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의미한 살인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어지러운 철도길, 매번 집과 직장을 왕복하며 보는 똑같은 건물과 길목. 항상 북적거리는 역. 잔느의 시선에 따라 눈 앞에 배경이 펼쳐지는 듯하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지내면서도 잔느는 외로워 보인다. 매일같이 같은 일상을 지내면서 말을 건네는 사람이라곤 의무적으로 직장에서 인사를 건네는 상사나 괴롭히는 빈정거림 뿐. 잔느에게 있어 하루에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게 어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매일이 계속 되던 어느 날, 잔느는 매일같이 타던 기차 좌석 옆에 놓인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를 쓴 사람은 자신을 살인자라 밝히며 잔느에게 사랑의 말을 건넨다.
편지를 받아든 잔느의 행동에서 잔느가 혼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함께 얘기를 나눌 친구 한 명 없는 마을. 편지를 읽고 혼란스러운 마음 역시 터놓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에게도 자신을 옭아매는 말만 할 뿐, 그녀를 진정으로 믿고 지지해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 스스로와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잔느에게 모든 걸 말할 진정한 친구 한 명만 있었더라도 사건은 좀 더 다르게 나아가지 않았을까.
나는 모르는 누군가 자신을 여태 지켜봤고 또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편지를 쓰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편지가 기분 나쁘고 섬뜩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잔느는 두려움보다 두근거림과 부끄러움이 먼저였다. 그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외로운 상태였던 것이다. 주인공치고 소심하고 결벽이 있는 듯한 모습은 안쓰러움과 왠지 모를 동질감을 갖게 했다.
그렇다면 편지를 보낸 장본인, 자칭 '엘리키우스'라고 칭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경찰 내에서는 그를 '엄한 어머니 밑에서 학대받고 자란 무능한 성인 남성'일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잔느는 편지를 읽으며 그에 대한 환상을 덮입혀 나간다.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얼핏 '나의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나는 자신을 로마의 최고의 신이라 스스로 이름 붙이고 살인자임을 언급해 잔느를 혼란과 공포에 몰아넣는 것을 보고 거만하고 누구에게든 자랑하고픈 어린애같은 모습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였기에, 혼자인 잔느를 자신의 비밀을 터놓을 타깃으로 잡은 건 아닐까?
만약 내가 살인자의 편지를 받는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자신이 왜 이런 일에 휘말려야 하는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내가 유일한 단서를 쥐고 있다는 우월감에 특별하다는 착각도 들 것 같다. 사실, 정체도 모르는 살인자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작 나도 잔느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살인자에게 일말의 호의를 품진 않았겠지만. 혹은 매번 똑같은 지친 일상에 변화를 가져다 준 편지에 조금의 고마움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편지를 두고 하나씩 밝혀져 가는 진실과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단순하고도 아날로그적인 '편지'를 매개체로 사건이 착실히 진행되어가며 잔느의 일상을 바꾸어 놓는다. 책을 읽는 나도 모르게 편지를 기다리게 된다. 잔인한 사건 묘사나 급박한 상황에 떨어지는 여타 스릴러에 비해 신선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