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는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한 이후 꾸준히 좋아해온 작가다. 1890년 9월 15일 영국 데븐 주의 토키에서 태어나 1976년 1월 12일에 타계한 그녀는 장편 66편, 단편집 20권을 발표하며 왕성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필력을 자랑했다. 85세까지 장수했으나 처녀작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0년이니 실제로 활동한 기간은 56년 정도인데, 이 기간도 결코 짧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가 작품 하나를 집필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지를 감안하면 56년 동안 장단편을 합해 200편이 넘는 소설을 써냈다는 건 진정 천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크리스티 여사는 메리 웨스트매컷이라는 필명으로 연애소설과 수필집 등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그녀의 재능이 가장 빛을 발한 분야는 역시 추리물이다. 200편이 넘는 작품의 숫자도 숫자지만 그 작품들의 수준이 모두 평균 이상인 것을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솔직히 200여 편이면 "어? 이거 어디서 써먹은 트릭인데?"라는 말이 나올 법한데 그런 것도 없으니 말이다. 다소 지루하고 끝까지 읽기가 어려운 작품도 여럿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취향 문제이지 작품의 구성이나 스토리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 여사는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새롭고 도전적인 시도를 자주 했으니 간혹 독자의 취향과 맞지 않거나 전작과 너무 동떨어진 작품이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페이퍼의 목적은 엄청나게 많은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재미있고 인상 깊게 읽었던 소설 열 편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또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 작품 수가 너무 많아서 뭘 먼저 읽어야 할지 모르겠는 예비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 무엇보다도 내가 글을 쓰면서 즐거울 것 같다. ^^ 제목처럼 지극히 내 개인적인 취향대로 뽑은 '내 맘대로 베스트'이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이나 독자들이 뽑은 베스트10에 오른 작품들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태클은 사절. 순서는 해문출판사에서 번호를 붙여 출간한 순서이고, 장르가 추리물인 만큼 핵심 스포일러는 나름 센스 있게 피했다.

 

 

 

 

1. 나일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 1937)

 

 거짓말 안 보태고 스무 번은 족히 본 작품이다. 트릭의 교묘함에서 우러나는 재미도 재미지만 작품 자체에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있다. 백만장자인 친구에게 약혼자를 빼앗긴 여자가 복수를 외치며 친구 부부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닌다는 것이 전제된 줄거리로, 장엄하게 펼쳐진 나일강 위에서 세 건의 살인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첫 번째 피해자는 친구의 약혼자를 빼앗아 결혼한 백만장자, 두 번째 피해자는 그 백만장자의 하녀, 세 번째 피해자는 그들을 살해한 범인을 보았다고 주장하던 한 여성 승객.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알리바이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자칭 세계적인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사건을 수사하는데, 추리소설이 다 그렇지만 범인의 정체라는 것이 진짜 뒤통수를 제대로 친다. 아니 어떻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결국 끄덕이게 만들고 마는 뛰어난 구성에 감미로운 러브스토리가 가미된 걸작. 내 개인적으로는 세계 3대 추리소설로 꼽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작품이다.

 

 

2. 푸른열차의 죽음(The mystery of the blue train, 1928)

 

 내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접한 계기는 사촌언니가 물려준 크리스티 시리즈 몇 권이었다. 책장 한켠에서 묵어가던 책들을 어느 날 뽑아서 읽고는 그 마력에 푹 빠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푸른열차의 죽음>이다. 1987년 판으로 세월의 무게만큼 노랗게 변색되었고, 대화체도 '-습니다.'가 아닌 '-읍니다.'이며, 가격은 무려 1500원(!)이지만 좀 닳긴 했어도 찢어지고 떨어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 ^^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차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인 에르큘 포와로가 등장하는 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역자의 말'에 소개되어 있다. 미국 백만장자의 외동딸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도중 살해되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세계 최대의 루비가 사라지는데, 그 기차에 포와로가 타고 있었던 것. 그가 아니었다면 사건은 영영 미스테리로 남았을 것이다.

 

 

3. 누명(Ordeal by innocence, 1958)

 

 한 가정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무죄를 주장하던 작은아들이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서 죽은지 2년만에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증인은 너무 늦긴 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했다고 여겼으나 상황이 생각만큼 잘 해결되지 않는 것을 보고 책임감을 느껴 진범을 추적하게 된다. 그 과정이 스릴과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지루할 수 있으나, 나는 인간 내면의 문제를 깊이 있게 건드린 점을 높이 산다.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이 뽑은 베스트10에 속하기도 하는 이 걸작에는 그녀가 창조한 탐정들 중 누구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건 배경의 특성상 물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오직 인물들의 심리적인 인과에 근거해 진실을 찾아가는 구성이 상당히 무겁다.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이는 68세. 한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이기 때문인지 뒷골이 서늘해지는 트릭보다는 독자의 심금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건드리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인다.

 

 

4. 쥐덫(The blind mice and other stories, 1950)

 

 애거서 크리스티가 1947년 영국 메어리 여왕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집필한 중편 <쥐덫>.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이상한 사건>, <줄자 살인사건>, <모범 하녀> 등 8편의 단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모두 좋은 작품이지만 최고는 역시 <쥐덫>이라고 감히 말하는 바이다. 1952년 11월 25일 런던의 앰배서더스 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진 이래 오늘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되어 최장기 공연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이 작품은 놀랍게도 크리스티가 단 일주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폭설로 인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하숙집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그 때마다 '세 마리의 눈먼 쥐'라는 동요가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작품 말미에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의 스릴과 드라마틱함은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중 최고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나저나 이 책도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것인데 왜 멀쩡한 <푸른열차의 죽음>과 달리 책이 다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ㅜ_ㅜ (결국 새로 샀는데 헌 책을 버리지는 못하겠음. 차마.)

 

 

5.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The seven dials mystery, 1929)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한 또 한 명의 명탐정, 런던 경시청의 배틀 총경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소재가 무척 기발하다. 늦잠꾸러기 제리를 곯려주기 위해 그의 친구들이 자명종을 여덟 개 사다가 침대 머리맡에 늘어놓았는데 다음 날 아침 그가 싸늘하게 식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머리맡의 탁자 위에 두었던 시계들이 일곱 개로 줄어든 채 벽난로 위에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자명종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그것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리는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에르큘 포와로 같은 심리에 대한 번뜩이는 재치도 마플 양처럼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도 없지만 경찰 특유의 우직함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배틀 총경의 활약이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1925년에 발표된 <침니스의 비밀>과 동일한데, 그 때문에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가 <침니스의 비밀>의 속편인 듯한 느낌도 든다. 이런 느낌을 주는 또다른 시리즈 안의 시리즈(?)로는 마플 양이 활약하는 <카리브 해의 비밀>과 <복수의 여신>이 있는데, 속편 같은 구성이긴 해도 각각 독립된 별개의 사건이기 때문에 꼭 발표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 Ⅱ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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