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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 무위당 장일순 잠언집
김익록 엮음 / 시골생활(도솔)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눈송이처럼 마음에 가볍게 내려앉는 깃털 같은 구절, 그래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이다.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밑줄을 긋는 습관을 들였으나, 피곤을 가장한 게으름에 집에서는 책을 펴들 엄두를 못 내니, 지하철과 버스가 도서관이다. 그래서 우선 밑줄 대신 페이지를 접어놓는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은 접기를 포기했다. 짧은 글 모음은 다시 읽어도 시간 반이면 충분하건만, 내내 들고 다니면서 한 구절 한 구절을 곱씹어보니 어디 한 군데 특출하게 대하는 게 의미 없다 싶었다. 중간 쯤 읽으니 접힌 페이지가 거지반이 넘는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내 마음 지그시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지요. 세상에 제일 하잘것없는 게 좁쌀 아니에요?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요. ‘조 한 알’ 78쪽
이 책은 좁쌀 한 알, 일속자(一粟子) 장일순의 잠언집이다. 장일순은 사전에 실린 짧은 소개에 따르면 ‘한국의 서화가·사회운동가·정치가. 1970년대 반독재투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자연복구를 주장하는 생명사상운동을 펼쳤다. 서예에 뛰어났고 만년에 난에 사람의 얼굴을 담는 '얼굴 난초' 작업’을 했다‘고 나온다.
94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혹여 감시를 받는 처지에 다른 이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부러 글을 써서 남기지 않았지만, 일속자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은 여전히 따뜻한 입김이 가시지 않았다. 따뜻함에 끌려 몰려온 낮도깨비들이 그의 얘기를 귀동냥하였다가 몇 권 책으로 풀어놨다. 이 책은 2009년, 서거 15주기를 맞이해 여직 기억에 남은 얘기들을 모았다.
바닥에 떨어진 좁쌀이 잘 보이지도 않지만, 혹여 밥에 섞어 내 앞에 두었다 해도, 걸신이 들린 뱃속은 눈을 감고 코를 막고 혀를 말고 느낄 새도 없이 꾸역꾸역 삼켜서는 잠시 묵혔다가 떠밀듯 몸 밖으로 내 보낼 터이다. 그래도 좁쌀 한 알은 내 눈을 밝히고 내 귀를 뚫고 혀에 감각을 찾아줄 것이다. 장일순은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을 빌어서 우주와 나락 한 알, 풀 한 포기에 함께 하신다고 한다. 당연한 순리이나 10원도 안 되는 것들은 당최 관심 밖으로 점점 떠밀려 가는 세상에서 그 얘기는 참 달고도 쓰다.
작은 것들, 못난 것들, 깨진 것들에 대한 각별한 마음씀씀이는 일속자의 삶을 관통하는 줄기이다. 허나 쇠막대 같이 단단한 듯해도 곧 삭는 줄기가 아니라 흐르는 물줄기와 같아서 시시때때로 찾아 들어서 마름이 없고 쉼이 없다. 그가 내어주는 삶을 선택하여서 그렇다. 그리고 흐르는 물은 수도꼭지가 아니어서 만물이 깃든다고 한다. 청강(靑江)이라고도 호를 썼던 장일순의 삶이 그랬다.
예수가 하필이면 왜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서 태어났을까요? (…) 인간 세상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 공간과 무한한 시간에 걸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몽땅 해결을 하러 오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일체 만물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 94쪽
무위당(無爲堂)이라고 자신을 불러달라던 장일순은 동학과 천주교를 아우르며 스스로가 사상의 화합을 이루어 내어서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에서는 목사 이현주와 대담을 하면서 노자와 예수님을 앞서고 뒤서고 없이 나란히 하여 풀어냈다. 이 책이 점점 낡아갈수록 대신 눈이 맑아졌던 좋은 기억이 있어 장일순의 책은 찾아 읽으려고 하였다.
이 얘기는 반대로 내가 세상 핑계대면서 점점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소설가 조용헌은 무위당 집에서 시장까지 도보로 15분 정도의 거리지만, 무위당은 보통 두세 시간이 걸렸다고 기억한다. 그 사이 만난 이들과 담소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는데, 엿장수, 리어카 행상, 소매치기, 창녀 등 누구여도 마찬가지라 했다. 아마 빈 들판에 서 있다 해도 ‘풀섶에서 들려오는 (…)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 그 벨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라고 말하는 무위당이라면 사람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고스란히 실천한 이다. 그러니 무위당을 알았다면 이것저것 말 앞에 말을 홀치고 겹치고 덮어 씌워 핑계를 댈 게 없다. 그냥 속담 그대로 살았으니 뭔 말을 더 보태겠는가.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에 실린 글들도 어디서 들은 듯도 하고 이미 아는 듯도 하지만 입방정이 아니라 삶으로 걸려 나온 한구절 한구절은 비비꼬아놓은 어지간한 사상서보다 쉽고 가벼우면서도 어렵고 무겁다.
운 좋게도 2010년 새해를 시작하는 즈음에 이 책을 읽었다. 요대로만 살자고, 살려 노력하자고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