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송인혁.이유진 지음 / 아이앤유(inu)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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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연예인 소식은 시시콜콜 듣고 보지만, 정작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막막할 때가 있다. 요즘처럼 집이 주거 개념보다 투자 개념으로 이해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동네 재개발 소식이 아니라면 뭐, 상관없다는 투다. 주간지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지역구 단파 라디오와 마을 신문 등 ‘풀뿌리 언론’ 기사를 봤다.

작지만 알찬 성과를 거두고 있는 지역운동의 바람직한 소식이다. 하지만 어려움도 적지 않다. 대부분 상근자가 두셋에 회비, 배포, 취재 등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어렵게 꾸려나가는 형편이다. 후원이나 지원 손길을 전제하다보니 장기적인 전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데다,  공동체 라디오의 경우, 공적 방송 제작 지원 예산 중단에 따라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몇몇 채널이 폐지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을 넘어서 관심을 끌어낸 몇몇 사례가 있지만 지역 내에 한정한 기사의 한계도 명확한 편이다. 그렇다면 풀뿌리 언론을 비롯해 지역과 예산의 한계를 넘어서 소통망의 대안은 없는 걸까?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이, 개개인이나 작은 목소리가 주류 매체를 넘어서는 시대가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접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그들의 얘기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그 가능성 안에 살고 있다.

소통의 비용이 0에 도달하여 인류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그 누구와도 쉽게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사상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조직이나 그룹에 속한 형태가 아닌 전 인류가 나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제4의 스크린이다. 24P

있게 될 것이다, 아니라 있게 된 것이다, 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이야기를 이들은 누구인가.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의 저자들로 모두 186명이다. 연령, 직업, 가치관, 성별, 거주지역 등이 다른 이들은 이 책을 만드는 데에 공감해 자신의 힘을 조금씩 보탰을 뿐, 자신들이 그저 바다에 물 한 방울 정도라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지역과 비용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제란 ‘사람이 원할 때 디지털 세상에 접속하는 형태가 아니다. 이 세상 자체가 디지털과 완전히 융합되어 현실 세계에 디지털이 입혀진 형태를 띨 뿐만 아니라, 가상 세계의 모습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동기화’된 현실이다. 그리고 그 초창기 시작 모델이 '트위터(twitter)'이고, 이들은 트위터리안(트위터 사용자)들이다.

사전 풀이를 옮기자면 트위터는 블로그의 인터페이스와 미니홈페이지의 '친구맺기' 기능, 메신저 기능을 한데 모아놓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NS)이다. 그런데 뭐? 이게 뭐 그리 대단하다는 거야? 이거 오타쿠들 얘기인가?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자들에 의하면 난 ‘제3스크린’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휴대폰과 PMP를 가지고 있으며 나름 블러그를 운영하고 있지만 소통보다 나만의 놀이(?) 세계에 빠진 나는 말이다. 그렇다면 제3의 스크린과 제4의 스크린 사이 간격은 라디오에서 TV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제1과 제2의 스크린만큼이나 넓을까?  

‘이외수도 빠졌다는 트위터, 난 왜 재미가 없지?’가 작년 9월 9일 뉴스 머리기사인데, ‘김연아·김제동·오바마 공통점은? 트위터리안’(2009.11.16)로 이어지더니, ‘트위터 네트워크의 힘, 1살짜리 영아 살렸다’, ‘이석채 KT 회장 '트위터'에 꽂히다’(2010.02.02)까지 트워터는 엄청난 속도로 놀라운 전파력과 장악력을 보여준다. ‘트위터 인기 주춤?…사용자 석 달 새 26% 감소’까지 올라오는 판이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쉽고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무쟈게’ 재미있다는 게 책 저자들을 비롯해 주변 사용자들의 의견이다. (트위터에 관한 정보를 책으로 소화하는 게 편안한 나는 적어도 재미만큼은 ‘취향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다면 소통 비용 ‘0’에 쉽고 간편한 빠른 소셜 네트워크의 장점은 정치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오바마를 언급한 블러그의 포스팅 건수는 무려 5억 건이었다고 한다. 훨씬 더 강력한 자금력을 가진 매케인은 1억 5,000만 건이었다. (…) 오바마의 팔로워는 당시 무려 13만 명이었다. (…) 블러그는 네티즌이 찾아와야 읽을 수 있었지만, 트위터는 그를 팔로잉한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그룹 메시징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였다. (…) 매케인 진역이 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의 팔로워는 단지 5,000명 정도였고,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136~137P

우선 이 책이 정동영, 노회찬 등 인기 트워터리안 정치인 등 트워터 홍보물이 아닌 새로운 소통 방식 SNS에 대한 환호와 열광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읽으면 책의 마지막 7장 ‘소셜 미디어가 세상을 바꾸다’를 눈여겨 읽을 만하다. 

2009년 6월 이란의 부정 선거를 막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평화 시위를 하던 열일곱 살 소녀가 총격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란 정부가 신문, 방송을 통제하고, 인터넷 서비스망 접속을 차단했지만 휴대폰 촬영 영상은 페이스북과 유투브를 통해 전 세계에 퍼졌다.

(이란) 정부가 트위터 접속 IP를 막아도 프록시라는 우회 IP를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차단을 피해나갔기 때문에, 정보를 통제하는 데에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의 트워터 사용자들은 이란 국민들이 트워터를 통한 항의 운동을 계속할 수 있게 자신의 서버를 프록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운동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348P

외국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촛불집회 때나 용산 참사 때 웹캠과 노트북을 들고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하던 시민들이 SNS의 주역들이다. 당시 정치적 성격과 거리가 먼 요리전문 사이트 ‘82쿡닷컴’을 비롯하여 몇몇 사이트는 촛불 집회 참여를 독려했다는 이유로 코미디처럼 ‘좌빨’ 사이트 혐의를 받았다. 물론 선동 주체는 정부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몇몇 메이저 언론이다.

수익을 내는 상위 20%가 전체 관심의 80%를 대변하는 팔레토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현재 미디어 시스템에서는 축소, 과장, 왜곡 보도를 막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풀뿌리 언론은 대안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에서 저자들은 기술의 발전이 자신의 이익 증진을 위한 방향으로 커나가듯이 보이나 실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전망하지만, 그 주장처럼 소셜 네트워크가 ‘소통, 개방, 참여’의 진짜 모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이 책에서도 현재 트워터리안 100명 중 10명 정도만이 주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로 수익구조와 직결되는 트래픽을 들고 있는데, 현실처럼 영향력이 몰리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사회 활동이 활발한 30~40대가 주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 산업의 하향세의 원인이 매체 간 경쟁이 아닌 대중의 소비 형태 변화이며,  ‘언론매체의 성향에 따라 여과되지 않고, 아무리 소수의 목소리라도 개인이 알고 싶은 정보는 언제라도 얻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역할을 소셜 네트워크가 담당하는 현실이다. 이런 의미라면 나도 이미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위대한 집단지성의 힘’이 사례가 아닌 현실로 발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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