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에서 조선으로 올 때면 늘 밤을 새삼스럽게 느끼곤 하였다. 저기도 주야가 있지만 전등 없는 정거장을 지나보지 못하다가 부산을 떠나서부터는 가끔 불시정차하듯 캄캄한 곳에 차가 서기 때문이다. 무슨 고장인가 하고 내다보면 박쥐처럼 오락가락하는 역원들이 있고 한참 둘러보면 어느 끝에고 깜박깜박하는 남폿불도 보인다. (밤)-13쪽
파초는 언제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珠簾 안에 누웠으되 듣는 이의 마음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 (파초)-28쪽
정말 파초가 꽃이 피면 열대지방과 달라 한 번 말랐다가는 다시 소생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마당에서, 아니 내 방 미닫이 앞에서 나와 두 여름을 났고 이제 그 발육이 절정에 올라 꽃이 핀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가 한 번 꽃을 피웠으니 죽은들 어떠리! (파초)-30쪽
한참 쳐다보노라면 성벽에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도, 성돌 하나하나 사이도 빤히 드러난다. 내 칫솔은 내 이를 닦다가 성돌 틈을 닦다가 하는 착각에 더러 놀란다. (성)-40쪽
미닫이를 아이 때는 종이로만 바르지 않았다. 녹비鹿皮 끈 손잡이 옆에 과꽃과 국화와 맨드라미 잎을 뜯어다 꽃모양으로 둘러놓고 될 수 있는 대로 투명한 백지로 바르던 생각이 난다. 달이나 썩 밝은 밤이면 밤에도 우련히 붉어지는 미닫이의 꽃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긴 가을밤 꿈의 실마리를 삼는 수도 없지 않았다. (가을꽃)-43쪽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 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꽃과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 나와 국화뿐이려니 하면 귀뚜리란 놈이 화분에 묻어 들어왔다가 울어대는 것도 싫지는 않다. (가을꽃)-45쪽
인생의 외로움은 아내가 없는 데, 아기가 없는 데 그치는 것일까. 아내와 아기가 옆에 있되 멀리 친구를 생각하는 것도 인생의 외로움이요, 오래 그리던 친구를 만났으되 그 친구가 도리어 귀찮음도 인생의 외로움일 것이다. (고독)-49쪽
독자는 여러 가지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지 가지로 요구한다. 나를 즐겁게 해 달라 나를 슬프게 해 달라 나를 감동시켜 달라 나에게 공상을 일으켜 달라 나를 포복절도케 하여 달라 나를 전율케 하여 달라 나를 사색하게 하여 달라 나를 위로해 달라 그리고 소수의 독자만이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것을 지어달라 할 것이다. 우리 예술가는 최호의 요구, 이 독자의 요구를 들어 시험하기에 노력해야 한다. by 모파상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66쪽
평자들이 소설에 대한 준비지식으로 읽은 이론을 하물며 작자들이 안 읽을 리 없다. 그만 교양은 작자에게도 있으려니 여겨 마땅하거늘 너희가 어디서 이런 방법론이나 이론을 보았겠느냐는 듯이 사뭇 소설작법식으로 덤비는 평가評家가 더러 있다. 나는 우리 작가들에게 말한다. 평가자에게서 비로소 작법이나 방법론을 배워가지고 소설을 쓰려는 그 따위 게으르고 무지한 자라면 빨리 작가의 위치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이론은 알되 이론대로 못 되는 것도 작품이요, 이론의 표본적인 작품일수록 좋은 작품이 아닌 경우도 더 많기 때문에 고의로 이론을 무시해야 되는 것도 소설이다. (...) 이론의 등대가 미치지 못하는 더 멀고 깊은 바다에서 천파만파와 싸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미 그들도 읽고 난 유행 사조나 방법론 따위를 좀 읽어가지고 그들의 힘들여 쓴 작품을 가벼운 논리만으로 정리해 버리려는데 어째서 분노가 없을 것인가? (평론가)-70~71쪽
십분심사일분어十分心思一分語(마음에 품은 뜻은 많으나 말로는 그 십분의 일밖에 표현 못한다)란, 품은 사랑은 가슴이 벅차건만 다 말 못 하는 정경을 가리킴인 듯하다. (일분어)-95쪽
저는 목수라 치목治木하는 예를 들어 아뢰오리다. 톱질을 해보더라도 느리게 다리면 엇먹고 급하게 다리면 톱이 박혀 내려가질 않습니다. 그래 너무 느리지도 너무 급하지도 않게 다리는 데 묘리妙理가 있습니다만, 그건 손이 익고 마음에 통해서 저만 알고 그렇게 할 뿐이지 말로 형용해 남에게 그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마 옛적 어른들께서도 정말 전해주고 싶은 것은 모두 이러해서 품은 채 죽은 줄 아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갑께서 읽으시는 책도 옛 사람의 찌꺼기쯤으로 불러 과언이 아닐까 하옵니다. 환공이 물론 턱을 끄덕였으리라 믿거니와 설화나 문장이나 그것들이 한 묘妙의 경지의 것을 발표하는 기구로는 너무 무능한 것임을 요새 와 점점 절실하게 느끼는 바다. (일분어)-97쪽
경승지에 가려면 문헌부터 뒤지는, 극히 독자獨自의 감각력엔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조그만 학문과 고고考古의 사무가일 뿐, 빛나는 생명의 예술가는 아니다. (자연과 문헌)-99쪽
'내 문장'을 쓰기보다는 될 수만 있으면 '그 작품의 문장'을 써보고 싶다. 우선은 '그 장면의 문장'부터 써보려 한다. (명제 기타 - 문장)-109쪽
문학은 <전쟁과 평화> 같은 것은 그 하나만 가지고도 여러 주야를 씨름해야 한다. 그런 글, 그런 문학이면서도 이 스피드 시대에 그냥 엄연한 존재를 갖는 것은 이상스러울 만한 일이 아닌가. (남의 글)-112쪽
벌써 8, 9년 전 동경에 있을 때 나는 2, 3년 동안 여러 질의 학질을 앓아보았는데 나의 체험으로는 어느 병보다도 통쾌스러운, 일종의 스포츠미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떨리기 시작할 때의 그 아슬아슬함이란 적이 만루가 되고 우리 투수가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인 경우다. 그때 따스한 자리를 만나 이불을 푹 덮는 맛이란 어느 어버이의 품이 그리도 아늑하고 편안하고 또 그렇게도 다른 욕망이 눈곱만치도 없게 해줄 것인가! 그러다가도 그 소낙비 같은 변조와 정열! 더구나 그 열이 또한 급행열차와 같이 지나가버린 뒤의 밤중의 적막, 연정처럼 비등沸騰하고 연정처럼 냉각하고 연정처럼 고독한 것이 '미스 말라리아'다! 그의 스피도, 그 스피드로 냉각지대와 염열지대의 비행. 그리고 나중의 빈그라운드와도 같은 적막, 이것은 병을 앓았으되 한 연정과, 한 스포츠를 게임하고 난 것과도 흡사하다. (병후)-118~119쪽
겨울이 너무 차다는 것은 우리의 체온이 너무 뜨거운 때문, 우리 역시 상설霜雪이나 매화같을 양이면 겨울이 더워선들 어찌하랴. (매화)-136쪽
가장 즐거운 것은 천진하게 마음 속에서부터 이쪽을 신뢰하며 쏠리도록 내어미는 어린이의 손이다. 이것은 마치 동물의 앞발과 같아 전적으로 친애의 표시기 때문이다. (인사)-16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