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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ㅣ 세계문학의 숲 6
헨리 제임스 지음, 정상준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안경을 자주 썼다 벗었다 하는 편이라 그런지 안경테 다리 부분 나사가 금세 헐거워지곤 한다. 가끔 신경을 써서 조이지 않으면 다리가 달아날 수도 있다. 안경을 쓰고 벗는 행위는 종종 사물을 인식하는 차이를 감지하는 훈련이 된다. 안경을 벗었을 때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확인 불가능한 뿌연 시력은 내 존재를 확인하고 손을 들거나 다가오는 누군가를 전혀 낯선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상대방도 자신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는 나를 점차 이상하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인가? 꿈틀되는 인간형의 무언가는 유령이나 다를 바 없다. (좀비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면 굳이 안경을 끼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다.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수단은 무표정한 좀비들을 차곡차곡 세워놓은 듯하다.)
불분명한 근거만 두고 생각이 치달리면 점차 속도를 더해 하나의 얇고 긴 선을 이루면 집착에 다다르고, 자칫 씻을 수 없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비유하자면 나사를 끝까지 조이다가 인식 가능한 도구이자 통로인 안경을 아예 망가트리고 마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고착화된 확정-잘못되거나 성급한 판단이기 쉬운-은 곧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돌아온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나사의 회전>은 내면을 옥죄는 집착이 마침내 살인에 이르고 마는 과정을 다룬다.
나는 아이를 붙잡았다. 그래, 나는 그 아이를 꼭 잡았다.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아이를 안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1분이 지나자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고요한 저녁 시간에 남아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고, 그의 작은 심장은 유령에게서 버림받아 이미 멈춘 다음이었다. 233쪽
살인이라고 말했으나 1인칭 진술만으로는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 외에 어떤 정황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유령의 개입 여부는 물론이고, ‘나’가 아이를 안았던 시간이 정말 1분인지 혹은 그만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의미인지, ‘잡았다’는 표현은 안았다는 의미인지 혹은 목을 졸랐다는 의미인지도 불분명하다. 방 안에 아이와 둘밖에 없었다는 정황은 하인들의 진술에서 밝혀질 테니, 사실은 방문을 닫자마자 아이를 죽인 뒤에 인용한 단락에 앞선 구구절절한 얘기를 지어냈을 수도 있다. 산 자와 죽은 자만 남은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유령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려는 가정교사의 행동이 빚은 비극은 그녀가 죽은 지 20년 뒤 “오래되고 빛바랜 잉크로, 그리고 더할 나위없는 아름다운 필체로” 쓰인 기록에만 의존한다는 한계를 소설 첫 서문에서 밝히면서 전체적으로 명료한 해석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전날 가정교사로부터 받은 오래 묵은 기록을 손님들에게 읽는다는 설정은 이 가정교사가 실제로 유령을 봤는지, 아니면 강박이 빚은 허상인지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이 이야기 전체가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가정교사가 쓴 허구인지마저도 모호하다.
이른바 이와 같은 ‘열린 해석’은 독자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하면서 이 소설이 후대에 이르러 세계문학으로 불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소설 대부분 20대 처음 가정교사를 맡은 처녀와 정직하지만 다소 아둔한 하녀, 그리고 어린 남매까지 단 4명이 시골 저택을 배경을 둔 단순하고 지루한 이야기는 유령이 등장하면서 꽤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로 바뀐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 이야기 전부가 당시 유행하는 유령 소재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화자인 더글라스가 내세운 허구일 수도 있고, 더글라스조차도 기술하는 ‘나’의 창조물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헨리 제임스가 구성한 인물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제목이 상징하듯 나사를 돌려 깊게 파고들어야 할 만큼 몇 겹의 장치를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세계문학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구성을 뒷받침하는 가정교사의 다층적 심리 묘사에 있다. 서두를 제외하면 중편소설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정교사의 진술은 겉으로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을 어떻게든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아이들을 지킬 것인가 하는 강한 의지와 열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엄격한 목사 집안 출신으로 억압이 일상화된 환경과 스무 살 한창 지적, 성적 호기심이 차오르는 내면 사이 부조화가 빚은 노이로제가 뚜렷하게 엿보인다.
안경을 벗고 본 시선으로 보이는 흐물흐물하고 두세 겹 겹친 세상은 환상이고 착각인가. 적어도 내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소설의 난해한 구조는 몇 겹의 구조 아에서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가에 따라 다른 층위로 읽힌다. 더글라스는 가정교사를 밝고 아름다운 여인이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한때 사랑했다는 진술을 한다. 이 진술에 따르면 마일스를 죽였다는 전제에서 그녀가 어떻게 다른 집안 가정교사로 들어갈 수 있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거꾸로 올라가 체험담 밖으로 나와 ‘나’의 입자에서 화자인 더글라스를 보면 가정교사의 이야기에서 죽었다는 마일스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마일스가 죽었다는 의미는 마일스 안에 유령 퀸트가 사라졌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만약 가정교사가 끔찍한 사건을 속이고 다른 집 가정교사로 들어가서 더글라스를 만났다는 진술이 사실이라면 유령 퀸트와 비슷한 더글라스의 무뚝뚝한 태도가 이해가 간다. 마일스라는 숙주를 잃어버린 퀸트와 그 일로 혼이 나간 제슬이 가정교사 안으로 들어가 다른 집안으로 옮겼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열린 구조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미스터리물, 시골이라는 한정된 배경, 적은 수의 등장인물 등 <나사의 회전>은 연극으로 올리기에 최적화된 구조를 갖췄다. 이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라는 설정도 크리스마스에 무대에 올릴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둔 작품이라는 혐의가 있다. 무대야말로 허구의 인물들이 육신을 입고 상상력이 아닌 우리 눈에 직접 '유령처럼' 등장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의도대로 이후에 오페라, 발레, 영화 등 소설보다 무대 위에서 한층 빛을 발했다. 기회가 된다면 연극으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