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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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신작 소설. 일본에서 '서점대상 1위', '나오키상 수상' 등등을 받았는지 책 띠지에 이것저것 화려하게 적혀있긴 했지만 사실 나는 그것보다는 국제 피아노 콩쿨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무척 관심이 가서 얼른 샀던 책.


분량은 거의 700쪽 가까이 되어가지만, 놀라울 정도로 금방 읽힌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다 읽는 그런 류의 책이라고나 할까.

만화 '피아노의 숲' 이 생각나기도 하고, 최근에 봤던 일본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 가 떠오르기도 했다. 완벽한 예술에의 갈증을 느끼는 음악인들의 고통은 대리로 체험해보기도 하는. 

콩쿨이 1차 예선, 2차 예선, 3차 예선, 본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수십곡의 클래식 곡이 책이 등장하고, 작가는 그것을 모두 텍스트로 묘사하고 있다. 글자로만 그 곡들을 묘사하려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7년 동안 집요할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완성한 소설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읽을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자세히 줄거리를 나열하지는 않겠다. 다만 어린 소년 가자미 진, 20대의 에이덴 아야,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직장을 하며 콩쿨을 준비한 다카시마 아카시를 비롯한 개성있는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을 텍스트로 흠뻑 음미하시기를.

여기 나오는 곡들이 앞에 친절하게 목록으로 나와 있으니, 곡들을 찾아들으며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희망사항도 있다. (책 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곡들을 수록한 음반도 출시됐다. 내가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여담이지만 내가 평소에 인스타에서 팔로우하던 휘리님의 그림이 표지가 되어 기뻤다. 

공감했던 구절들 몇 줄 이 곳에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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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루는 거대한 건축물의 투시도를 보듯 악보 구석구석까지 눈여겨보았다. 읽을수록 경탄스럽다. 명곡은 눈에 보이는 악보 자체가 '아름답다'. 바라만 봐도 이 곡이 훌륭한 곡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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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결과 '낭만적인' 소리는 다분히 여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빈약한 소리, 힘겨운 소리로는 안 된다. 갓 말린 보드라운 이불처럼 폭신폭신하면서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어야 한다. 실로 연인들의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처럼 '물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물기'를 표현하려면 상당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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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근력이 필요하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한다.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으려면 컵을 쥔 손을 허공에서 딱 멈추고 지탱할 힘이 필요하다. 낭만적인 소리를 내려면 강인한 파워가 필요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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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깨우치는 순간은 계단식이다. 비탈을 느긋하게 올라가듯 깨우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연습해도 제자리걸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여기가 한계인가 절망하는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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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유는 몰라도 느닷없이, 그때까지 연주하지 못했던 부분을 연주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표현할 길 없는 감격과 충격이다. 정말로 어두운 숲을 빠져나가 탁 트인 벌판에 서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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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김보통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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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통 작가의 첫 에세이집,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리뷰를 써달라고 기다리는 5-6권의 책을 제치고 이 책의 리뷰부터 쓴다. 김보통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만자 책을 통해서였다. 지금은 만날 길 없는 어떤 사람에게 선물받아 읽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그려도 만화가 되나?'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가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흘렸던 작품이었다. 어쩌다보니 페이스북에서 그의 일상과 일을 해내는 하루하루를 어렴풋이나마 들여다보게 되었다.

김보통 작가의 말과 그림은 "그래, 좋은 게 좋은거고, 희망적인 방향으로 갈거야." 따위의 어설픈 위로는 절대 해주지 않는다. 실제로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늘 최악을 각오하고 있는 듯한 담담함, 체념이 아닌 초연함이 느껴져서 그가 살아온 발자욱이 궁금했던 터였다.

이 책에,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책 표지에 보면 '온 힘을 다해 그 길에서 도망친 퇴사자 김보통의 비범한 방황기' 라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이만한 돈 주는 데가 어딨다고, 버텨보자." 라고 했던 내가 꼰대였구나- 바로 고개를 떨어뜨릴 수 밖에 없었다.

김보통 작가는 글에 어떠한 멋도 부리지 않기 때문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읽혀 나간다. 말 그대로 길쭉한 한 호흡에 훅, 읽힌다. 그 가운데 가끔 숨이 턱, 막히고 한숨이 폭, 나올 때가 있다. 그렇다면 글밭에서 쉬어갈 고개가 맞다. 작가도 거기까지 쓰고 가슴도 한 번 쓸어내리고 숨도 한 번 쉬었다는 것일거다.

생활비가 없어 식비를 줄이고, 줄이다 존엄을 내려놓게 되었던 그가 다시 존엄을 찾기 위해 브라우니를 굽기 시작했다는 말은 좀 아프기도 하고, 지금 와서 읽는 우리로서는 사랑스럽고 좀 고맙다.

가슴 쓰리거나 속이 시원했던 밑줄 친 몇 구절만 이 곳에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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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저녁 6시에 시작한 회의가 밤 12시에 끝났다. 장장 여섯 시간에 걸친 회의중에 내 옆자리에 앉은 과장은 고개를 돌린 채 울었다.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다. 뭔가를 끄적이는 척하고 있던 다이어리 위로 눈믈이 떨어지고, 그것을 손으로 쓰윽 닦아내는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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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30여 년간 박수를 치느라 몸과 마음은 너덜거리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나는 '다음' 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의도와 보상 없이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나가기 위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암환자 박과장은) 나름대로 힘차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요양해야 할 사람으로만 보였다. "야. 박과장. 무슨 말이 그렇게 기냐. 암이라는 거 오진 아니냐?" 누군가 말하자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내가 가진 몇 장의 카드로 승부를 내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가진 카드가 뭔지 나도 몰라. 알려면 뒤집어야 하는데, 뒤집으면 게임의 승패가 그대로 결정나. 그게 아아아주 괴로워."



"그때 문득 '그러면 된 거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고난과 시련과 역경과 패배를 겪고, 와중에 스픔과 고통과 분노와 증오의 나날들이 닥쳐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그리고 자기비하로 보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면 그걸로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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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목욕탕과 술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지식여행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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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더워서 거실에 있기도 힘들었던 한여름에 스파클링 애플 사이더랑 같이 펴들었던 책.

내 방에 와서 맨 바닥에 베개 하나 배고 누워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재연씨와 처음으로 위트 앤 시니컬 책방에서 만나서 서로 책을 사주던 그 날 나는 재연씨에게 김하나 카피라이터의 '힘 빼기의 기술'을 선물했고, 나는 '낮의 목욕탕과 술' 을 선물받았다.

목욕탕과 술을 유난히 애정하는 일본 아재의 애호기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된다. 그의 솔직한 탄성들이 나를 비롯한 독자들을 순수하게 즐겁게 한다. 저자인 구스미 마사유키 (다니구치 지로와 '고독한 미식가'를 공동작업한 사람이다.) 는 목욕을 개운하게 끝내고 나와서 들이키는 맥주를 이 세상에서 비교할 바 없이 가장 천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굵은 색연필로 동그란 탕에 누워 있는 노인을 그린 그의 일러스트도 맘에 쏙 들었다. 

흐느적하지만 예리한, 지금을 못 누릴거면 생은 의미가 없다는 식의 표현들 이 곳에 좀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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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맛있어. 나는 지금, 온몸으로 맥주를 받아들이고 영혼을 다 바쳐서 맞아들인다. 사랑, 그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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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맥주는 내 몸 안으로 무혈입성을 달성했다. 나의 모든 세포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며 열광한다. 다시 한 모금, 쭈욱 들이킨다. 황금빛 액체가 목을 치달려 내려간다. 이미 길은 닦였다. 취기라는 아련한 벚꽃색 공기가 머리 쪽으로 출렁 흐르기 시작한다. 행복하다. 이것을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한 인생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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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자!" 무슨 일이든 다 단칼에 내팽개치고 한낮부터 목욕을 즐기기로 한다. 이렇게 통쾌한 일도 없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러느냐 하면 이건 아주 한정된 사람들만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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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개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개점 기념 런치 서비스라는 게 있었다. 생맥주를 두 잔 이상 마시면 한 잔은 공짜라는 것이다. 그 정보를 들은 시점에서 두 잔 이상 마시는 건 암묵적으로 합의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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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살면
이노우에 히사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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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1인 출판사 정은문고의 최신작, '아버지와 살면' 이다. 이노우에 히사시의 희곡집이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3년 후가 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아버지인 다케조, 딸인 미쓰에만이 등장한다.

일단 작가의 서문을 인용해보겠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야기를 꺼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까지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셈인가. 그즈음 일본인은 아시아의 가해자이기도 했어." 가해자였다는 의견은 분명 옳다.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인은 가해자였다. 하지만 피해 의식 운운하는 의견에는 "그건 아니오!" 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그 두 발의 원자폭탄은 일본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에 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그 수소폭탄의 위력이 히로시마 폭탄의 5-6배라는 기사를 읽고, 가슴에 착잡해진 상황에서 이 책의 리뷰를 올리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지, 의도는 아니었다.

그 기사를 읽은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 명, 한 지역에 닥친 재앙은 인류 모두의 재앙이 정말 맞다.

아주 작고 얇은 책, 단숨에 훅 읽을 수 있지만 가슴이 묵직해지는 작품이다. 읽다보면 얕은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읽던 책장에 잠시 손을 껴두고 흑흑 울게도 된다. 희곡의 일부를 옮겨 적을까 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희곡의 흐름 안에서 여러분들이 꼬옥 읽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고. 일본에서 수없이 많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고 하는데, 나도 직접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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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 양양 에세이
양양 지음 / 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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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양양의 에세이집.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이대 근처에 있는 음악서점 '초원서점' 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아, 양양!" 했었다. 그땐 다른 책을 구입했고, 시간이 좀 지나 이 책을 사서 읽었다. 양양을 떠올리면 약간 허스키한 따스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젊은 장필순같은 목소리랄까. '봄봄' 이라는 곡을 가장 좋아하는데 지금은 가을이네. 지금 들어도 상관은 없지만 그 계절에 들어야 뮤지션의 의도를 가장 살릴 수 있으니까 내년 봄까지 참을 예정이다. 

양양의 어마무시한 매력은 바로 이거다. 타인의 쓸쓸함을 발견할 줄 알고 그 쓸쓸함 안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잘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저런 곡들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이런 글들을 쓰는구나. 참 담백하고 결이 거친 통밀쿠키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네. 시즈닝도 안 되어 있고, 색도 일부러 하얗게 만들지 않고 정제 밀가루같은 걸로 굽지도 않은 쿠키. 자꾸 자꾸 먹고 싶어서 손이 가는 그런 과자처럼 말이다. 게다가 먹으면 몸에 좋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먼저 양양의 곡들을 듣고, 그 다음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그런 뒤, 기회가 닿는다면 공연을 함께 보러 가면 좋겠다. 

아깐 위에서 가을이니 '봄봄' 을 듣지 않겠다고 했다. 근데 난 지금 '봄봄' 을 듣고 있다. 좋은 데 어떡하란 말이냐.

그녀의 성숙하고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 몇 개 이 곳에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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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옷자락을 바라만 봐도 이제 나는 그 세월의 냄새를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체취, 정정당당한 냄새. 그 냄새를 가진 나도 익제 거기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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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은 아주 작거나 예상할 수 없는 것들과 어울린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참새와 같다고 하면 어떨까.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저 한 그루 나무 같겠지만 그 나무 속에 얼마나 많은 새들이 앉아 있는지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이렇게 한가로우며 풍요로운 우리는, 청춘이다. 나는 내가, 우리가 이렇게 누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의 하늘과 멈춘 이 시간이 더없이 애틋하다. 제각각의 구름들, 흘러가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잊지못할 한 점 속에 우리가 있다. 어김없는 하늘과 어김없는 바람, 언제나 어김없는 것들 속에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간다. 머물다 가는 먼지여도 이런 순간은 황홀하다."



"언제 어느 때 눈물이 나는지는 여전히, 그리고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나무 아래 앉았는데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 바람에 날릴 때, 비행기가 힘껏 돋움을 하여 이륙하는 순간에, 새벽녘, 혼잡한 지하철역 사이를 걸어가는 앞사람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볼 때, 낯선 길 위에서 오랜만에 그 음악을 들을 때, 영화 속에서 아빠와 아들이 탁구를 칠 때, 낡은 우체통이 거기 있을 때, 화가가 뿌려놓은 파란 물감 앞에서, 깊은 밤 내 마음 같은 문장 하나를 만났을 때, 뭉툭한 것에 찔렸을 때, 차가운 것에 데었을 때, 뜨거운 것에 얼어붙었을 때, 구름은 흘러가고 어딘가에서 누군가 울고 있을 때, 개미가 제 몸통보다 큰 부스러기를 이고 갈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봄꽃 향기는 여전히 아찔할 때, 사람이 예쁘게 웃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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