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구판절판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는 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적 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저항'을 무력화하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77쪽

수염을 기르긴 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기도 일본에 한번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주한미군의 병사로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제대를 앞두고 휴가를 이용해 며칠간 도쿄와 가마쿠라 주변을 관광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문화는 훌륭하다, 나는 선(禪)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천진한 질문을 받는 아이러니컬한 입장이 된 것이다. 상대에게 악의가 없는 만큼 더 곤란하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대답하려고 하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의 개념 정의에서부터 국민국가론에 이르는 거창한 논의를 전개해야만 한다. 상대방이 기대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날씨를 화제 삼아 던지는 인사말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그른 인식을 줄 것 같고 나 자신이 불성실한 듯한 일종의 전도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86쪽

갈라진 유리잔 거스러미같이 거친 자의식-128쪽

우리는 대부분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이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런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기원한 납염이 그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고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곧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사실 근대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온 것이다.-158쪽

갈고리가 손을 뒤로 해 묶은 끈의 매듭에 걸리고 사슬로 끌어올려져, 바닥에서 1미터 높이의 공중에 매달린다. (......) 양쪽 어깨가 부서져 튄 것 같다. 그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프라이팬에서 공이 튀어나오듯이 양쪽 어깨 관절이 탈구되면서 나는 허공에서 떨어졌다. 어깨에서 뽑혀나간, 뒤로 묶인 손이 여전히 줄에 매달려 머리 위에서 비비 꼬였다. 고문torture은 '탈구시키다, 어긋나게 비틀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quere'에서 유래했다. 실로 경탄할 만한 언어적 명찰明察-168쪽

프랑스어로 소위 '불법체류자'를 가리켜 '상빠삐에' sans papier라고 한다. '종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종이와 스탬프가 없이는 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온갖 종이, 온갖 스탬프가 21세기로 접어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인간의 존엄에 상처를 주고 있는가.-197쪽

평화라고밖에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건만 때때로 나에겐 그것이 코른골트의 음악처럼 휘어지고 뒤틀려 보이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의 즐거운 듯한 이야기 소리가 금속성의 잡음처럼 귀를 찌를 때가 있다. 맥락도 없이 멍하니 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여기서 장 아메리는 자살했다.' 오늘 밤도 누군가가 향락적인 오페라를 만끽한 후 가볍게 와인이라도 마시고 기분 좋게 방으로 돌아가 갑자기 목을 매는 것이 아닐까?-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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