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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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인 19세기 말, 네덜란드령 가이아나(현재 남아메리카 수리남) 커피 농장주의 외동딸 마리아의 열네 번째 생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성경책을, 친척 아줌머니들은 향수와 핸드백을 선물했다. 아버지와 엘리사베트 아줌마만 아직 비밀이라는 데 뭘까, 마리아는 궁금하다. 독일의 아동문학작가 돌프 페르로엔이 쓴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는 마리아의 시점으로 본 열네 살 생일 이후, 몇 달 간의 일상을 적은 짤막한 일기이다.
 

부잣집 귀한 영애답게 까탈스러운 구석은 있지만 사춘기 소녀의 눈으로 본 소소한 일상이 악녀일기로 둔갑한 이유가 무엇일까.
 

드디어 아빠의 선물이 도착했다. 커다란 은쟁반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작고 까만 선물이 있었다. 초콜릿 케이크? 아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 꼬꼬다. 엘리사베트 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채찍을 선물했다. 마리아는 생일 선물로 받은 숙녀용 핸드백은 마리아가 들고 다니기에는 ‘아주 컸’지만 채찍을 넣기에는 ‘작았다’고 일기에 적는다.
 

집 안과 농장에도 노예들이 많이 있었지만 꼬꼬는 마리아의 첫 개인 노예다. 그리고 이후 꼬꼬를 팔고, 다른 노예를 사고, 아빠를 따라 노예 시장을 다녀오면서 마리아는 노예를 대하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다. 그리고 아빠와 루카스가 여자 노예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알게 되면서 아픔을 겪기도 한다. 이제 마리아는 개인 교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유럽의 스위스 기숙학교에 갈 꿈에 부푼다.
 

여기까지가 일기의 내용이다. 이후 내용이 없는 이유는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한 마리아가 요즘 한국 아이들처럼 공부에 치어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처음에 자기 피부를 ‘아주 안 예쁜 노란색’이라고 속상해했던 마리아는 이후 완벽한 ‘흰색’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교육과 제도를 통해 이성과 지식과 교양을 갖춘.
 

짐작하듯 ‘사춘기 소녀의 성장기’가 이 책의 주제는 아니다. 일기에 스치듯이 등장하는, 인간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노예 문제를 고발한 작품이다. 검은색은 흰색과 가장 대비 차가 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가 반한 루카스의 웃을 때 보이는 하얀 이빨처럼, 흰색을 드러내는 배경색일 뿐.
 

좀 엉뚱한 얘기지만 ‘푸드 마일리지’라는 말이 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먹거리와의 관계를 나타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식빵 300g을 김제(거리 230km)가 아닌 미국산(거리 20,063km)을 사면, 운송거리 차이로 220g의 이산화탄소가 더 내뿜은 셈이 된다는 식이다. 그리고 220g의 이산화탄소는 형광등을 26시간을 더 켰을 때 나오는 양과 동일하다. 그런데 왜 슈퍼에 가보면 미국산 밀로 만든 식빵이 대부분을 차지할까? 당연히 가격이 더 싸기 때문이다. 그 먼 거리를 왔는데에도 싼 원인은 값싼 화석연료 ‘검은 황금’ 석유가 있다. 
 

석유를 먹고 쓰고 입으며 사는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라는 현대인 삶을 2백 년 전으로 돌리면 역시 ‘검은 황금’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노예가 할 일을 지금 석유가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노예 제도는 마리아의 아버지나 루카스처럼 만연한 성 착취 등 인권 유린 이전에 노동력 획득이 목표였다.  

석유 1배럴(159L)은 노예 12명의 1년 치 일을 한다. 다시 말해 욕망을 줄이지 않는 대신, 더 실용적이고 편리하고 일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석유로 노예를 대체한 것이다.
 

18세기의 산업혁명이 노예 제도와 맞물리지 않았다면, 과연 인권 운운하는 노예 제도 폐지가 되었을까. 미국 역사에서 공업 위주의 북부와 농업 위주의 남부의 대립에서 북부의 승리는 인권의 승리 이전에 ‘검은 황금의 교체기’라고 보는 게 맞다. 
 

한국 아이들은 마리아가 생일 선물로 받은 꼬꼬를 몇 개월 만에 다른 노예로 갈아치우듯이 휴대폰을 갈아치운다. 그리고 미국 아이들은 운전면허를 따고 생일 선물로 차를 몰고 다닌다. 사춘기에서 어른이 되는 나름의 통과 의례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평균 1년에 300명의 석유 노예를 부린다. 
 

백인 작가의 반성과 인신매매, 성 상품화,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순혈주의 등 여전한 인권 문제에 대한 경고는 당연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노예 제도의 원인인 “과도한 욕망”을 줄일 수 있는가를 고민 하지 않을 수 없다.  담뱃갑에 폐암 경고 문구를 넣듯이 식빵 포장지에 푸드 마일리지 표시를 붙여서 경각심을 일깨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우리의 삶이 근간인 지구를 마구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한 편리한 삶, 이런 ‘상식’이 상식이 아니고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지금 2백년 전 악녀일기의 진짜 무서움이 드러난다. 그리고 2백 년 후 우리 아이들이 쓴 일기가 악녀 일기로 읽히는 비극이 없기를 바란다.*

<인상깊은 구절>
 

두 분은 내게 금으로 된 걸쇠가 있는 성경을 선물했다. 20p

에르다 아줌마가 핸드백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숙녀용 핸드백인데 아주 크다. 어딜 가든 언제나 들고 다닐 거다. 21p
 

엘리사베트 아줌마가 준 선물은 작은 채찍이었다. 채찍은 내 핸드백에 넣기에는 좀 컸다. 아쉽다. 25p
 

올라는 비싸지 않다. 할 수 있는 일도 꼬꼬보다 더 많다. 그 노예를 데려 오자, 엄마가 말한다. 그럼 꼬꼬는 어떻게 하고? 천천히 생각하자. 결정이 났다. 꼬꼬를 팔기로 했다. 65~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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