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행복을 파는 곳
정근표 지음, 이미경 그림 / 샘터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10살 때인가, 뒷산을 놀러갔다가 산책 나온 아주머니에게 외과피(外果皮)만 벗겨난 은행 몇 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워낙 집이 가난하다보니 은행을 좀처럼 먹을 일이 없기도 했지만, 또 큼큼한 냄새가 밴 단단한 중과피를 벗기지 않은 은행을 좀처럼 볼 일이 없다보니, 바로 그 자리에서 까먹기가 좀 꺼림칙했다.

그러다보니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실컷 놀고는 집에 와서 꺼내놓았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우리 아들이 엄마 생각을 할 줄 알게 되었다”면서 생각지 않게 감동을 하시는 게 아닌가. 

몇 알 안 되었지만 불에 살살 구운 은행을 어머니와 둘이 오순도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쌉쌀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은행의 맛’으로 입 안에 남아 있다.

그때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지었던 그 미소가 떠올라서, 제 입만 알던 개구쟁이는 그 뒤로 별 것 아닌 군것질거리라도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한 마디쯤 더 철이 들었다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일이 떠올랐던 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행복을 파는 곳’이라는 부제가 달린 <구멍가게>를 읽고 난 뒤였다. 올해 샘터에서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단장을 해서 나온 이 책은 구멍가게집 아들로 유년기를 고스란히 보낸 일화를 진솔하고 어제 일인양 세밀하게 풀어낸 동화작가 정근표 글에, 향수를 담은 삶의 스러져가는 이런저런 모양새를 따뜻한 펜화로 담는 화가 이미경(
www.leemk.com)의 그림을 더해 씨실에 날실을 촘촘하게 짜낸 뽀얀 명주천 같은 수필집이다.

‘냉장고는커녕 찬거리를 보관할 변변한 찬장조차 변변히 없던’ 시절, 고만고만하게 살던 동네 골목에서 만물상이자 사랑방인 구멍가게. 그러나 가게와 집 구분 없이 일곱 식구가 아옹다옹했던 ‘버드나무집’의 천덕꾸러기 둘째에게 그 시절은 마냥 즐거웠던 시간은 아니었다. 

통금이 끝나는 새벽 4시면 남들보다 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채소도매시장으로 나섰던  아버지의 어스름한 뒷모습으로 시작해 통금 전까지 “마치 우리 가족이 구멍가게에 포로로 잡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고단한 구멍가게의 일과는 “아버지가 한물간 채소를 다듬는 날이면 …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신발 안에 채소가 들어가면 하루 종일 썩는 냄새와 씨름을 해야”했던 기억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골목의 소소한 일상이 고이는 구멍가게에서의 삶은 불혹을 넘겨 글을 쓰기 시작한 정근표에게 잘 삭힌 거름처럼 작자의 소양을 키우기 위한 좋은 자양분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책의 미덕은 후일담이 종종 범하는 실수처럼, 이 후에 애써 곁불을 지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멍가게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책으로 묶인 17편의 작은 글에는 결핵으로 죽은 친구 춘실이의 일화처럼 가난한 이웃들의 힘든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여기에 화자인 작가는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 친구에게 소홀하고 삐치고 화내고 소홀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투영했다. 보통 장사를 하는 집 아이들이 그렇듯이 얼마간 영악하고 되바라진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삽화를 맡은 이미경도 마찬가지, <구멍가게>의 삽화가 아니더라도 진작 경쟁에 밀려 천연기념물 신세가 되어버린 구멍가게를 찾아서 담은 작품들을 보면 일정한 간격을 엄정하게 유지한다. 이를 바라보는 눈은 동정이나 흥미나 꾸밈이 아니다.

60~70년대는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웠거니와, 책이 출간되자마자 제일 먼저 드린 아버지가 책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던 대목에서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이 있는 세월이 아버지께는 고단한 상처로 아버지께는 고단한 상처”로 남아 있더라는 작가 후기처럼 서민들은 고단하고 힘들고 악다구니를 떨며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삶이란 요지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어두운 곳에서는 어둡게만 보이기 마련이지만 빛을 마주하고 보면 환한 구석이 내비치기도 한다. <구멍가게>가 부제처럼 따뜻한 행복을 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환하면서도 따뜻한 빛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보다 먹고 살만한 요즘이라지만 방향을 잘 조율하지 못하면 지리멸렬했던 차가운 기억만 화석처럼 남는다.**

 

<밑줄긋기>

어릴 때 가난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어서 죄가 될 수 없지만 성실히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서 이런 도시락 천 개 아니 만 개를 갚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도시락, 71P

그날 이후, 어머니는 이른 새벽 꽁치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싱싱하고 굵은 놈을 한 마리 따로 챙겨 놓았다가 꽁치 아주머니가 올 시간쯤 상자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았다. 상자에 담겨 있는 꽁치는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아침 장에는 싱싱하고 굵은 놈을 비싸게 팔고, 저녁 장에는 한물가고 씨알이 작은 꽁치를 거의 반값에 팔았다. 그런데 새벽에 가려 놓은 꽁치를 저녁에 싸게 꽁치 아주머니께 드렸으니 다른 어떤 단골도 그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꽁치 아주머니, 113P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생고생하며 모은 돈을 이름도 밝히지 않고 선뜻 내놓은 것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식이 아재는 자기가 할 일은 다했다는 듯 그렇게 돈을 맡겨 놓고 뒤뚱뒤뚱 가게를 걸어 나갔다. …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끙끙거리는 아이처럼 한동안 식이 아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이 세상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식이 아재,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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