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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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라울 힐버그(Raoul Hillberg)는 자신의 노작 <<유럽 유대인의 절멸>>에서 나찌 독일에 의한 유럽 유대인의 절멸정책은 역사상 전례가 없으며 그 규모와 형태에서 그때까지 비교 가능한 예가 없다고 하면서도, 그 전제조건으로 유럽 기독교 사회의 전통적인 반유대 사상이 수행한 역할을 중시한다. 그는 "나찌 지배 12년간 일어난 일 중 대부분은 이미 과거에 발생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찌의 절멸 행위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순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71~72쪽

차바퀴가 돌고 생명이 증식하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알다시피 경지가 비옥하길 바란다면 그 불순물이 필요하다. 불일치나 서로의 차이가, 또 소금이나 겨자씨가 필요하다. 파시즘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금하고 있다. 때문에 너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파시즘은 모두 동일하기를 바라지만 너는 동일하지 않다. - 쁘리모 레비, <아연>-85쪽

특정한 인간 집단에 대한 이 특이하고 철저한 절멸정책은 오늘날 주로 '홀로코스트'라 불린다. 그 어원은 구약성서에 기술된 "구워서 신전에 바치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라고 한다.-107쪽

되돌아보니 바로 그 시기에 나는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를 읽고 있었다. 병실에서 어머니를 간병할 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쁘리모 레비가 증언하는 역유토피아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한밤중에 어두운 병실에서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는 가슴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물음을 되뇌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137쪽

나에게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쁘게 움직이게 만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딘가 흘러 있을 빵조각을 발견하는 것, 육체를 소모하는 일을 피하는 것, 구두를 수선하는 것, 빗자루를 훔치는 것 혹은 나를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과 몸짓의 의미를 읽는 것 등.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그리고 그것은 수용소에서만의 일이 아니다.-162쪽

모두 희생자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무기력과 굴종의 두터운 방벽을 뚫고서 각자가 아직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핵심을 뒤흔들어놓았다.

"동지 여러분, 내가 마지막이다"

비굴한 우리 무리 안에서 누군가의 한마디가, 수군거림이,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할 수 잇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 채 회색의 모습으로 그저 서 있었다.-176쪽

더욱더 현실적인 것은 자기 고발 혹은 인간적인 연대에서 실격되었다는 고발일 것이다. 거의 모든 생존자는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에 소홀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있다. 자신보다 더 연약하고 교활하지 못하며 더 늙고 혹은 너무 어린 그들이 곁에서 항상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 수용소의 일상이다. 연대를, 인간다운 말을, 조언을, 그저 얘기를 들어줄 귀를. 그런 요구는 항상 어디서나 있었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너희는 타자를 대신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수치스러운가? 게다가 자신보다 마음이 넓고 섬세하며, 유용하고, 현명하며,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 "누구나가 그 형제들에게 카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웃의 장소를 빼앗아 그를 대신해서 살고 있다. 이런 의혹은 우리를 좀먹고, 우리 안에 깊숙이 기생한다. 가령 그것이 겉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를 좀먹고 초조하게 만든다.-177~178쪽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 (......) '그들은' 아는지,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일상의 조용한 학살에 대해서, 자신의 집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을.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교회 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의 혹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배워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그것도 모든 것을 지금 곧. 나는 내 팔뚝에 새겨진 번호가 찢어진 상처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쁘리모 레비, <<휴전>>-199쪽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한국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둥 친한 친구 중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둥 자신은 '재일일본인'이라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좀 있으면 '도대체 언제까지 사죄하면 되는 걸까요?'라는 흔한 질문을 슬쩍 던져본다. 그리고 이쪽이 무언가 말하려 하기 전에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미래지향'적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소(空疎)한 키워드를 늘어놓는다.-207쪽

어쩌면 그런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일, 이해해서는 안될 일이리라.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인정한다'와 닮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의 의도나 행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 보아도 그 행위나 의도를 포함하며, 그 실행자를 포함하고, 자신을 그 위치에 두고 그 실행자와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230쪽

길을 잘못 들어 매우 차가운 바위 위에서 노숙할 처지가 되어도 두 사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드는 비용조차 치르지 않는다면, 스무 살이나 먹은 보람이 없다"는 것이다. 목숨을 건 하룻밤을 지내고 겨우 하산했을 때도 어디까지나 의기양양했다. 그런 경험을 두고 두 사람은 '곰고기'를 먹는다고 했다. 그 '고기'는 "건장하고 자유로운 자신을 느끼게 하는 맛, 잘못을 저지를 자유, 자신이 운명의 주인임을 느끼게 하는 맛"이었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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