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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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는 때때로 거리 양옆을 바라보다가, 카바이드 등불이 찬바람에 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밤은 매우 추웠다. 그녀는 온기가 필요했다. (317쪽)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가늘게 반짝였다. 마치 친숙한 친구의 눈빛 같아서 그는 갑자기 온기를 느꼈다. 그러나 빛은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그의 주위는 여전히 그리 진하지 않은 어둠뿐이었다. 한기가 그의 등을 계속 찔러서 몸이 떨려왔다. (8쪽) 

일본이 전쟁에서 진 그해 10월 즈음, 바진의 소설 <차가운 밤>의 부인 청수성의 시점으로 바라본 중국 충칭 거리의 스산한 밤풍경,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더 이상 공습을 알리는 긴급 경계경보가 울리지 않으나 소설 도입부 남편 왕원쉬안의 시점으로 본 충칭 밤거리 풍경과 같은 시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슷하다.

 “굶어죽겠군. 물건을 팔아보았자 다 먹어치우니……. 전쟁에서 이기면 바로 집에 돌아갈 줄 알았는데.” “승리는 그들의 승리지, 우리의 승린가.” (316쪽) 1년 사이, 일본이 망하고 세상은 달라졌으나 대부분 인민들에게 가난한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밤이다. 승전경축일에 왕원쉬안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일본이 충칭까지 밀고 온다는 소식에도 떠나지 않았던 시어머니와 아들 샤오쉬안은 충칭을 떠났다. 더욱 추운 밤이다.

그나마 가진 모든 걸 시선을 수습하는 데에 써버렸을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아들에게 세상은 혹독할 것이다. 자신을 미워했던 시어머니 그리고 사이가 어색했던 아들, 자신을 사랑하는 천주임이 있는 란저우로 돌아가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어쩌면 이제 남은 인생을 지독스레 지루하고 불행했던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생긴 셈이다. 하지만 청수성도 읽은 독자도 가슴이 묵지근하다.

가정 내 구도만 놓고 보면 이는 지독스레 일주일 내내 반복하는 막장 드라마와 똑같다.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이 지식인인 왕원쉬안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이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충칭의 자욱한 포연 같은 안개처럼 작품을 내리 누르는 사회 불안이 읽힌다.

<차가운 밤>에서는 전쟁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늘 긴장감이 돌지만 뜬소문으로만 끝났을 뿐, 일본군이 오지 않은 충칭은 5주 반 동안 계속된 대학살로 26만 명 민간인이 학살을 당한 난징과 다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 닥친 불안이 지식인의 눈을 통해 뛰어난 심리 묘사로 드러난다.

전쟁을 직접 다루지 않으나 구습, 불평등, 착취, 차별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가 구를 장롱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밤새 가죽을 파먹는 쥐처럼 전쟁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쟁의 파문은 가장자리에서도 떨림과 긴장은 멈추지 않고 왕원쉬안이 교정을 보는 싸구려 종이처럼 한 가정을 가볍게 찢어버리고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교육자로 세상을 깨우려는 그의 이상은, 자유를 누리고 싶은 아내의 꿈은, 참한 며느리를 원하는 시어머니의 바람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바진이 일본이 패망한 직후인 1946년에 쓴 소설이 고발극이나 찬양극으로 치닫지 않고 중국 인민들의 삶을 깊숙이 관통하는 작품이라는 점은 바진이 중국의 대문호로 불리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예감이라도 하듯이 이후 반세기를 더 사는 동안 중국의 굴곡진 이데올로기의 격류에서 “개인주의, 무정부주의, 애정지상주의에 빠진 극단적 개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번역을 맡은 김하림 교수는 바진 생전, 그와의 만남을 감격스레 회고한다. 바진이 유창하지는 않으나 항일운동을 하면서 만난 조선인들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뛰어난 활동에 감복’해 간단하게나마 한국어를 익혔다는 대목이 나온다. 바진이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이후 해방 전까지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오른쪽 구석에서 고개를 처박고 쓸쓸하게 술을 마시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일어나 술값을 치르고 나갔다. 그 사내가 나가자 주인이 새하얀 얼굴의 손님을 향해, 방금 나간 손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오는 단골로, 말하기도 싫어하고 과음도 하지 않으며 안주는 언제나 두부 두 모로, 매일 제시간에 왔다가 제시간에 가는데,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55~56쪽

왕원쉬안이 거닐던 충칭의 밤거리, 청수성이 천주임과 점심을 먹고 들리던 세련된 국제커피숍, 길모퉁이 선술집을 서술하는 행간에서 조심스럽게 수심에 잠긴 임시정부 요인들 얼굴을 본다. <차가운 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나, 한편으로 소설의 무거운 분위기가 암시하듯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의 아픔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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