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법에 관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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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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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권의 창작노트
문순태 외 / 창 / 199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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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기의 첫 걸음
최인석 지음 / 북하우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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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쓰기의 이론과 실제
조건상 지음 / 집문당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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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구판절판


society라는 말은 매우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첫째 society에 해당하는 말이 일본어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은 일본에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이 없었다는 것과 같다.-14쪽

즉 일본에는 원래 society에 상당하는 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사회'라는 번역어가 생겨나자, 번역자는 society 하면 '사회'라고 기계적으로 치환하면서 마치 그 뜻에 대해 책임을 면제받기라도 한 듯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20쪽

뜻이 결핍되어 있기에 남용되는 번역어

번역어는 이렇게 뜻이 결핍돼 있는데도 막연히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를 지닌다고 여겨지면서 한때 왕성하게 남용되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말에 뜻이 결핍돼 있으면 그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더욱 자주 사용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 그리고 말은 일단 만들어지면 뜻이 결핍된 말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뜻은 당연히 거기 있을 것으로 취급된다. 사용하는 당사자는 잘 몰라도 말 자체가 심원한 뜻을 본래 갖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남용되어 다른 말과 구체적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용되는 것이다.-31-34쪽

'일개인'이나 '개인'이란 번역어가 등장한 것은 오히려 원어 individual이 전하는 뜻을 번역하기를 포기하고 '에이카지텐'에 기대어 한자 조어로 도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현실에 대응하는 의미가 결핍된 어색한 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8쪽

자네는 지금 일본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같은 입으로 이미 적당한 말로 원자를 번역하지 않았는가. 자네가 말하는 바와 같이 '맞춘다'는 말, 그것이 이미 자연스러운 일본어로서 흠잡을 데 없는 역자(번역어)라네. 나라면 곧장 그 원자를 '맞춘다'라고 번역하겠네. 자네와 같은 이들은 서양 원서를 번역하는 데 한결같이 네모난 문자(한자를 뜻함)만 사용하려 하는데 그것은 어째서인가? -후쿠자와 유키치-45-46쪽

일본에서 한자가 지니는 이러한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함을 이르는 말로,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이다. '사회'와 '개인'은 예전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이 '카세트 효과'를 갖는 말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47쪽

여기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보기 드물게 '네모난 문자'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앞서 나온 메더스트의 <<에이카지텐>>에서 사용된 번역어를 빌려온 것일 터이다.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때까지 한사코 한자 표현을 피하고자 했는데, 왜 여기서 방향을 바꾼 것일까? 그것은 그의 사고가 여기서 가로박혀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 individual에 녹아 있는 사상과 일본의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49-50쪽

하나의 말에 좋다, 나쁘다 식으로 색깔이나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일본에서의 번역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이처럼 말에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식으로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말이 인간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가 '혼란'이며 '지옥'이라고 단정짓는 사람은 '근대'라는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쁠 것이며, 다른 한편 '매우 위대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꾸로 그 이름만 들어도 희망에 부풀 것이다. 사람이 어떤 말을 미워하거나 동경하거나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말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어떤 말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만큼 그 사람은 그 말에 휘둘린다.-55쪽

번역어 성립의 역사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번역어를 단지 말의 무제로만 보고 사전적인 의미만을 쫓기보다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보고 싶고, 문화적인 요소로서의 의미를 추구하고 싶다. 특히 말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고 있는지가 관심사다.-56쪽

번역어 '근대'는 modern의 번역어인 이상, 그 성립 무렵부터 '역사의 시대 구분의 하나'라는 식의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그것은 번역어 '근대'의 겉으로 드러난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즉, 번역어 '근대'에는 시대 구분이라는 뜻과도 다르고 전래된 한어가 지니는 뜻과도 다른, 소위 또 하나의 안의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인용한 의견과 같이 '지옥'이거나 반대로 '매우 위대한 듯'하거나 하는 '근대'가 그렇다. 번역어 '근대'의 의미가 '역사의 시대 구분의 하나'일 뿐이라면, 거기에는 좋다도 싫다도 없을 것이다. 증어하거나 동경하거나 하는 '근대', 가치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근대', 그것은 결국 번역어 '근대'가 안에 품고 있는 안의 의미의 발현인 셈이다. -61쪽

모든 유행어가 그러하듯이, '근대'도 또한 그 유행의 와중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특별한 뉘앙스'이고 어떤 언어 행동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효과'이다.-69쪽

말의 의미가 이 정도로 다의적인 것은 본래 그 말에는 의미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결핍돼 있기에 유행하고 남용되고, 그리고 유행하고 남용되기 때문에 다의적인 말이 된다. -71쪽

유행은 우선 '연애'라는 말의 유행에서 출발하였다. 그 다음에는 이 말에 의해 용기를 얻게 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드디어 '연애'라는 행위로서 유행하게 되었다. -103쪽

이리하여 관념으로서 순화된 '연애'는 당연히 일본의 전통이나 현실 안에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워져간다. 따라서 '연애'는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 밖에 서서 일본의 현실을 재단하는 규범이 되어간다. 이것은 일본에서 번역어가 걸어가는 숙명이다.-107쪽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 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 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령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 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금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 철학의 기본적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123쪽

right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이므로 구체적인 운동은 짓밟혔다 해도 사람들의 정신 속에 남아 이어질 수 있다. 자연법이나 자연권의 서구의 역사는 그것을 얘기해주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민권 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일본인들에게 비교적 쉽게 이해됐던 '권'은 right라기보다는 오히려 힘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역어 '권'의 역사와 함께 right의 의미도 또한 차차 이해해간 것 역시 사실이다. 즉 사람들은 새롭게 출현한 '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거기에 내포돼 있던 미지의 right 개념을 조금씩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외래 문화 수용의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했다.-166쪽

당시 이 '자유'라는 말은 하나의 유행어로서 사람들은 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아무 데나 쓰는 형편이었다. 의미를 잘 모르는 말이기에 더욱 유행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반벅하여 서술했듯이 번역어의 특유한 '효과' 탓이다.-168쪽

우리는 '자유'라는 말은 바르게 이해하면 좋은 뜻이 되고 잘못 이해하면 나쁜 뜻이 된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해의 방법이 아니다. 모국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역사 깊은 말은 '오인'될 리 없다. 따라서 '오인'된 '자유'는 번역어 '자유'이다.-169쪽

일반적으로 어떤 번역어가 선택되고 남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자의 뜻으로 보아 가장 적절한 말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 번역어는 모국어의 문맥 속에 들어온 이질적인 태생의, 이질적인 뜻의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이질성이 그냥 남아 있는 것, 즉 어딘가 잘 모르는 구석이 있다든가, 어감이 어딘가 어긋난다든가 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 낫다. -177쪽

번역 일본 글이나 번역조의 일본 글에 '彼'와 같은 주어가 많아졌긴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공백이었던 곳에" "충전"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언어 체계에 '공백'은 없다. 그것은 단지 서구 문장을 모델로 했을 경우에 일본 글쪽에 결여된 '공백'이 있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 글이 변화를 하고 사람들이 그것에 익숙해진 다음 뒤를 돌아보고 예전에 거기 '공백'이 있었다고 느끼는 데 지나지 않는다. -190쪽

문어와 구어의 차이가 생기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이질적인 문화의 만남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번역어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번역어가 그러한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효과를 갖고 있는 것은 그 말을 번역한 나라보다 더 강한, 지배적 위치에 있는 국가의 문화로부터 번역된 말들이다. 문어는 그래서 지배 종속, 계급 따위의 이미지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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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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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내가 오규 소라이가 탁월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점입니다. 중국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적어도 일본의 지식계급은 한문(漢文)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중국 고전을 완전히 자기 교양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 선언은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지요. 모두 '앗'하고 놀랐으니까요.-30-31쪽

가토| 지금도 인도가 안고 있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계급간의 깊은 골이지요. 그 첫번째 요인은 경제적 격차이고, 두번째 요인이 언어입니다. (...) 인도에서는 어떤 지역에도 통하고 어떤 계급에도 통하는 언어가 없었죠.-50쪽

가토| 중국에서는 소설, 곧 지어낸 이야기는 거의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요시카와 씨 말입니다만, 사실을 존중하는, 공상보다 진정한 이야기가 '문학'(文學)이라고 합니다. 경서는 규범이지요. 실제 인간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이야기는, 어쨌든 중국에서는 소설이 인정받지 못하니까, 결국 역사라고 하는 식이 되는 거지요. 아니면 역사 이야기 같은 게 됩니다. -75쪽

공자의 경우에는 '인'(仁)뿐입니다. '인의'(仁義)라는 말로 '인'과 '의'를 병칭하게 된 것은 맹자 때부터지요. 맹자는 '사단',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설명할 때, 예컨대 "측은지심은 인의 단이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그리 되자 다른 세 가지도 갖추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래서 '인''의''예''지'를 각각 맞추게 되자 '인의'에서 '인의예지'가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 '인의예지신'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맹자가 일반적으로 병칭한 것은 '인의'입니다. 사단과 관련될 때만 '인의예지'가 되죠. 한대(漢代)에 '신'이 추가되어 오상(五常)이 나옵니다. 마치 공자 때부터 '인의예지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자는 '인의'라는 병칭조차도 언급하지 않았고 '인'밖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소라이가 장황하리만큼 말하는 부분입니다.-81쪽

마루야마| 슌다이는 훨씬 더 철저합니다. 그는 소라이가 주장한 것에 대해서, 소라이였다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파고 드니까 말입니다. 결국 소라이학의 평판이 나빠지게 된 데에는 슌다이에게 책임이 있다고나 할까, 결국 슌다이가 논리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인 셈이죠.
가토| 역시 '번역'이기 때문일까요? 선생보다 제자 쪽이 더 급진적이군요.(웃음)-99쪽

마루야마| 법률과 윤리의 혼동도 심합니다. 유교사상이죠. 다키가와 유키토키 씨의 <<형법독본>>(1932)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 또 아내의 간통죄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 두 가지가 걸려서였습니다. 간통죄를 폐지하자니 무슨 말인가, 간통을 장려하자는 건가라는 반발이었죠. (...) 다키가와 씨의 주장은 간통한 아내를 투옥한다고 해서 부부관계가 원상회복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 해석은 사회에 맡기고 법률은 간섭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법률과 도덕을 혼동해서 그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134-135쪽

마루야마| 일본에서 자연과학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보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진화론은 사회유기체설과 결합해서 국체론의 기초를 만들게 됩니다.-153쪽

후쿠자와의 과학관을 살펴보면, 메이지 시기 일본인의 전통적인 사유구조에서 생물학보다도 뉴턴적인 수학적 물리학의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다>>에 나오는 이학사 간게쓰 군이 그렇습니다. 그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에게서 충격을 받지요. 생물학이라는 것은 상대가 유기체잖아요. 주자학의 경우에도 이토 진사이를 비롯해서 천지는 거대한 생기라는 식으로 '기'를 우위에 두죠. '리'가 아니라 말입니다. 움직이는 물(物)이니까 큰 유기체다라는 관념이 전통적으로 있었던 겁니다. 사농공상이라는 지배 기반도 에도 중기부터는 유기체의 구조와 동일시하고 있죠. 세포처럼 상호의존적인 것으로요. 따라서 생물학적인 모델 쪽은 수용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전혀 무기적인 자연, 뉴턴 역학의 자연은 일본의 자연관에 없던 거였어요. 주관과 객관을 완전히 대립시켜서 모든 의미성이나 가치성을 박탈하고 보는 시각이 일본사상사에는 불교에도 유교에도 없었지요. 신도(神道)에는 더더욱 없고요.-155쪽

마루야마| 번역의 문제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소개가 빠르다는 겁니다. 메이지 10년대에 벌써 번역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후진국의 조숙성이랄까요? (...) 그래서 정부 쪽도 노동자 계급이나 노동운동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조숙하게 예방책을 강구하는 대응이 나오죠.-164-166쪽

일본은 적어도 1870년대까지는 한역 양서와 그 어휘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어에서 한자가 '피해갈 수 없는 타자'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근대 초기까지 정보의 원천으로서도 중국산 지식의 헤게모니는 아직 상실되지 않았던 것이다. -223-224쪽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관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trile-translated modernity)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동아시아의 기호학적 공간 속에서 한국의 근대를 온전히 복원해 내려는 지적 작업은 우선 '여러 갈래 길'로 나뉜 번역의 행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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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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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는 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적 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저항'을 무력화하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77쪽

수염을 기르긴 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기도 일본에 한번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주한미군의 병사로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제대를 앞두고 휴가를 이용해 며칠간 도쿄와 가마쿠라 주변을 관광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는 훌륭하다, 나는 선(禪)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천진한 질문을 받는 아이러니컬한 입장이 된 것이다. 상대에게 악의가 없는 만큼 더 곤란하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대답하려고 하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의 개념 정의에서부터 국민국가론에 이르는 거창한 논의를 전개해야만 한다. 상대방이 기대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날씨를 화제 삼아 던지는 인사말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그른 인식을 줄 것 같고 나 자신이 불성실한 듯한 일종의 전도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86쪽

갈라진 유리잔 거스러미같이 거친 자의식-128쪽

우리는 대부분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이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런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기원한 납염이 그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고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곧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사실 근대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온 것이다.-158쪽

갈고리가 손을 뒤로 해 묶은 끈의 매듭에 걸리고 사슬로 끌어올려져, 바닥에서 1미터 높이의 공중에 매달린다. (......) 양쪽 어깨가 부서져 튄 것 같다. 그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프라이팬에서 공이 튀어나오듯이 양쪽 어깨 관절이 탈구되면서 나는 허공에서 떨어졌다. 어깨에서 뽑혀나간, 뒤로 묶인 손이 여전히 줄에 매달려 머리 위에서 비비 꼬였다. 고문torture은 '탈구시키다, 어긋나게 비틀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quere'에서 유래했다. 실로 경탄할 만한 언어적 명찰明察-168쪽

프랑스어로 소위 '불법체류자'를 가리켜 '상빠삐에' sans papier라고 한다. '종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종이와 스탬프가 없이는 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온갖 종이, 온갖 스탬프가 21세기로 접어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인간의 존엄에 상처를 주고 있는가.-197쪽

평화라고밖에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건만 때때로 나에겐 그것이 코른골트의 음악처럼 휘어지고 뒤틀려 보이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의 즐거운 듯한 이야기 소리가 금속성의 잡음처럼 귀를 찌를 때가 있다. 맥락도 없이 멍하니 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여기서 장 아메리는 자살했다.' 오늘 밤도 누군가가 향락적인 오페라를 만끽한 후 가볍게 와인이라도 마시고 기분 좋게 방으로 돌아가 갑자기 목을 매는 것이 아닐까?-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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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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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라울 힐버그(Raoul Hillberg)는 자신의 노작 <<유럽 유대인의 절멸>>에서 나찌 독일에 의한 유럽 유대인의 절멸정책은 역사상 전례가 없으며 그 규모와 형태에서 그때까지 비교 가능한 예가 없다고 하면서도, 그 전제조건으로 유럽 기독교 사회의 전통적인 반유대 사상이 수행한 역할을 중시한다. 그는 "나찌 지배 12년간 일어난 일 중 대부분은 이미 과거에 발생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찌의 절멸 행위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순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71~72쪽

차바퀴가 돌고 생명이 증식하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알다시피 경지가 비옥하길 바란다면 그 불순물이 필요하다. 불일치나 서로의 차이가, 또 소금이나 겨자씨가 필요하다. 파시즘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금하고 있다. 때문에 너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파시즘은 모두 동일하기를 바라지만 너는 동일하지 않다. - 쁘리모 레비, <아연>-85쪽

특정한 인간 집단에 대한 이 특이하고 철저한 절멸정책은 오늘날 주로 '홀로코스트'라 불린다. 그 어원은 구약성서에 기술된 "구워서 신전에 바치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라고 한다.-107쪽

되돌아보니 바로 그 시기에 나는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를 읽고 있었다. 병실에서 어머니를 간병할 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쁘리모 레비가 증언하는 역유토피아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한밤중에 어두운 병실에서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는 가슴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물음을 되뇌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137쪽

나에게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쁘게 움직이게 만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딘가 흘러 있을 빵조각을 발견하는 것, 육체를 소모하는 일을 피하는 것, 구두를 수선하는 것, 빗자루를 훔치는 것 혹은 나를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과 몸짓의 의미를 읽는 것 등.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그리고 그것은 수용소에서만의 일이 아니다.-162쪽

모두 희생자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무기력과 굴종의 두터운 방벽을 뚫고서 각자가 아직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핵심을 뒤흔들어놓았다.

"동지 여러분, 내가 마지막이다"

비굴한 우리 무리 안에서 누군가의 한마디가, 수군거림이,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할 수 잇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 채 회색의 모습으로 그저 서 있었다.-176쪽

더욱더 현실적인 것은 자기 고발 혹은 인간적인 연대에서 실격되었다는 고발일 것이다. 거의 모든 생존자는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에 소홀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있다. 자신보다 더 연약하고 교활하지 못하며 더 늙고 혹은 너무 어린 그들이 곁에서 항상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 수용소의 일상이다. 연대를, 인간다운 말을, 조언을, 그저 얘기를 들어줄 귀를. 그런 요구는 항상 어디서나 있었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너희는 타자를 대신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수치스러운가? 게다가 자신보다 마음이 넓고 섬세하며, 유용하고, 현명하며,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 "누구나가 그 형제들에게 카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웃의 장소를 빼앗아 그를 대신해서 살고 있다. 이런 의혹은 우리를 좀먹고, 우리 안에 깊숙이 기생한다. 가령 그것이 겉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를 좀먹고 초조하게 만든다.-177~178쪽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 (......) '그들은' 아는지,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일상의 조용한 학살에 대해서, 자신의 집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을.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교회 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의 혹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배워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그것도 모든 것을 지금 곧. 나는 내 팔뚝에 새겨진 번호가 찢어진 상처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쁘리모 레비, <<휴전>>-199쪽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한국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둥 친한 친구 중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둥 자신은 '재일일본인'이라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좀 있으면 '도대체 언제까지 사죄하면 되는 걸까요?'라는 흔한 질문을 슬쩍 던져본다. 그리고 이쪽이 무언가 말하려 하기 전에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미래지향'적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소(空疎)한 키워드를 늘어놓는다.-207쪽

어쩌면 그런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일, 이해해서는 안될 일이리라.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인정한다'와 닮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의 의도나 행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 보아도 그 행위나 의도를 포함하며, 그 실행자를 포함하고, 자신을 그 위치에 두고 그 실행자와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230쪽

길을 잘못 들어 매우 차가운 바위 위에서 노숙할 처지가 되어도 두 사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드는 비용조차 치르지 않는다면, 스무 살이나 먹은 보람이 없다"는 것이다. 목숨을 건 하룻밤을 지내고 겨우 하산했을 때도 어디까지나 의기양양했다. 그런 경험을 두고 두 사람은 '곰고기'를 먹는다고 했다. 그 '고기'는 "건장하고 자유로운 자신을 느끼게 하는 맛, 잘못을 저지를 자유, 자신이 운명의 주인임을 느끼게 하는 맛"이었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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