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의 눈을 달랜다 - 제2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60
김경주 지음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오래전부터 아는 시인 형님이 한 분 계시다. 대여섯 권의 시집을 내셨지만 창비나 문지 같은, 이른바 한국 시단의 유명 시인들의 이름으로 익숙한 출판사를 통해서 나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형님의 시가 동호회 수준이라는 건 아니다. 가끔 재미삼아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형님의 책이 절판일 때가 많다. 난 그때마다 책이 잘 팔려서 그랬거니, 하고 사인본의 고이 간직한 책들을 슬쩍 본다. 

농 부 같고 잡역부 같은 오십 줄 형님은, 필경 어려서 농부로 살다가 도시에서 잡역부로 살았지만, 늘 속에서 꺼낼 시어가 많다고 하셨다. 아무려나, 이 얘기를 김경주 시인의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를 앞에 놓고 들먹이는 건, 형님도 그렇지만 김 시인도 그렇고, 고상하게 들리는 시인이라는 어감과 다르게, 꽤나 투박하게 부대끼는 삶을 견디는 부류들, 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그 렇지 않은 시인들이 더 많아야지 믿고 싶지만, 내가 아는 가장 시를 잘 열심히 쓰고 진실하게 쓰는 시인, 형님은 그랬다. 그래서 내가 가진 시인의 기준은 그 형님이다. 김경주 시인의 이름을 간간히 여기저기에서 본 듯하다. 그래서 저이가 시인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시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책 꽤나 읽었다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 한두 시간씩 잘도 떠들지만 시를 두고 읽는 고통부터 호소한다. 동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게 서로 암묵적 동의를 하고나면 시집의 대여섯 배 두껍고 깨알 같은 글자가 박힌 책을 들먹이면서 딴 소리를 늘어놓는다. 우리가 시인에 대해 늘어 논 얘기라고는 화간이냐, 강간이냐를 놓고 제자와 소송을 벌이는 추하게 늙은 시인에 대해서였다. 대학시절 선생이었고, 말을 줄여서 썼다고 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점점 길어지는 평균수명처럼 왼팔은 자랐다 점점 귀여워지는 세계에 나는 오른팔을 사용한다 아무도 부도를 눈치채지 못하지만 나팔꽃은 까만 활명수를 마신 후 내장을 내놓고 죽고 별들은 교포처럼 자신의 배경을 의심한다 나에겐 ‘배우자’가 필요해! 이렇게 일기에 처음 적었던 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고 믿는다 무언가를 적어 두고 믿었던 건 한참 후의 일이지만

- ‘거울 속 나이테’  도입부

일요일 오후, 숙취에 흔들거리며 일어나서 무심히 거울을 봤다가 깜짝 놀라서 정성을 다해 목욕을 하고 스킨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빗었다. 비로소 ‘까만 활명수를 마신 후 내장을 내놓고 죽은’ 나팔꽃이 다시 활짝 피었다. 

안과 밖, 나 하나를 두고 벌어진 시차에 멀미가 올라온다. ‘아무도 부도를 눈치’채선 안 된다고 배우고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새해라도 전혀 다를 게 없는 ‘화석의 한가운데 있는 눈동자가 자신의 수분을 찾고 있는 그 경련(’눈동자 화석‘ 중에서)’ 같은 삶의 고통이 함부로 벗어던져 거꾸로 뒤집혀 고린내 풍기는 양말처럼 속내가 까발려진 나에게 나는 악취가 거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하는 게 숙취 때문인지, 오래된 싸구려 스킨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만 덕분에 하루가 몽롱하게 날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시차의 눈을 달랜다>에 실린 시들은 어제 술집에서 나오면서 받은 웨이터 명함과 함께 구겨져서 어드 질퍽이는 눈밭에 달라 붙었는지 다시 펴보지만 내내 생소하다. 그저 느낌을 곱씹자면 김경주의 시세계는 기형도의 시세계와 닮았다는 정도. 기형도의 시는 춥고 건조하고 딱딱하게 말라붙었지만 대신 몇 개 모아서 불을 붙이면 따뜻한 화톳불이 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언제 적 읽은 시집인데 아직도) 기형도 시인이 종로 낙원극장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분명 사랑 영화였다고, 사실과 상관없이 그렇게 믿는다. 

책 날개에 실린 사진에서 시인은 쌈닭처럼 고집스레 눈을 치켜뜨고 있지만 기형도의 해맑은 표정이 언뜻 비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바늘의 무렵’ 중에서)는 구절에서, 문득 하루 사이에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데, 가끔 어린애처럼 물고 싶어질 때가 더 늘 것만 같은 심정이다. 

결국 나는 ‘기도’의 형식으로 여기를 떠날 것이다 

내 거울 옆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고 나무는 자신의 나이테를 거울 안으로 옮기는 중이다 

- ‘거울 속 나이테’ 나머지 부분

내 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게 시를 읽는 가장 초보적 감상이라도 할 말이 없다. 시집 한 권으로 나와 김경주 시인의 삶을 등가로 놓는 식으로 착각에 괜히 멜랑콜리한 기분에 빠져 지적 허영을 즐기려는 것도 얄팍한 자위라는 걸 안다. 아무려나 김경주 시인이 뭔 일을 하든 시인이 독자보다 더 많은 기형의 시대를 시인으로 잘 버티어주길 바란다. 얇은 시집 한 권을 핫팩마냥 붙잡고 일요일 하루를 보냈는데, 후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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