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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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정말로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은 건 모든 ‘어른’들의 소원이다. 하지만 이 ‘어른’들은 시간이 많은 이후의 삶을 담보로 모든 시간을 당겨쓰듯이 쪼개 쓰고 또 쪼개 쓴다. 성공을 하면 시간이 마치 통장예금처럼 늘어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글주글한 피부, 침침한 눈, 하얗게 바란 머리색, 굽은 허리에 놀라고 만다. 내가 원하는 여가가 찾아왔는데, 나는 그 시간을 쓸 몸이 아니다. 그리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젊어지기 위해 별 짓을 한다. 이른바, 안티 에이징이라 불리는 화장품, 성형수술, 염색 혹은 가발, 코르셋, 안과 수술, 귓속에 숨기면 안 보이는 보청기….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거의 사그라지는 불을 보면 안다. 앞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하루하루가 마감을 앞두고 있다는 것 말이다. 

마감, 곧 새해가 된다. 새해가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한해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마감에 쫓기는 삶을 시작한다. 그런 삶이 당연하다는 듯이, 비록 채우지 못할지라도 좀 과하게 목표를 잡아야 고양이(호랑이는 못 그려도)라도 그릴 수 있다는 듯이.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는지 상당히 정확하게 예고되는데도, 아니 사실은 그래서 더 끔찍하다. 예고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고는 기다림을 방해하니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42쪽

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우리가 자기계발서라 부르는 ‘어른’들의 서가에서 만화책을 대신해서 들어차기 시작하는 종류의 책들을 ‘소가 닭보듯’이 대한다. 그는 기차에 막 올라탄 신병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하지만 그 이유는 좀 다르다. 만약 신병들이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면 얼마나 좋으랴. 내용을 모른다면 그들의 소음조차도 마음에 들텐데’라고 말한다.  

아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라면 더 시끄러운 게 아니라 마음에 들었을 거라고? 이 말은 그저 ‘듣기’의 즐거움에 대한 얘기다. 말을 알아듣는 순가, 우리는 ‘이해’를 하기 시작하고 또 그 이야기의 목적과 내용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단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103쪽

페터 빅셀이 말하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라는 건 ‘정거장에서 동네 바보가 딱히 이유 없이 기차를 기다리듯이 무심코 기다리는 시간’이다. 어쩌면 가장 쉬울 것 같지만 현대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잠시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초조해지기 마련인 사람들. 하지만 기차가 오길 같이 기다리는 내내, 지적장애인 만이 시간을 제대로 즐기고 누릴 줄 알았던 게 아닐까, 하고 질문을 한다.

그 시간 동안 책을 읽든, 밥을 먹든, 짬을 내 글을 쓰건 기차 도착 시간이 내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내내 우리는 미래를 담보로 과거와 현재를 포기하고 사는 셈이다.

1935년 생으로 전업 작가로 살아온 폐터 할아버지는 아마도 그리 오랜 시간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이는 삶의 도착을 앞두고 시간에 쫓기고 초조하고 전전긍긍한 대신, 남은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법을 아는 아주 시간이 많은 어른이다.

부인도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오래, 한 집에 같이 살던 아이들도 독립한 지 오래. 개도 무서워서 키우지 않는 그이는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다. 이렇게 말하니 왠지 안타깝게 보이지만 그이는 집이 커진 게 아니라 도리어 작아졌다고 한다. 식구들의 빈자리가 쓸쓸하고 외롭지 않은 걸까.

내가 여기서 혼자 살면서부터 더 작아졌다. 집은 크기를 잃어버렸다. 내가 방에 앉아 있으면 오로지 이 방만 존재한다. 다른 방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넷이 살 때는 다른 방들도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는데. 141쪽

식구들이 떠난 자리가 외롭지 않은 게 아니라, 지난 과거에 연연해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지금 주어진 시간을 ‘무심히’ 보내면서 즐기는 와중이다. 시간은 돈이다, 라는 격언을 두고 페터 빅셀은 돈도 그렇지만 시간은 절대 저축을 할 수도 없고, 그 가치가 변하지 않으니 자신을 내려놓고 주위를 보라고 한다.

대단치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보이는 작은 창문 너머 늘 보는 익숙한 풍경이 바로 ‘지구의 모든 세상’이다. 그의 얘기에 종종 끼어드는 사람들은 과거의 고인이 되었거나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일 때가 많은데, 누구는 세세하게 기억을 하면서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부칠 수 없는 편지라 쓰고는 곧 버리지만), 아니면 그때 그들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고민에 빠진다.

작가가 기억을 못하는 그들은, 작가에게 강한 경험을 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종종 생생하게 기억날 듯하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는 그 당시 작가 자신이 남들처럼 미래를 위해 과거를 저당 잡혔던 정신없이 시간을 ‘낭비’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름다운 날들을 며칠 함께 보내고 그를 떠나보낼 때, 역에 서서 눈으로 기차를 좆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에게 그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당연함의 저주, 말해지지 않는 것의 저주, 부족한 결단력의 저주, 가정법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저주…. 65쪽

비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마치 불교의 구도자처럼 면벽수행을 해도 정작 내 안에서 차오르는 수많은 상념과 잡념들, 그것들의 정체가 내 자신의 전부라면 참 부질없을 수도 있겠다 싶다. 생일 때면 한 해가 정신없이 가버렸다고 말한다. 나도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데, 12월 말이 되면서 역시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다행이야, 라는 식으로 은근히 폼을 잰다.

그래서 뭐가 남을까. 부와 명예와 밝은 미래? 글쎄 주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 유독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어쨌든 모든 권력은 공포다. 권력은 자신이 퍼뜨리는 공포를 먹고 산다. 나는 권력 획득과 유지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권력을 원하는 사람들은 일단 공포를 퍼뜨려야 한다. 권력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왜 그다지도 사랑받을까? 153쪽

‘미래’라고 말하는 ‘권력’(아무려나 비슷한 속성의)에 휘둘려 공포에 휘둘려 살았다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예측 가능하고 쭉쭉 진행된 계획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 바쁘게 산다고 하면서 내가 놓치는 게 뭔지 생각을 해봐야, 아니 생각을 비워야겠다.

농부들의 격언이 올해 맞지 않았더라도 다음 해에 다시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적어도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던 어린 시절을 보낸 게 기쁘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해도 눈을 기다리고, 날씨가 추워진다고 해도 따뜻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 그러나 큰 눈 때문에 너무 오래 걸린 취리히발 졸로투른행 기차에서 우리는 ‘오늘’이 아닌, 일기예보 속의 과거를 살았다. 미래에는 늘 희망이 없다. 우리가 미래를 알 때는. 40쪽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4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수록했다. 1부 「기다림을 기다리며」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기다림의 미덕과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2부 「작은 세상, 큰 세상」편은 화려한 겉을 벗어내고, 소박한 소통 방식을 드러내는 소중한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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