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창백한 말(The pale horse, 1961)

 

 독자들이 입을 모아 보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숨은 걸작'이라는 찬사가 부족할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놀라운 반전이 돋보인다.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은 요한계시록 6장 8절에 나오는 '청황색 말'을 의역한 것으로 작품에서는 영험한 영매임을 자칭하는 세 여인이 사는 저택의 이름이다. 자신이 목격한 일련의 사건들로 이 저택에 의혹을 품게 된 주인공이 탐정 역할을 하는데, 크리스티 여사의 분신이라고 불리는 여류 추리소설가 애리어든 올리버 부인이 등장하여 결정적인 서를 제공하는 장면이 가장 극적이다. 아마 범인이 밝혀지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이럴 수가! 내가 렇게 어리석다니!" 왜냐하면 범인은 처음부터 눈에 뻔히 보이는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독자들은 크리스티 여사의 교묘한 트릭에 그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7. 맥긴티 부인의 죽음(Mrs. McGinty's dead, 1952)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아쉬웠던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피해자와 그를 둘러싼 배경이 주로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은 소위 '중상류층'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다룬 살인사건의 소재가 대부분 막대한 재산을 둘러싼 비정한 싸움이기 때문이겠지만, 인간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가 반드시 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서 작품에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 한구석에 있었다. 이러한 나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준 작품이 바로 이 <맥긴티 부인의 죽음>이다. 이 작품에서 피해자로 등장하는 맥긴티 부인은 시골마을에 사는 환갑이 넘은 파출부인데, 그녀의 사건을 수사했던 런던 경시청의 스펜스 총경이 자신이 잡은 범인이 왠지 살인자가 아닌 것 같다며 에르큘 포와로에게 재수사를 부탁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목격자나 증인 이상의 역할로 등장하지 못했던 파출부가 여기서는 잔혹한 살인마의 정체를 밝히는 열쇠라는 점이 내가 이 작품을 베스트10에 넣은 이유다. 물론 재미도 반전도 앞서 소개했던 작품들에게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8. 비뚤어진 집(Crooked house, 1949)

 

 Ⅰ에서 소개한 <누명>과 함께 애거서 크리스티 자신이 뽑은 베스트10에 속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동요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크리스티 여사는 여기에서도 '비뚤어진 집'이라는 동요를 인용했고 그것을 소설 제목으로 삼았다. 레오니데스라는 성으로 묶인 대가족 내의 가장이 교묘하고도 손쉬운 방법으로 살해당했는데, 피해자의 손녀와 사랑하는 사이인 주인공이 자기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다. 크리스티 여사가 늘 강조하는 살인범의 특징-자만심이 강해서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결국 그 자만심 때문에 실수를 저질러 꼬리를 잡힌다-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범인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타 작품과 달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 통쾌함이 아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자에 대한 연민과 애수가 가슴을 신다. 주인공 찰스의 말대로, 좋아하는 사람이 결핵이나 어떤 치명적인 병을 앓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9.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 1976)

 

 크리스티 여사가 자신이 죽은 뒤에 발표하기로 결심하고 숨겨두었던 야심작 두 편 중 하나인 이 작품에는 그녀의 또 다른 분신인 미스 제인 마플이 등장한다. 누구든 자신이 아는 사람과 비교하여 그 사람의 특징을 간파하기를 좋아하는 이 노처녀는 오랜 인생 경험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많은 살인사건을 해결했는데, 그러한 그녀의 특기가 가장 빛을 발한 작품이 이 <잠자는 살인>이다. 18년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는 만큼 물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누명>처럼 심리적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30년 <목사관 살인사건>에서 80세에 가까운 노처녀 탐정으로 처음 등장한 마플 양은 무려 46년 뒤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도 위험에 처한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층계를 마구 달려 올라올 수 있을 만큼 정정하다. 1970년작 <복수의 여신>에는 류머티즘 때문에 정원 일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떠올리면 옥의 티인가 싶지만 크리스티 여실제로 이 작품을 집필한 시기가 1942년경임을 감안하면 그리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귀중한 생명을 구했으니. ^^

 

 

10. 비둘기 속의 고양이(Cat among the pigeons, 1959)

 

 사촌언니가 물려준 크리스티 시리즈 중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 작품이다. 웬일인지 물려받은 책이 사라져서 다시 사긴 했지만 처음 손에 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영국의 유명한 여학교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내용인데, 뒤에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해서 제자리걸음하던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하지만 그를 중심으로 줄거리가 전개되지는 않는다. 대신 포와로 못지않은 개성을 자랑하는 여성들이 전면에 등장해서 그들의 인생에 난데없이 끼어든 살인사건을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입체적인 구성으로 한 편의 잘 만든 드라마를 시청하는 듯한 느낌이다. 처음 이 작품의 제목을 봤을 때 '비둘기 뱃속에 고양이가 들어 있다는 뜻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여학교라는 비둘기 무리 속에 살인자라는 고양이가 숨어들었다는 의미였다. ㅋㅋㅋ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고, 읽는 횟수가 늘수록 그 전에는 몰랐던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로맨틱 미스터리 기법이 쓰이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 사족 - <끝없는 밤>이라는 작품을 보면 책 어디엔가 '한국전쟁'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주인공의 삼촌인지 숙부인지가 그 전쟁에 참여했다는 대사가 있는데, 그걸 보고선 괜히 반가웠던 기억이 있어서 덧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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