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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옛집은 내게 도심 속 별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는 일에 지칠 때 그의 집 툇마루에 앉아 있다 오곤 했다. 선생이 직접 가꿨던 나무와 꽃, 풀들이 뒷마당에 널려 있어, 그곳은 현판에 쓰인 대로 “문을 닫으면 깊은 산중”이었다. 책과 소박한 가구 몇 점이 놓인 방안에서 글을 쓰다 이따금 정원을 내려다봤을 선생을 공간에 그려 본다.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독자들을 고도 1,000미터가 넘는 깊은 숲속에 자리한 별장으로 데려가, 녹음 속에서 설계도면을 그리고 있는 건축가들을 소개시켜 준다.
대학을 막 졸업한 사카니시는 평소에 존경했던 무라이 선생의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사무소 직원들은 별장에서 모여 작업을 한다. 국립현대 도서관 설계경합에 참여하기로 한 이들은 도서관을 짓기 위한 아이디어와 설계방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소설은 여름별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건축가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큰 사건이나 등장인물의 심리의 묘사보다는 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풍경 묘사에 집중한다.
건축가들이 조용히 설계도를 제도하고 있으면 여름 벌레, 바람 소리, 오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커다란 소리를 낸다. “음표 없는 긴 오선보가 완성되어간다. 보통 선, 흐리고 가는 선, 짙은 선. 세 종류의 오선보”,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랜지색으로 빛난다.”
집 안팎에서 들려오는 새와 벌레 울음소리, 잎사귀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예초기 엔진 소리 등. 별장을 둘러싼 계절의 변화, 식사준비하는 과정, 별장 안에 놓인 가구 묘사 등을 작가는 자세히 다룬다. 주변 묘사가 뛰어나 독자들은 어느새 별장의 한 가운데에 가있게 된다.
최종 결과물을 완성하지 못한 채 무라이 선생은 뇌경색으로 쓰러진다. 이후 도서관 경합에 실패하고 직원들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30여년이 흐른 후 사카니시는 다시 여름 별장을 찾아가 선생님을 추억한다. 무라이의 건축은 실용성을 추구했다.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 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 다이닝 키친의 경우, 요리하는 냄새가 좋은 것은 식사하기 전까지 만이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싫어지지. 주방의 천장높이와 가스풍로, 환기통 위치가 냄새를 컨트롤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야.”
중견 건축가가 된 사카니시는 건축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조언을 해줬던 무라이 선생, 여름별장, 동료들과의 시간을 기억하며 살아왔다. 그 당시 설계하고 모형을 만들었던 그 건축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사카니시의 가슴속에는 무라이 선생의 건축 철학이 남아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마쓰이에 마사시는 오랜 기간 건축관련 책과 설계도면을 꾸준히 읽어왔다. 작가는 소설 속 무라이 선생의 실제 모델인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의 제자에게 자신의 집 건축을 맡겼다고 한다. 집이 지어지기까지 과정을 지켜보고 완공된 후 그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작가는 건축가의 일상을 더욱 현실적이면서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silentmasters. 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