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세계문학의 숲 1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안인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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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 

찬바람이 쌩쌩 부는 베란다 책장에는 오래된 가계부와 성경과 낡은 수첩 모음 사이 1983년 발행판 중앙일보사 오늘의세계문학전집이 두서없이 꽂혀 있다. 30권 중에 20권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보르헤스, 오에 겐자부로 등 그 당시만 해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된 선집이다. 작가지망생이었던 먼 친척 누군가가 이민을 가면서 두고 간 책이 돌고 돌아 우리 집까지 온 것이다. 난 이 중에서 알프레드 되블린의 작품을 봤을까.

알프레드 안더쉬였다. 비슷한 이름의 독일 작가의 작품, 그러니까 착각이었다. 사실 서너 페이지 읽다 말기도 했다. 올해 출간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는 오래 묵은 책냄새가 났다고 할 밖에 없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신장판세계문학전집으로 1979년에 발간된 적이 있었다. 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난 이 소설을 80년쯤 지난 지금 처음 손에 잡아본 것이다.

그렇다면 읽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책의 흔적을 난 뒤졌을까. 익숙한 무언가, 내가 분명히 전에 알고 있는 뭔가와 혼동할 만한 익숙한 무엇이 있었을까. 그렇다고 두 권 분량 소설이 읽기 쉽다거나 흔한 소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흥미진진한 범죄이야기’라고 말하는 비평가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펭권문고 서스펜스 소설과는 아주 먼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든 독일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시점은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이른 봄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패전국으로 승전국에게 부담해야 했던 무거운 짐으로 사회 전체가  위축되었던 시절이다. 1929년 세계공황 이후 나치 정당이 발현하기 직전까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중심으로 음울한 독일 사회가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생동감이 있다는 표현이 맞나 싶기는 한데, 끓는점 직전의 독일사회의 불안을 법전, 신문기사, 광고, 백과사전, 연설문, 공고문, 편지, 일기, 유행가 가사를 그대로 따와서 삽입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베를린을 그대로 박제한 듯 옮겨온 방식은 독일인들에게 각별한 향수 혹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시대 정서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지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세심하게 일일이 각주를 달았다고 해도 소설 한권쯤으로 내가 이해했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날것 그대로의 차용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기보다는 전과자, 부랑자, 장애인의 낙인이 찍힌 임노동자 프란츠 비버코프의 부정확한 진술과 상상과 회상을 보충하기 위한 가공하지 않은 실마리로 왜 당시 베를린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과 반증으로 차용했다는 혐의가 더 짙은 편이다.

베를린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집착은, 이 작품 출간 이후 히틀러 광기를 피해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시민권을 얻고, 다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떠돌면서도 독일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유대계 독일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망명자로 떠돌던 그이의 인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람.

요사이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지만 10대 후반과 20대를 돌아보면 어느 시점에서 강하게 나를 뒤흔든 소설의 전조는 늘 세상과 갈들을 빚는 작가들 혹은 주인공들의 이야기였다.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들은 가볍고 또 거칠 것이 없었다. 예를 들면 이상의 <날개>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부터 이인성의 80년대 소설들과 여전히 읽을 때마다 짜릿한 95년 작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대학을 갈까말까 고민할 때 우연히 발견한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그렇다.

길거리를 헤매고 있든, 골방에 처박혀 있든 소설 주인공들은 항상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들인 동시에 휴화산이지만 구덩이 깊은 중심에 꺼지지 않은 용암의 흐름처럼 뜨겁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과 군사독재 시절과 세기말을 단순히 ‘불안’이라는 코드로 한 묶음으로 둘 수 있을까 싶지만, 작가들 역시 적어도 그 소설을 쓸 당시에는, 부침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한다.

대학을 가서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멀어지면 더 이상 뜨겁지도 않고 흐름이 멈춘듯 보이는 속살 같은 이야기들은 더 이상 내 차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찾은 작가들 역시 어느 순간 소설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거나 형편없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그렇게 내 지난 시절의 가난과 목마름을 헤집는다. 사춘기 시절이, 재수생 시절이, 대학을 휴학하고 떠돌던 시절이 행복하지는 않았으나 절절하게 고민하면서 굵고 넓은 나이테를 만든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이 작품의 동일하지 않은 화자와 철학적 진술들은 프란츠 비버코프의 것이 아니다. 알프레드 되블린의 것이 거름망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투사되고 있지만 ‘소리나 그림이나 문자 텍스트를 인용하는’ 영화 기법을 가지고 풀어쓴 방식은 번역자의 말처럼 ‘20년대 말의 베를린 자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진술과 맞닿아 있다. 동시에 그 광장을 중심에 둔 시대에 대한 정밀한 묘사와 진술은 나 역시 작가의 시선으로 프란츠의 행보를 따라 그대로 그 광장으로 데려가서 나의 고백으로 탈바꿈한다. 파스빈더 감독의 1980년작 영화로 이 소설 다시 읽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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