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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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자신이 겪은 일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회사에서 야간 당직을 서다가 꼬박 세 시간을 송수화기에 붙잡힌 적이 있다. 속에서는 짜증이 끌어 올라서 눈앞에 있으면 당장 목이라도 조르고 싶지만, 위태롭게 들리는 목소리에서 ‘자살’ 적어도 ‘자해’의 기운이라도 느꼈던 바, 순순히 그의 얘기를 받았다. 결국 그는 “당신 때문에 오늘도 전화비가 많이 나왔다”는 불평과 함께 “막 라면이 다 끓었는데 당신과 먹지 못해 아쉽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잘한 일이다 싶었는데, 라면을 먹는 그가, 새벽 야참을 챙겨먹는 그가, 자살을 할 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놈을 그냥!” 송수화기를 내던졌는데, 허탈해지면서 긴장과 분이 좀 풀렸다. 후루룩 소리가 내던진 송수화기에서 들렸던가? 허기가 몰려왔다. 그가 한참 후루룩거리며 먹고 있을 라면이 같이 한 젓가락 담구고 싶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신이 약간 문제가 있지 않고서는 하지 않을 성 싶은 얘기라고 치부했던 그의 황당한 쌈마이(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집안 얘기를 세 시간이 붙잡고 있었던 걸 보면 꽤 흥미진진한 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난 그의 얘기에 온전히 동참한 그날의 ‘독자’였던가, 그래서 그가 그리 당당했던가 싶다.  

다만 그의 얘기를 무시하거나 재미로만 듣지 못했던 건, 그이의 목소리에 담긴 결연한 태도 때문이었던 게다.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충만기>에서 간만에 내가 오롯하게 느꼈던 태도이다.   

아귀다툼을 벌이는 옆집 같은, 지질하고 남루한 인생들이 하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단편소설집에서 그들의 언어는 평이하지가 않다. 악다구니가 치받치는 정도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예를 들어 해외토픽 감인 성적비관 자살이 한국사회에서는 더 이상 뉴스가 되지 않지 않은가.  

이기호의 소설 속 화자들은 기존 소설의 문체에 그다지 기대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요즘, 그들의 어투, 즉 문체는 랩이거나 성경의 의고체 등이다. 이기호에게 접신을 하여 이야기를 푸는 그들은 10대 양아치(랩)거나, 경찰 앞에서 범죄자로 고개를 숙였(조서)거나 태어나 평생을 교회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 살았던(성서체) 경우이다. 그러니까 책 해석처럼 이기호의 “이야기꾼은 독자와 직접 대면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신문과 TV와 같은 양지 무대에서 소위 가진 자들의 가식적이고 더러운 말에 귀와 눈이 어지러운 요즘, 이기호는 자신의 역할을 아는 작가이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기 위해 한밤중에 자살을 가장하듯이,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 이상, 한풀이가 그치지 않는 이상 르포 작가처럼 이기호는 송수화기에 귀를 바짝 붙이고 추임새를 넣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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