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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미워해도 될까요?
다부사 에이코 지음, 윤지영 옮김 / 이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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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과민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게다가 기까지 세서, 주변인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엄마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하필 엄마의 ‘드센’ 성정을 닮지 않아, 엄마의 간섭과 기세에 무기력하게 시달리며 자괴감과 위축감에 빠져 성장하게 된다. 엄마와의 관계가 실패한 것은 그녀에게 원체험으로 남아 일상의 숱한 국면마다 시종 그녀를 압박하고 흔들어놓게 되고, 엄마에 대한 적개심은 무럭무럭 부풀어올라, 결국 엄마, 부모와의 결별, 절교를 선언한다.


엄마와 딸, 엄마와 자식, 부모와 자식, 가족이라는 내밀하고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균열을 디테일 돋게 그려내는 이 만화의 독특함은 엄마의 입장이 설명되며 엄마를 이해하게 되거나, 엄마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감정의 벽이 허물어지며 화해에 도달하는 가족 서사의 문법을 극딜하는 데 있다.


이 만화의 서사에서 엄마라는 사람은 그녀를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압제자의 모습으로만 그려지고, 그녀는 엄마에게서 따뜻한 감정을 1도 반추하지 않는다. 엄마는 과민하고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일방적으로 주변인들을 학대하는 까칠한 여자이기도 하지만, 세상물정을 잘 이해하고, 세세하고 사려깊고 또 균형감 있게 상황을 준비하고 정리해가기도 하는 평균적이고 깍듯한 사람이기도 한데,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이 압제와 핍박, 상처와 좌절로 기억된다.


결국 엄마에게서 도망치기, 엄마에 대한 증오를 실천하기 등으로 자기 내면의 공간을 확보하고 평화를 얻고자 하는 그녀의 서사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아닌 ‘증오와 상처가 꽃피는 나무’로서 가족의 속살을 까발긴다.


엄마와 자식, 가족이라는 제한된 관계만이 아닌, 여러가지 차이로 권력관계가 형성되거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규정되는 인간관계의 어떤 국면에 대한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내 안에 숨어 있는 악마와 패배자의 두 얼굴을 마주하게 하기도 하는 이 서사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과 삑사리와 상처로 점철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고발이자 거울상이다.


상처받은 영혼의 처절한 고발서인 이 만화는 우리로 하여금, 부정의 문법, 즉 헤어지고 포기하고 끊어버리고 그럼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단절의 힘을 생각하게 한다. 기실 우리는 얼마나 뜬금없는 화해에 의존하며 스스로를 기만하고 퇴행하고 있는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헤어지고 포기하고 버리고 끊고 멀어져야 하는 것은 불가항력이자 또 하나의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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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 - 카이에 소바주 3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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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물신숭배의 허구와 대안’으로 경제적 합리성이 지배하고 교환의 원리가 물상화되어 숭배되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새로운 삶의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특이한 것은 대개의 자본주의 비판서가 경제학, 정치철학, 사회이론 등을 다루는 데 비해 이 책은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라는 시적이고 추상적인 제목으로 신화적 마인드의 회복을 주장한다.


철학자이며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는 일본의 근대소설과 볼테르, 동굴벽화, 신화, 인류학, 양자역학, 마르크스와 라캉 등을 넘나들며 경제원리의 원형적(신화적) 구성과, 교환의 원리가 부상하고 화폐가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독특하게 밝혀낸다.

 

저자는 합리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와 비합리적이며 불확정적인 감정의 교호관계를 나타내는 사랑이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한 덩어리의 것이었다고 말한다. 경제는 교환과 더불어 인격성이 배어있는 사물들을 주고받으면서 형성하는 증여, 쌍방간의 증여의 동등성이 허물어지고 비대칭적이며 불확정적인 힘과의 관계를 다루는 순수증여로 구성되어 있다. 증여를 기반으로 한 교환이 증여를 변형하고 부정하면서 지배원리로 부상하고 사랑과 경제는 배타적인 관계가 된 것이다.

 

모스의 증여론을 확장하며 개입시킨 순수 증여의 원리는 단순한 인격적 힘이 아닌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영력으로 작동하며, 그것은 곧 자연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생명력에 대한 신화적 사고이다. 교환과 증여, 순수증여가 분리되지 않고 변형되지 않았던 시대의 부는 자연으로부터 얻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증식과 소멸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고, 생명의 순환과 관계있는 것이었다. 화폐가 발생하기 이전의 고래의 부의 증식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며, 그것은 곧 가치의 원천이 땅이라는 중농주의로 이어진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관계를 지배하는 교환의 원리가 아닌, 증여와 순수 증여의 원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이고 고정된 화폐에 의한 관계가 아닌 비합리적이고 불확정적인 인격적 유대에 바탕한 관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사랑과 경제가 하나가 되는 길이다.

 

재밌는 것은 라캉의 ‘보로메오의 매듭’의 도식을 원용하여 교환과 증여, 순수증여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정신분석학에서 밝힌 인간의 마음의 구조와 경제적 관계의 구조가 동일하고, 쾌락과 부의 증식도,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같은 원리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것은 인간이 이뤄낸 모든 것이 신석기 시대에 이미 원형적으로 잠재해 있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적 분과학문은 물론 신화와 동굴벽화 등을 넘나들고 시대와 공간을 가로지르는 저자의 박학함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다분히 자의적이고 엄밀하지 못하다. 각각의 경제현상과 그것에 대한 해석, 의미들은 국지적이고 역사적인 것들이고 시대와 공간에 따라서 제약되는 것인데 비해, 저자의 사유는 종횡무진 거친 비약과 단순한 도식을 오간다. 현란하고 전방위적인 논리의 전개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기 보다는 지적 영감,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해 보이는 것이다.

 

사실 영성과 자연이 배제된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고, 모든 것을 교환의 대상으로만 규정하는 경제적 합리주의 또한 무수한 비판으로 인한 상처투성이이다. 이런 가운데 자본주의의 핵심인 교환의 원리를 적대하고자 하는 저자의 사유는 독창적이고 신선하면서도 원론적 주장과 현란한 지적 유희 이상의 통찰력과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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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와다 하루끼 지음, 서동만.남기정 옮김 / 돌베개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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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라는 부제가 잘 보여주듯이 유격대국가라는 모델로 북한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이 만주에서 벌였던 항일무장투쟁을 원형으로 삼아 국가가 운영되고 재생산되었고 이것이 바로 유격대국가라고 명명된다. 북한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적, 인맥적 구성은 만주항일무장투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김일성의 개인숭배체제를 이해하는 열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김일성과 만주파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가는 정치사의 관점에서 쓰여지고 있다. 북한 사회의 정치적 전개과정이 통사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면서도, 이론모델과 개념들을 이용해 분석적으로도 쓰여져 역자들의 말대로 북한사회에 대한 통사이자 교과서의 역할을 한다.


하루키는 북한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이미지인 지상낙원과 지옥이라는 수수께끼를 벗기고자 한다. 여기서 쓰여지고 있는 김일성과 북한은 신화적 존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며, 식민지해방투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와 작용들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존재이다.


먼저 김일성은 개명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흔치않은 중등교육을 받고, 민족해방에 눈을 뜬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존재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무장투쟁지도자였고, 해방 후 토지개혁과 국유화 등의 개혁을 주도하고, 여타의 정치세력의 우위에 올라서는 과정은 그의 정치력이기도 했다.


유격대국가는 여러 민족해방투쟁 세력의 한 분파였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파가 득세하는 과정에 기인한다. 하루키는 북한체제건설과정을 소련을 비롯한 일반적인 국가사회주의 체제위에 1967년부터 이차적으로 유일사상체계가 구성되면서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내부의 권력투쟁의 과정이기도 했고, 중소분쟁과 사회주의진영의 균열, 베트남전쟁과 경제발전의 저하 등의 복잡한 국내외의 사정들이 작용하면서 형성되었는데, 하루키는 만주파의 득세과정과 베트남전쟁의 영향에 중점을 둔다.


즉 정치•행정•경제 등의 실무능력이 부족한 군인집단 만주파의 득세는 당과 국가과 군대의 일원화를 가져왔고, 그것은 곧 만주파의 항일무장투쟁이 정통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이었고, 김일성의 만주항일무장투쟁은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부상한다. 또 베트남 전쟁에 고무된 김일성은 남조선 혁명을 위한 유격대를 전 국가로 확대하고, 김일성을 사령관으로 하고 전 인민이 유격대가 되는 특유의 국가체제가 만들어진다. 북한의 준전시 국가시스템은 단지 한국 전쟁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루키는 쟁점이 되는 한국전쟁과 북한사회의 성격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서술한다. 이 책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하고,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면서 시작했지만, 이미 남과 북은 모두 전쟁의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군사적 충돌은 만연해 있었다. 또 북한의 정치문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문화와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 기독교와 민족주의와 중국과 소련에서의 다양한 경험으로 형성된 김일성의 특유의 우리 문화, 유격대 구조, 개인숭배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던 가족국가론, 사회정치적 생명론, 전통적 국가론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졌다.


재밌는 것은 김일성 부자의 신화화, 거대 기념물의 건축과 의례 등을 지적하며 극장국가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북한 사회는 전쟁과 혁명을 준비하는 유격대국가이면서, 형식과 의례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극장국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루키는 유격대 국가는 김일성 사후, 개혁의 대상임과 동시에 권력의 기반이라는 이중적 딜레마를 안고 있었고, 이후 만주파를 중심으로 한 정규군국가로 변모했다고 설명한다.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이러한 정규군국가로의 변모를 입증해주는 것이며, 김정일은 당과 국가조직이 약화되고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조직된 권력인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김일성과 만주파, 김정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북한의 정치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이제 북한은 낙원도 지옥도 아닌, 특수한 전개과정을 거쳐 형성된 역사적 존재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한 사회에 대한 이해는 권력의 전개과정에서 설명되지 않는, 그것에 규정되고 제약받은 수많은 개인들의 생존양식과 생활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권력의 전개과정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그 권력에 순응하고 협조하고 저항하면서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생존을 구가한 사람들의 역사를 비가시화한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북한은 절반의 북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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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또노미아 -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 아우또노미아총서 1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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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이 쓴 『아우또노미아』는 포스트맑스주의로 지칭되는 이론가 중의 한 명인 네그리에 대한 해설서이다. 세계 최초로 네그리를 일괄하는 해설서라는 일설에 부합하게도 야심차고 방대하며 현란한 네그리 이론을 분과이론 별로 나누어 정리하는 한편, 해설서가 갖게 마련인 요점정리 위주의 약점을 피하며 네그리 이론의 풍부함과 현란한 수사들도 고스란히 살려내 네그리의 독특함만큼이나 독특한 해설서가 되었다.

 

네그리는 맑스주의의 경제결정론적인 성격을 배격하고 역사적 유물론의 역동성과 계급투쟁을 부각시키며 맑스주의를 혁신한다. 그의 맑스주의는 여타의 포스트맑스주의와 유사하게 현란하고 난해한 개념들을 구사하면서도 시종 현장의 투쟁과 맞닿아 있다. 그는 투쟁을 중심으로, 또 투쟁을 이론화하면서도 독자적인 자본주의론, 정치이론, 윤리학 등을 체계적이고 깊이있게 구축하며 방대한 사상체계를 세운다.

 

어떤 이론이든지 마찬가지이지만, 네그리는 특히 좌파운동사적 맥락, 좌파이론사적 맥락에서만이 이해될 수 있다. 실로 네그리 이론의 탁월함은 기존 좌파이론과 운동의 한계, 맹점을 지적하며 다방면에서 좌파이론을 혁신한 데에 있다. 자율(autonomia)이라 명명된 네그리 이론은 기존의 운동이 관료제(노동조합)와 국가주의(당)로 수렴되거나, 전위와 대중의 이분법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넘어서며, 억압과 착취를 타개하는 다양한 개인들의 자기가치화와 운동 자체로 설명된다.

 

기존 좌파이론들을 비판하는 네그리는 새로운 만큼이나 도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좌파 이론 진영의 집결체라 할 수 있는 맑스꼬뮤날레에서 2년 연속으로 네그리를 쟁점으로 두고 토론을 벌였다는 사실은 지금 네그리가 매우 민감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네그리를 두고 벌어지는 첨예한 논쟁은 네그리의 도발이 일정하게 동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기존 이론의 혁신을 모색하는 네그리의 문제의식은 네그리와 상관없이도 존재해왔으며, 누군가 하고 있고, 해야 했던 일을 네그리는 멋들어지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역설은 활력, 자율 등으로 개념화되며 기존 이론의 경직되고 도식적이며 교조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네그리의 생동감 넘치는 입론이 네그리안들에게는 경전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조정환이 대표적으로 자칭타칭 네그리안들은 정통좌파들이 맑스레닌주의의 체계에 현실을 끼워맞추듯이 하나부터 열까지 네그리 없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의 초국적화 경향과 다양하고 이질적인 주체들이 부각되는 현실에 대한 설명력의 공헌과 성과는 네그리를 모르고는 좌파 행세를 할 수 없다는 속설이 말해주듯이 공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네그리의 한계와 약점에 대한 비판은 자본의 주권화가 노동의 활력화로 전화되듯이, 네그리의 올바름과 완벽함으로 전화된다. 화려한 개념과 수사는 네그리를 편향적으로 옹호하는데 더없이 적합하게 사용된다.

 

그것은 방대하고 야심찬 만큼이나 보편성을 지향하는 네그리 이론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론전개와 계급투쟁의 절합이라는 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그리 이론은 자가발전적이며 자기완결적이다. 네그리는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기 이론을 수정하고 갱신해가지만, 이론적 전제로 현실을 설명하고 그것으로 다시 이론을 강화해나간다. 또 난해하고 현란한 철학적 개념과 수사들은 이론의 관념성을 과시한다.

 

자율과 활력 등의 개념은 개인의 행위 차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구체적이면서, 심도깊은 철학적 논의로 전개되어 추상적이다. 주권과 계획이라는 과거의 기획의 한계에 대한 적확하고 신선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율은 영원하다라는 명제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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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지수 1
옌쩐 지음, 박혜원 외 옮김 / 비봉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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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주의 중국의 개혁개방기 이후의 사회상을 다룬 세태소설이다. 지대위라는 이상주의적 지식인이 이전투구와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세태에 부딪치고, 좌절하고, 적응해가는 줄거리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세태비판소설이면서 세태보고소설이기도 하다. 지대위란 인물을 굴복시키고, 타락시키는 염량세태의 실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그 자체로 현실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지대위가 이상주의자에서 멀어지는 과정 또한 그 현실타당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개혁개방기 중국은 국가가 일원적으로 지배하고, 또 국가로 모든 것이 수렴되는 사회주의 관료제와 자본주의적 시장이 혼재되어 공존한다. 중국인들의 생활은 관료적 조직구조에 따라 결정되고, 위계관계는 시장에 의해 보완되거나, 역전된다. 얼핏 모순적이기도 한 사회주의적 관료제와 시장은 중국인들의 생활수준과 인간관계를 좌우하고,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동물적으로 반응하며 관료제와 시장이 혼합되어 있는 세태에 적응한다.

 

이 책에서 생활수준과 인간관계, 이해관계 등은 사소한 문제들을 누적시키고 마침내는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생존의 과제를 부여한다. 책의 말미에 정리되어 있는 처세훈의 하나인 ‘벌레똥도 계속 쌓이면, 거름 한 통이 된다’는 경구는 실로 다양한 차원에서 압박받는 인간의 조건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엘리트 지식인 지대위는 염량세태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면서 지위하락을 경험한다. 승진에서 밀려나고, 한직으로 쫓겨 가고 등의 명시적인 문제들은 차치하더라도, 사무실에서의 책상배치, 윗사람과의 악수순서, 아파트의 배정, 병원치료, 유치원 입학 등등의 쪼잔한 것이 분명한 일들은 일일이 관료적 위계와 시장이 보완적으로 작동하여 이뤄진다. 그것은 당장에 장모와 한방을 써야하며, 임신한 부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원거리 출퇴근을 계속해야 하며, 화상을 입은 아이가 치료받지 못하는 등의 기본적인 보장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겪는 숱한 모멸감은 자존감을 형편없이 짓밟는다. 그야말로 빗방울이 콘크리트벽의 구멍을 내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공존이라는 현대 중국사회는 적자생존의 경쟁이 펼쳐지는 정글이며, 복마전이다. 관료제와 시장에 의해서 이뤄지는 자원배분은 실상 음모와 협잡이 그 작동원리이며, 사회주의 중국의 이상인 민중주의와 자본주의의 핵심원리인 개인의 능력발휘는 음모와 협잡의 포장에 불과하다. 개혁개방기 중국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은 무차별적이고 절제되지 않는 개인의 이해관계이고, 생존이다. 


하방당해 산촌에서 쓸쓸히 죽어간 아버지를 비롯하여, 공자, 굴원, 두보 등의 옛 성현의 말씀을 아로새기며 살던 지대위는 마침내 염량세태에 항복하게 되고 지대위의 이상주의는 굴절된다. 이름을 남긴 옛 성현은 하나같이 지조를 지키는 대신, 현세의 생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었고, 생존을 위협받는 지대위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지대위는 현실의 압박에 위협받으면서도, 체화된 이상주의를 포기하지 못하고, 순간순간 현실의 치사함과 비정함에 치를 떨지만, 생존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다. 사실 생존의 유혹은 유혹이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다. 인간은 그것에 동물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고, 바로 거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지대위의 타락과 굴복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소상하고 면밀하게 설명되고 있는 이러한 딜레마 덕분이다.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이른 나이에 청장의 지위에 오른 지대위는 종국에 자신을 ‘승리한 실패자이자, 실패한 승리자, 고결한 속물이자 세속적인 군자’로 자임한다. 그는 아버지가 탐독하던 성현의 일생이 담긴 책을 태워버리면서, 현실세계의 진상을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신성함, 궁극, 형이상학적 세계와 결별한다. 그러나 지대위는 생존이야말로 유일한 진실이라면서도, 그 잔혹한 진실에 격파당했다는 아픔을 느낀다. 사명의식과 책임감, 이름을 남기겠다는 것을 허망한 환상, 불가능성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강요된 허무주의로 받아들인다. 끝내 그에게 신념과 절개라는 아버지의 진실은 불살라지면서 신성함을 획득하여 생존이라는 진실과 양립한다. 딜레마는 계속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창랑지수](창랑에 물이 맑으면 갓끈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지)는 굴원의 [어부사]에서 따온 것이다. 일찍이 명망을 얻은 굴원은 정치적 갈등 끝에 유배와 추방을 거듭하며 전락하고, 굴원이 탄 배의 노를 저어주던 어부가 바로 굴원에게 현실의 잔혹한 진상, 혹은 이상주의적 관념의 덧없음을 충고한다. 중국인들의 현실주의는 기원전인 전국시대의 고사로 소급된다. 개혁개방기 중국의 당대사회와 군상들을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려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과 처세라는 키워드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처세라 함은 그 사소한 벌레똥의 문제들을 다루는, 얄팍하고 가식적인 기술로 인식된다. 반면에 거대 형이상학인 철학은 진정성이 듬뿍 배어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사람들과 사귀며 살아가는 것’이란 처세의 사전적 의미가 말해주듯이, 처세와 철학 모두 잘 살기 위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관념만을 먹고 살 수는 없는 존재이고, 물질적인 차원은 물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소하고 작은 문제들에 자존감을 훼손당한다. 생존은 이렇게 다양하고 복합적인 차원에서 이뤄지고, 처세는 오히려 형이상학이 무용한 곳에서 발휘된다. 엄밀히 따지고 들면 일차적인 것은 처세이고, 형이상학은 부차적이며, 벌레똥이 쌓이듯 누적된 처세는 형이상학을 넘어서지만, 거대 관념은 처세에 무력하다.

 

하여 ‘인간관계에 대한 천기누설의 책이자 처세의 비법이 담긴 책’이라는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빈말이 아니다. 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오만군상들의 인간관계는 아무도 발설하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모이는 곳이면, 자잘한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미묘한 권력관계가 발생한다. 사람은 그러한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권력관계로부터의 자유는, 신분제로부터의 자유가 굶어죽을 자유와 등치되는 것과 유사하다. 처세란 사람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을 일컫는 것이고, 결국 인간은 갖가지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처세의 지혜는 그러한 모순을 끌어안는 것에서 발휘된다. 현실의 잔혹함과 이상주의적 관념은 어느 것도 배타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지대위가 도달한 '실패한 승리자, 승리한 실패자, 고결한 속물, 세속적인 군주’는 모순과 긴장으로 헤쳐가야 하는 처세의 한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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