니 생을 누리세요, 꼭 쟁취하십시오.’ - P155

"삶은 절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종이 한 장을 들고 찢어보세요. 찢긴 조각들을 아무리 이어 붙인들, 찢기고 구겨진 자국이며 테이프의 흔적은 영원히 남잖아요." - P246

"비올레트, 담쟁이는 나무들을 숨 못 쉬게 해. 잊지 말고 잘라줘야 해. 절대 잊어선 안 돼. 너도, 생각들이 너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그 즉시 전지가위를 들고 괴로움을 잘라버려." - 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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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카미유 클로델 - 생의 고독을 새긴 조각가
이운진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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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카메라는 무덤덤하게 그녀를 무채색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 뒤섞여 있는 듯한 슬픔과 절망과 욕망은 카메라 렌즈의 무정함을 뚫고 나와 사진을 보는 나에게 전달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 자리한 초상의 주인공, 카미유 클로델이다. 카미유는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단지 그의 뮤즈만으로 남지는 않으려 했었다. 저자는 온전히 자신으로 남고자 했던 여성 조각가의 들리지 않는 마음에 귀 기울여 그녀의 삶을 포착해냈다. 나는 시인인 저자의 아름답고 함축적인 문장들의 안내를 받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찬찬히 아리게 읽어나갔다.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홀로 있었기에 너무나 어려운 일을 감당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카미유의 천재성은 벼랑 끝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기는커녕 그녀를 벼랑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게. 그녀는 내쳐졌다.


카미유는 그 속에서 인정받고자 했다. 한 명의 떳떳한 예술가로 살아내기 위해 애쓰다가 상처받았고, 그 상처를 다시 예술로 승화해냈다. 하지만 그런다고 깊이 팬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피해망상은 점점 더 심해졌고,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예술가로서 카미유 클로델의 삶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막이 내려졌다.


카메라 렌즈까지 꿰뚫어버린 카미유의 슬픔과 절망과 욕망의 삶. 어쩌면 절망이라는 건 욕망이 충족되지 못해서 발현하는 감정이 아닐까, 욕망할 대상조차 없다면 절망할 일도 없지 않을까, 조각을 향한 욕망이 너무나 커서 카미유는 극도의 절망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정신병원 간호사의 권유도에도 조각을 하지 않았던 건 다시는 파멸에 이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마음대로 그녀의 마음을 추측해본다.


알지 못했었던 카미유의 삶을 끝까지 읽고 다시 표지의 카미유와 마주했을 때 그 눈동자에서 그리움과 외로움까지도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고 내친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고이 간직했다. 그녀는 욕망 때문에 절망했고, 욕망 때문에 외로워하고 그리워해야 했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최초의 숨결과 최후의 한숨 사이에 있는 삶의 모습은 모두 다르고 결국 같다. - P13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자신의 욕망을 정확하게 깨닫는 일은 어쩌면 불운이며 어쩌면 행운이고 혹은 둘 다인지도 모른다. 빌뇌브에서 그녀는 미켈란젤로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파리에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저 훌륭한 조각가가 아니라 스스로가 인정하는 위대한 조각가로 남고 싶었다. - P22

어떤 것이든 진실하게 창조된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공통된 감정 상태를 만들어낸다. 마치 첫번째 슬픔 같은 것을 나눈 사이처럼. - P71

영혼이 자유롭게 숨 쉬어도 어떤 해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이미 알았는지 모른다. 자신을 다 소진해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진정한 예술을 하는 일과 진정한 인생을 사는 일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걸. 그녀의 작품이 그녀 삶의 이야기가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P93

자신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로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눈을 씻어주고 싶었다. 여자라는, 제자라는 부당한 차별 없이 당대 남성 예술가들과 동등하게 평가받기를 원했다. 이름난 남자 스승을 두었다는 게 남자 예술가보다는 여자 예술가에게 왜 더 큰 제한이 따르는지 억울할 뿐이었다. - P97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해주길 바라는 일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무심한 사람들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희망을 조금씩 뒤로 미루며 붙잡으려 할 때 얼마나 스산한 기분이 드는지. - P152

1943년10월19일, 카미유 클로델의 사망증명서가 작성되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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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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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학교 부근 상가 옆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늘 있다. 흡연자들끼리 정한 동네의 비공식적인 흡연 구역인 셈이다. 구청에서 흡연으로 인해 민원이 많이 발생하니 흡연을 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 스티커도 붙였지만 소용없었다. 다들 무시하고 담배를 피운다.


벌금과 같은 강제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같은 곳에서 계속 담배를 피울 것이며, 민원도 계속 발생하고, 담당 공무원은 반복되는 일에 시달릴 것이다. 만약 조례를 제정해서 꽤 큰 액수의 벌금을 매긴다면 어떨까. 그건 너무 가혹하고 정 없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도시 전략이 흔히 사용된다. 일찌감치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대중을 이루어서 대중이 양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이 아닌 한국에서는 도시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아직 인간(대중)을 믿고,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도 집단과 소속감을 강조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우리 학교’, ‘우리 가족우리‘we’가 아니라 울타리의 의미를 지닌다는 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 나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라는 단어가 우연한 동음이의어가 아니라, 1인칭 복수 대명사로 시작해 울타리라는 의미까지 갖게 된 것은 아닐까. ‘라는 1인칭 단수 대명사의 주체가 우리라고 인식하는 대상들을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올 수 있는 범위로 정한 데서 우리(fence)’라는 단어가 유래했다고 하면 말이 꽤 되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이건 일개 학부생의 근거 없는 발언이다.)


어쨌든, ‘우리(we)’우리(fence)’ 안에 넣는 행위가 현대 도시에서는 으로 연결되었다. 집단과 소속감이라는 한국인의 심리에서 노래방, 찜질방, PC방과 같은 방이 기인했으며, 이러한 프라이빗한 공간에 나와 같은 공동체의 사람만 들인다는 것이다. 일반론적인 내용이지만, 나라는 개인에 적용했을 때는 맞는 부분도 있고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집단도 소속감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일반적인 한국인들처럼 남들의 시선을 좋아하지 않고 프라이빗한 공간을 선호한다. , 나는 그 프라이빗한 공간에 혼자 있어야 한다. 한국의 별종인 셈이다.


나는 인간도 잘 안 믿는 진짜 별종이다. 그럼에도 도시 시스템이 문제라는 생각은 못 했었다. 공동체를 그토록 싫어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결국 한국의 도시에서 나고 자라 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사는 건 꿈도 못 꾸는 거의 완전한 도시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도시가 왜 이런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활동한 건축가로서 한국 도시를 바라보았다. 내가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들에 관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신 질문해주고 생활 공간인 도시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라 불리는 한국의 도시인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도시 시스템에 의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서구의 도시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으며, 항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신호등 위치의 차이를 발견한 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양심이나 시민의식 같은 형이상학적 정신문화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어차피 대중이란 질서 따위 지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질서를 ‘지킬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기 위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도시 전략을 수립해 온 것이다. 그래서 캠페인이나 선도 같은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과정은 낭비로 여겨진다. - P26

건설 방식과 건축 재료가 변하면서 쐐기돌의 존재 이유는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인식에 일단 각인된 무의식과 기억은 ‘취향’이란 이름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지속됐다. 지금도 고풍스럽게 보이고 싶은 건물의 창문에는 이런 ‘쐐기돌 장식’이 흔하게 쓰이지만, 그런 장식이 왜 남게 되었는지에 대한 속사연에 관심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83

사는 문제에서 개인의 버릇과 선호는 ‘옳다, 그르다’로 따져지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유아 시절 가족생활에서 체화한 감각적 경험에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자신과 맞지 않는 공간은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지만, 아무도 왜 그런지는 자문하지 않는다. 익숙함에 기인한 좋다, 싫다만 있을 뿐이다. - P108

도시는 아무도 ‘도대체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해’라는 자문을 하지 않는 전대미문의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 맹목적인 높이 경쟁에 몰두했고, 맨해튼은 서로 너무 밀집해 햇빛도 들지 않는 수천 개의 유리 상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층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시민은 자신의 집은 점점 어둡고 황량해진다는 사실은 잊은 채, 길 건너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다른 건물의 꼭대기만 바라보게 되었다. - P171

소위 트렌드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 상징들은 도시 공동체의 시간과 기억을 ‘휘발성’으로 변질시켜, 세대가 달라도 서로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 같은 도시적 경험의 축적을 말살시킨다. 그 많은 서울의 식당 중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맛을 공유하는 곳이 도대체 몇 군데나 될까. 거리를 점령한 회려한 간판은 강렬한 자극을 주며 시민을 집단적 기억상실증으로 이끄는 머릿속 지우개다. - P184

남을 못 들어오게 자기 단지를 막으면, 자신도 남의 단지에 못 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그렇게 도시가 진화하면 결국 자신이 도시에서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잘 가꾸어진) 자기 단지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단지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런 도시의 암울한 미래 시나리오는 지금 당장 내가 얻게 될 분양 이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멀고 비현실적인 가치일 뿐이다. 공공의 이익은 멀고 모호하지만, 개인의 이득은 쉽고 직관적이다. - P227

자신의 집을 나서면 철저하게 수동적인 ‘객’의 입장으로 하루 종일 누구의 공간도 아닌 공공 공간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타인의 공간에서만 지내게 된다. 현대인은 갈 곳이 없다. 그나마 내가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스마트폰 화면 속뿐이다. 겨우 10여년 만에 대부분의 현대인이 스마트폰 화면 속에 매몰돼 버린 현상이 과연 그만큼 그곳의 세상이 가치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 도시 어디에도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어서 그곳으로 ‘떠밀려’ 간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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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 키우는 법 - 우세한 눈이 알려주는 지각, 창조, 학습의 비밀
베티 에드워즈 지음, 안진이 옮김 / 아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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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 엄지와 검지로 약 2cm 정도 되는 삼각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방문에 걸려 있는 펭귄 그림을 봤다. 왼쪽 눈을 감았을 때는 펭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오른쪽 눈을 감았을 때는 펭귄이 삼각형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우세한 눈 테스트 방식을 따라 해본 것이다. 테스트 결과 나는 오른눈이 우세했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처럼 눈 또한 왼눈잡이와 오른눈잡이도 있다는 우세한 눈은 낯선 개념이었다.


신체의 오른쪽은 좌뇌, 왼쪽은 우뇌와 연결된다는 과학 지식은 그래도 꽤 알려진 편이다. 어느 쪽 깍지나 팔짱을 껴서 우세한 뇌를 찾는 법 역시 들어본 적 있다. 눈 역시 마찬가지다. 오른눈이 우세하면 좌뇌가, 왼눈이 우세하면 우뇌가 우세하다. 그런데 나는 깍지를 꼈을 땐 우뇌 우세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팔짱을 끼면 좌뇌 우세라는 결과가 나온다. 눈도 오른눈이 우세하니 깍지만 예외적인 것이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나는 좌뇌가 조금 더 우세한 듯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눈 중 우세한 눈이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화가들은 오래전부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눈의 차이를 포착하여 초상화를 그렸다. 그뿐만 아니라 눈은 고대부터 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양한 의미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인간은 눈의 중요성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그것을 표현해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눈을 중요시하지만, 우세한 눈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우세한 눈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양쪽 뇌는 각각 언어적 신호와 비언어적 신호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세한 눈은 그와 연결된 뇌를 발달시킨다. , 한쪽 뇌만 발달하는 것이다. 특히 언어적 역할을 하는 좌뇌가 우뇌보다 더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리기가 배제된 교육과도 관련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릴 적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림을 그린다. 어른들이 말리고 혼내도 그린다. 하지만 대부분 성장 과정에서 그리는 방법을 잃고 만다. 우리네 교육이 그리기와 같이 비언어적인 것보다는 언어 능력을 향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잘 그리고 싶은 욕구를 품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저자는 눈과 뇌와 그리기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리는 방법 또한 설명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을 따라 하면서 읽고 싶었지만, 일단 조금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종강하고 반드시 해봐야겠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미술사 속의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남성 화가들은 인물을 4분의 3 각도로 놓고, 젊은 여성 모델의 덜 우세한 왼쪽 눈(부드럽고, 꿈꾸는 듯하고, 비언어적이고, 도전적이지 않은 눈)이 앞쪽에 위치하도록 하고, 초롱초롱하고 약간 도전적이며 언어와 연관되는 ‘우세한 눈’은 뒤쪽의 4분의 1 영역에 놓아 일부만 보이도록 했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화가의 바람이 개입된 결과일까? - P62

우리는 보고 이름을 말할 수 있고, 보고 사용할 수 있고, 보고 분류할 수 있고, 보고 탐색할 수 있고, 보고 읽고 쓰고 기록하는 등 현대생활에 요구되는 모든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는 방법들은 주로 언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보고 그릴 줄은 모른다. 보고 그리는 것은 다른 종류의 보기이기 때문이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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