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 등등. 그런 책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 쉽고 재미있는 책, 읽어서 몽땅 이해되는 책은 당장 덮어야 한다. 생각보라. 그건 저자의 수준이 나랑 똑같다는 뜻인데. 그런 책에서 대체 뭘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Homo Kungfus)』 중에서


사고를 하도 많이 쳐서 “걱정아. 걱정아.” 부르다가 이름이 꺽정이가 된 막돼먹은 종자, 시대의 왕따 계층, 백정으로 태어난 가축 도살의 달인, 허나 가축보다는 주로 가축만도 못한 인간 종자들에게 제삿밥을 자시게 한 남자, 2009년 대한민국에서는 당최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후기의 진정한 쾌남, 조선의 거칠 것 없는 자유인 조르바, 임꺽정!

‘배우서 남 주자!’를 삶의 지표로 삼은 자칭 박사 백수이자 자유로운 지식인들의 코뮌 <수유 + 너머> 맏언니 고미숙이 이 문제의 인물에게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둘 사이 생일 차가 100년이 넘게 나다보니 안타깝게도 몸과 몸으로 만나 찐득하게 회포를 푸는 일은 영 불가능하다. 

허나 천재 소설가라 불린 벽초 홍명희의 신들린 솜씨로 생생하게 살아난 임꺽정을 포함한 청석골 패거리와 고미숙은 부부 인연 못지않게 서로 손발이 쿵하면 짝하고 딱딱 잘도 맞아 떨어진다. 이 두 걸물이 후생에서 만난다면 그때 벽초도 같이 환생하사 주례를 보면 딱 맞을 일이다.

이 두 남녀가 이처럼 죽이 맞아 돌아가는 이유라면, 고미숙이 일방적으로 연모의 정을 밝힌 데에 있겠다. 그리고 그녀가 사십 줄을 넘긴 나이에 대놓고 쓴 연서를 볼작시면 임꺽정의 파란만장한 삶이 고미숙의 화두인 ‘호모 쿵푸스’와 딱 맞아 떨어지는 탓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고미숙은 연암 박지원에게 홀딱 반해 사스 열풍에도 아랑곳없이 열하행궁까지 그의 발자취를 찾아 중국 땅을 헤매면서 한참을 서성이더니만 이번에는 수컷내를 제대로 풀풀 풍기는 임꺽정에게 또 홀랑 넘어갔다. 연애의 자유분방함이랄까.

그렇다.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은 고전문학박사 고미숙의 소설 『임꺽정(林巨正)』 비평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청석골 패거리를 향한 열렬한 응원이자 뜨거운 연서이다. 고미숙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말, 마치 쿵푸를 하듯이 앎에 대한 열정으로 몸을 단련하고 일상을 바뀌 나간 대상으로서 임꺽정을 필두로 한 청석골 삶에 대한 합일치에서 나오는 찰떡궁합 환의의 신음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닳도록 운우지정을 나눌 것도 아니고 고미숙이 청석골 초입에서 임꺽정 패거리를 VIP로 둔 주막집 주모마냥 호들갑을 온몸을 다해서 떨어대는 이유가 뭘까. 

고미숙의 저서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와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가 대한민국 마이너리거, 아웃사이더들의 팍팍한 인생살이에 성(性)과 속(俗)을 아우르는 특효처방전이라면, 뒤따라 나온 이 책은 그 처방전의 실제 사용례인 셈이다. 그러니까 약장수가 설을 풀어 동네 사람들을 모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약발 제대로 받아 차력 시범을 보이는 격이다. 

그녀의 책에 감초처럼 이름 석 자를 꼭 올리는 연암 박지원도 임꺽정 못지않게 매우 쓸 만하고 볼 만하다. 다만 서자 출신에다 29살에 과거에 낙방한 박지원의 젊었을 적 처지가 공무원 시험에서 덜컥 떨어진 우리네 88만원 세대와 다를 바 없다고는 하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이는 박지원이고보니 왠지 모르게 기를 죽이는 게 사실이란 말이다.  

그에 반해 평생을 집짐승과 들짐승과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을 요절을 낸 두루두루 백정으로 문자와는 평생 원수로 지냈으며, 부인 네 명에 따로 기생 소홍이라는 연예인을 연인을 둔 파토스의 상징 임꺽정은, 이른바 가상의 온라인 게임에서도 보기 힘든 진짜 걸출한 캐릭터인지라 변변치 않은 인생들에게는 우상이 되고도 남음직한 인물이란 말이다.

임꺽정만 그러한가. 청석골 우두머리라는 작자들의 신상명세서를 보면 유복자, 갖바치, 소금장수, 임노동자(알바생), 떠돌이 룸펜, 더부살이를 했던 이력의 소유자들이 마이너 중에서도 최하위리그 소속이다. 

그러니 평소 주위의 마이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자랑하는 고미숙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마이너리거들이 마이너의 대표 주자격인 임꺽정 패거리의 향연에 홀딱 빠져 공부를 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냔 말이다. 다만 여?? 애들이 공부의 달인들이구나”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고미숙이 말하는 공부는 돈과 출세에 평생을 옥죄어 사는 머리만 굴리는 지질한 공부가 아닌, 일상의 모든 순간을 앎의 자원으로 삼는, 삶을 통틀어 관통하는 공부이다. 쿵푸(功夫)를 하듯 온몸으로 부딪혀서 익히는 바로 그 공부이다.  

청석골 일곱 두령들은 우선 자신의 신분, 위치, 나이, 처지와 상관없이 평소 익히고 싶었던 비기를 오랜 세월을 걸쳐 인내의 쓴 맛을 충분히 맛보고 익힌 달인들이다. 다만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들이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놀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비기라는 게 시대가 요구하는 이른 바, 일류대와 대기업 정규직으로 이어지는 사회의 ‘공식’ 코스와는 한참 거리가 먼, ‘공자 왈 맹자 왈’과는 거리가 한참 먼 돌팔매질, 댓가지창 던지기, 장기, 축지법 등이다.  

여기서 더더욱 착각하지 말아야 할 건, 임꺽정 패거리의 강력반 비상이 걸릴만한 사건만 보고는 깍두기과나 개망나니과로 나서라는 전언으로 알아먹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직 폭력배들이나 학교 양아치들처럼 아류 권력으로 또 하나의 수직체제를 세우고는 뒤에서 거드름이나 피웠던 게 아니었다.  

달인들은 싸울 때는 앞장서고 물러날 때는 맨 뒤를 지키는 두령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농부, 목수, 의사, 점쟁이 등등의 민초들이 졸개로 따른 것이다. 청석골은 수직이 아닌 수평체제의 코뮌이었다. 

그들의 느슨한 연대는 곧 그들의 생명줄과도 깊은 연관을 맺는다. 청석골이 정주를 위한 권력의 집결지였다면 관군들이 제대로 열 받고 몰려왔을 때, 그들이 일반 양아치 패거리였다면 그 많은 재물을 어찌 버리고 떠날 수 있었겠나.  

허나 늘 축제의 현장으로 두령과 졸개가 뒤엉키고 심지어 인근 마을 주민들까지 와서 거들어서는 서로 먹고 놀며 나누는 일상이 생활이 된 바, 늘 몸이 가벼운 청석골 패밀리들에게 청석골은 그저 집결지의 한 곳일 뿐이었다. 

자, 그렇다. 소설 <임꺽정>은 고미숙이 책을 통해 혹은 강연을 통해 목이 쉬도록 말하는 탈 중심주의로의 사유의 전환, 즉 수직 체계에서 벗어난 각자 자신이 가진 사유의 지도를 펼치라고 당부한다. 비정규직은 물론이요, 정규직 역시 쌍용차 사태에서 보듯이 잠정적인 백수로 몰리는 시대이고 보면 백수로 살기 위한 당부를 꼭 새겨들어볼 일이다. 

“백수는 시간의 노예로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부리며’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 존재에 해로운 일일랑은(예컨대 쇼핑, 게임, 채팅, 하릴없는 수다, 기타 산만한 행동들) 줄이고 (……) ‘자유 시간’은 신체적 능력을 확장하는 정밀한 훈련에 쓰여야 한다.”

고미숙이 보기에 각자 전공이 제각각인 지식인 백수들이 꼬인 <수유 + 너머>는 청석골 또 하나의 환생이고, 스스로도 일곱 두령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청석골 원년 멤버인 오가에 가깝다.) 적어도 말로만 떠들지 않고, 공동으로 밥 지어 먹고 더불어 공부하며 글 쓰면서 산다. 자신은 그렇게 살기로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너도 해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역시 가장 새겨들어야 할 첫 번째 지침은  “태도다. 백수가 달인 되는 건 백수 신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백수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다”라는 전언이다. 자! 이제 약장수의 감언이설과 눈을 획 돌게 하는 차력쇼에 홀딱 반해서 천하제일 명약을 사들고 으스대며 오듯이, 이 책을 가슴팍에 꼭 안고, 여기 백수 한 명 공부(功夫)하러 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