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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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눈이 시리다. 소설은 빠르게 훑고 지나가면서 읽지 않으면 문장 문장마다 아프게 속살을 헤집고 들어온다. 이재웅의 장편소설『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에서는 희망 따위, 소년이 흘리는 눈물만큼이나 드물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잘 울’지만 눈물을 흘려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 걸 안 이상 ‘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만큼 12살 소년은 늙어버렸다. ‘늙은’ 소년은 오로지 누나를 위해서만 운다. 영양실조로 손바닥 껍질이 하얗게 벗겨질 때마다 자라기 위해 허물을 벗는 것이라 했던 할머니가 죽고, 이북 누나와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누나가 사는 방 네 개짜리 아파트는 좋은 옷과 음식과 고급 자전거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경비실 직원도 누나의 고객인 ‘여자 사업장’이자 그 '여자'인 누나를 곽호 아저씨가 감시하는 감옥이다. 사창가에서 나오기 위해 곽호 아저씨에게 1억을 빚진 누나는 물건 값을 턱없이 싸게 깎으려고 주인과 매번 싸우는 “할머니보다 몇 백 배는 가난한 여자”였다. 지독한 가난 뒤에 화려하게 포장한 더 지독한 가난이 지옥처럼 소년을 맞이하였다.

“인생에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철없는 누나와 싸우고 난 뒤, 가출한 소년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무작정 고른 해남행 버스에 오르는 대신 대합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안 소년은, 앞으로 누나에게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안다. 이때 흘리는 눈물도 늙은이의 것이지 아이의 것이 아니다.

채팅방에서 소년을 사기 위해 경차를 몰고 나타난 -아마도 가난한- 서른아홉 이혼녀, 단속을 봐주는 대신 공짜로 자라는 제의에 “제 값 주고” 하는 걸 자존심이라 내세우는 경찰, ‘영계’를 내세워 창녀가 되고 싶으나 외모 때문에 그 마저도 포기하는, 소년만큼이나 늙고 가난한 소녀, 완주를 비롯해 세상은 충분히 저주스럽다.

그러나 “난 충분히 괴물이에요. 잔인한 괴물이에요”라고 외치는 소년을 더욱 몰아붙이는 건 “너는 좀 더 잔인한 것들을 경험해야 해. 고통스러운 것도. 넌 아직 어린애에 불과해”라는 곽호 아저씨의 말이 엄포로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늙은 소년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그 운명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모든 것을 저주하며 자전거 타기에 열중하는 것뿐이다.’ 자전거 앞에 늘 나타나는 경사진 골목처럼, 좌절을 안기는 세상을 향한 소년의 힘겨운 페달질은 ‘거센 바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면 살아 있다는 느낌’인 동시에 속울음, 눈물이 섞인 짜디 짠 바람이다. ‘나무들 가지에서는 파도 소리’다.

소년은 눈물을 그쳤는가, 소년의 울음은 “이 불안전한 고독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라던 작가 이재웅이 소설을 쓰는 내내, 귀에서 맴돌았을 것이다. 냉정하고 우울한 소설인 동시에, 우직하고 가장 놀라운 데뷔작이다.*
  

“울어도 상관없어. 가서 누나한테 이대로 일러바쳐도 좋아. 징징 울면서 일러바쳐. 너는 갈보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사는 자식이야. 너 같은 자식에게 희망은 없어. 네가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지 알게 되면 살맛이 다 달아날 거다. 일찍 죽어버리는 게 좋아. 미래는 더 형편없을 테니까.”
그는 그런 말들이 열두 살짜리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열두 살이 아니었다. (…) “나는 희망을 기대하지도 않아. 나도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죽기 전에 분명히 말해둘게. 너한테도 희망은 없어. 너는 콜택시를 몰다가 차 사고로 죽어버릴 거야. 우리 누나 같은 갈보하고 함께.” - 108P

“난 벌써 먹었어.” 나는 말했다. 누나가 그것을 먹었다. 나는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대합실 한 쪽을 이유도 없이 노려보았다. 늙은 소년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228P

“우리가 회사와 싸우기 이전에 노조와 싸워야 한다는 건 비극이야. 그는 말했다. ”세상과 싸우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문제와 싸우는 게 비극이듯이 말이야.“ - 2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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