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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유영미 옮김 / 한길사 / 2024년 11월
평점 :
* 해당 도서는 한길사에서 일파만파 독서모임에 지원해 주셨습니다.
📢 TMI.
저자인 예니 에르펜베크는 독일 작가이지만 주로 영어로 작품을 썼고, 이 책이 작가의 첫 독일어 소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으로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였다.🙊
💬 짧은 줄거리.
이 책은 (무려 33살 차이...) 한스와 카라리나, 두 사람간의 지질하고 폭력적인 사랑이야기이다. 시대적 배경은 베를린 장벽이 있던 1986년부터 장벽이 무너진 1992년이며, 동독의 베를린에서 사건이 주로 펼쳐진다.
📍 한줄평.
새해부터 지독한 사랑이야기를 만났다.
💭 리뷰.
오랜만에 속이 썩는 기분을 느끼며 읽었다.(과몰입러들은 화병날수도?!) 두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과 태도는 지독하다 못해 처절하게 느껴졌다. 상대에게 느끼는 사랑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터져나와, 상대방을 잘못된 방향으로 내몰고 상처입히는 모습. 섹슈얼한 느낌이 들었던 초반과 달리 파국을 맞은 후 뒤로 갈수록 두 주인공의 엉망진창인 사랑이 안쓰럽게 느껴진 건... 좋아한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사랑을 용인하던 20대 초반의 나의 연애 경험이 생각나서일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랑이라는 상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제 3자의 입장인 독자(나)가 둘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도대체가 사랑이라 칭하기 어려운 행동들 투성이지만 당사자들은 서로를 할퀴고 상처내는 사랑을 그만 두지 못한다. 한스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정말이지... 너무 하남자였어ㅠㅠ. 33살이나 많은데!!!) 한스의 정신적 학대를 받아들이고 그를 놓지 못하 카타리나에게 마음이 많이 갔다. 이별하면 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착각하던 때도 있었고, 다 내 잘못이네 라며 '을'을 자초했을 때도 있었으니까.
사랑의 무서운 점은 제대로된 사랑관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겪는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이유를 앞세워 모든 걸 받아줘야 한다는 식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이성적 판단이 줄어들어 어쩔줄 몰라하며 다치고 깨지고 상처입히면서 서서히 경험이 축적되어 사랑관이 형성되기에. 적어도 나의 어린 연애는 그랬다.
저자는 '사랑과, 사랑을 완전히 봉쇄된 시스템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작가의 편지에 적었는데, 아마도 한스가 했던 시도는 결국 완전한 실패로 보인다. 봉쇄하기 위한 시도들이 결국 사랑을 부쉈으니까.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쉬웠던 점은 독일의 과도기적 시대상과 한스와 카타리나의 사랑이야기가 별개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내 소설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과도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였지만 이러한 인상을 책으로부터 많이 받지 못했다. 두번째 상자의 뒷부분에 격변하는 동독 사회가 서술되어 있지만 이 부분이 카타리나와 한스의 이야기와 잘 버무려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작년에 읽었던 <사랑과 결함>이라는 소설집이 떠올라 '함께 재독해야겠다' 생각했다. 미숙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특히나 사랑하는 내 모습이 예뻐보이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추가로 독서모임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저자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a.k.a '모저저')라는 작품을 강추하였는데 이 책도 추가로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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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저녁 시간, 그녀에게 엄청난 행운으로, 불행으로, 그리고 의문으로 마주 앉은 이남자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깨닫는다. 삶은 이제 시작되었음을, 다른 모든 것은 그저 준비에 불과했음을. (30p)
🔖 한스는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한다. 그리움이 정말 아프다는 것을. 아픈 부위를 지정할 수 없을 뿐. 그 아픔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영혼이 살았던 횡격막에 있을까, 아니면 며칠 전부터 자꾸 리듬을 벗어나는 심장에 있을까, 아니면 꺾여버린 듯한 호흡에 있을까? (118p)
🔖 상대를 슬프게 할지도 모르는 것을 히파다 보면, 갑자기 슬픔이 그들 사이에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이제 끝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런 다음 점점 확고하게 현재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다. (156p)
🔖 모든 것은 늘 양면성을 갖는다. 그냥 두 가지 면만 가질까? 죄와 공로는 생각보다 자주 하나의 이름 아래 만난다. 하나를 다른 하나를 통해 확대하거나 축소하지 않기. 둘을 그냥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기기. 불균형만으로도 어느 날 운동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와 불균형과 기다림 안에 에너지가 축적된다. 거기서 은밀히 희망과 분노가 자란다. 따라서 참을 수 없는 것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혁명적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기회주의일까?(229p)
🔖 어쨌든 그녀는 그들의 사랑을 지키는 일에 적극 협력하려 한다. 적어도 남은 사랑이라도 지키고자. (252p)
🔖그러나 누락하고, 침묵하고, 회피하는 가운데 누락된 것, 침묵된 것, 회피된 것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영원히 간직된다. (275p)
🔖 겉은 빛나고 속은 폐허다. (310p)
🔖 어쨌든 그녀는 그들의 사랑을 지키는 일에 적극 협력하려 한다. 적어도 남은 사랑이라도 지키고자. (252p)
🔖 기이하다. 그 자체로는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시간은 불행한 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보인다. 마치 불행이 시간의 옷을 입은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이런 불행은 껍데기로만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알맹이라서, 한번 생겨나면 자신의 길을 가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존재다. (316p)
한 명의 좋은 독일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쁜 독서 경험이었다.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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