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내가 오규 소라이가 탁월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점입니다. 중국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적어도 일본의 지식계급은 한문(漢文)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중국 고전을 완전히 자기 교양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 선언은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지요. 모두 '앗'하고 놀랐으니까요.-30-31쪽
가토| 지금도 인도가 안고 있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계급간의 깊은 골이지요. 그 첫번째 요인은 경제적 격차이고, 두번째 요인이 언어입니다. (...) 인도에서는 어떤 지역에도 통하고 어떤 계급에도 통하는 언어가 없었죠.-50쪽
가토| 중국에서는 소설, 곧 지어낸 이야기는 거의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요시카와 씨 말입니다만, 사실을 존중하는, 공상보다 진정한 이야기가 '문학'(文學)이라고 합니다. 경서는 규범이지요. 실제 인간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이야기는, 어쨌든 중국에서는 소설이 인정받지 못하니까, 결국 역사라고 하는 식이 되는 거지요. 아니면 역사 이야기 같은 게 됩니다. -75쪽
공자의 경우에는 '인'(仁)뿐입니다. '인의'(仁義)라는 말로 '인'과 '의'를 병칭하게 된 것은 맹자 때부터지요. 맹자는 '사단',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설명할 때, 예컨대 "측은지심은 인의 단이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그리 되자 다른 세 가지도 갖추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래서 '인''의''예''지'를 각각 맞추게 되자 '인의'에서 '인의예지'가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 '인의예지신'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맹자가 일반적으로 병칭한 것은 '인의'입니다. 사단과 관련될 때만 '인의예지'가 되죠. 한대(漢代)에 '신'이 추가되어 오상(五常)이 나옵니다. 마치 공자 때부터 '인의예지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자는 '인의'라는 병칭조차도 언급하지 않았고 '인'밖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소라이가 장황하리만큼 말하는 부분입니다.-81쪽
마루야마| 슌다이는 훨씬 더 철저합니다. 그는 소라이가 주장한 것에 대해서, 소라이였다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파고 드니까 말입니다. 결국 소라이학의 평판이 나빠지게 된 데에는 슌다이에게 책임이 있다고나 할까, 결국 슌다이가 논리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인 셈이죠. 가토| 역시 '번역'이기 때문일까요? 선생보다 제자 쪽이 더 급진적이군요.(웃음)-99쪽
마루야마| 법률과 윤리의 혼동도 심합니다. 유교사상이죠. 다키가와 유키토키 씨의 <<형법독본>>(1932)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 또 아내의 간통죄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 두 가지가 걸려서였습니다. 간통죄를 폐지하자니 무슨 말인가, 간통을 장려하자는 건가라는 반발이었죠. (...) 다키가와 씨의 주장은 간통한 아내를 투옥한다고 해서 부부관계가 원상회복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 해석은 사회에 맡기고 법률은 간섭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법률과 도덕을 혼동해서 그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134-135쪽
마루야마| 일본에서 자연과학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보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진화론은 사회유기체설과 결합해서 국체론의 기초를 만들게 됩니다.-153쪽
후쿠자와의 과학관을 살펴보면, 메이지 시기 일본인의 전통적인 사유구조에서 생물학보다도 뉴턴적인 수학적 물리학의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다>>에 나오는 이학사 간게쓰 군이 그렇습니다. 그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에게서 충격을 받지요. 생물학이라는 것은 상대가 유기체잖아요. 주자학의 경우에도 이토 진사이를 비롯해서 천지는 거대한 생기라는 식으로 '기'를 우위에 두죠. '리'가 아니라 말입니다. 움직이는 물(物)이니까 큰 유기체다라는 관념이 전통적으로 있었던 겁니다. 사농공상이라는 지배 기반도 에도 중기부터는 유기체의 구조와 동일시하고 있죠. 세포처럼 상호의존적인 것으로요. 따라서 생물학적인 모델 쪽은 수용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전혀 무기적인 자연, 뉴턴 역학의 자연은 일본의 자연관에 없던 거였어요. 주관과 객관을 완전히 대립시켜서 모든 의미성이나 가치성을 박탈하고 보는 시각이 일본사상사에는 불교에도 유교에도 없었지요. 신도(神道)에는 더더욱 없고요.-155쪽
마루야마| 번역의 문제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소개가 빠르다는 겁니다. 메이지 10년대에 벌써 번역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후진국의 조숙성이랄까요? (...) 그래서 정부 쪽도 노동자 계급이나 노동운동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조숙하게 예방책을 강구하는 대응이 나오죠.-164-166쪽
일본은 적어도 1870년대까지는 한역 양서와 그 어휘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어에서 한자가 '피해갈 수 없는 타자'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근대 초기까지 정보의 원천으로서도 중국산 지식의 헤게모니는 아직 상실되지 않았던 것이다. -223-224쪽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관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trile-translated modernity)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동아시아의 기호학적 공간 속에서 한국의 근대를 온전히 복원해 내려는 지적 작업은 우선 '여러 갈래 길'로 나뉜 번역의 행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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