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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문화관 ㅣ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1
루시앙 르그랑 지음, 금빛내렴 옮김 / 살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예배당 안과 밖의 삶이 다름에 신앙인의 고민이 있다. 아님말고. 그런데 고민의 원인을 보는 시각에 따라 개인적 이슈에 집중하는 우익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에 집중하는 좌익이 되기도 하나보다. 중도 좌파를 선망하는 보수 꼴통들은 좌익도 싫고 우익도 싫기 마련인데 일단 경계선 긋기가 모호하다고 본다.
일단 책 소개는 맘에 들지 않는다. 리처드 니버의“그리스도와 문화”를 이분법적 문화관과 동일시 하는 과감성에 짜증. 이를 뛰어 넘는다에 갸우뚱. 하지만 주변 문화의 영향들을 알기 쉽게 정리해 주고 있으며 그러한 유사성안에서 보이는 성경만의 이질성 또한 잘 설명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주변 문화에 대한 이스라엘 대항 문화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배경설명 부족이 아쉽지만 그건 이책의 주제가 아니므로 통과.
한국에서 기독교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이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말세라 그런게 아니라 문화 적응력의 부족에 기인 한다고 본다면 문화 적응력은 무시한체 말세를 외치던 기독인들을 1000년 후의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게 볼까? 특히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문화”란 것이 그 사회 지배 계급의 기득권과 결합된 체“참다운 신앙”이란 이름이 덧씌워져서 믿음과 성경을 오로지 가진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편견일 뿐일 수도 있다면 심각한척 하는것 같지?
세속적 문화의 복잡성에 비해 기독인의“문화화”란 매우 정의가 모호하며 정의가 내려진들 매우 빈약한 부실한 내용물로 채워져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쨋든 저자는 문화와 믿음 둘 다 복합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게 뭔지 한마디로 말하기 뭐하면 이렇게 한권의 책을 쓰면 된다. 예) “맥락화(contextualization)와 육화 (incarnation) 사이에서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독특함을 기독교적 실존의 모든 국면에 마구잡이로 적용하게 된다면 신학적 엄밀성은 불가능하게 된다.”고 하면서 이를 “복합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건 약간 사기성있는 단순화 아닐까? 어쩌면 “육화”의 간단 명료함은 하나님의 현시가 특정화 하고 증거 되어지므로 기독교 실존 모든 국면에 결국 다 적용 될 수 있다고 보면 무리일까?
구약의 유대문화에 미치는 가나안 문화의 영향, 그리고 예수와 갈릴리 문화, 바울과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적절한 예와 함께 제시하고 기존의 문화몰입자들의 주장을 정리 비판 하고 있다. 지상명령에만 집중하는 세태가 아쉽고 창조명령의 좀 더 구체적인 적용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아주 적절한 책일듯 싶다.
· -흥미있는 내용1: 저자는 주석가들이 가나안 정복에서 보이는 진멸법등의 광신적 폭력성의 표준화된 공식에 주목하여 그 기록이 고고학적 자료와 불일치하다는 주장도 있음을 지적하지만 굳이 동의한다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교황청에서 돈을 받아야 하는 한계일듯 싶다. 어쨋든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록이 작성된 시기는 가나안 정착기가 아니라 훨씬 후대의 기원전 7~8세기의 아시리아의 침공과 사마리아의 몰락 그리고 소왕국 유다의 무력해진 이스라엘 시대의 예언자적 운동의 저항적 분위기 (신명기에서 순환 반복되는 주문 같은 상투어들) 를 반영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서를 읽는 재미라고나 할까? 성경의 무오성에 길들여진 근본주의 영향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온 세대에게는 유럽에서는 또는 유럽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이 고고학 자료와 불일치함이 이미 상식화 되어있다는 말투는 충격적일법 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자유주의 신학의 또다른 선입견이라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성경의 무오성이 아님을 막 밝히다가 또 한참 지나면 아니다 무오성이 맞네라는 말이 참신하게 들리는 학문적 분위기가 나올 수 있다. 학문적 분위기는 시장의 분위기나 별 차이가 없이 밥먹고 살려는 학자들에 의해 요동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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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있는 내용2: 아브라함, 모세등에서 보이는 “길 떠남”은 (박정아의 연애사가 아니라) 믿음의 삶에 대한 은유인데 이러한 탈문화화/ 분리/exodus는 회심의 시작으로 한 개인의 과거 경험 보다는 부르심과 그 여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체적 실존의 기본적 특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순회/유랑은 이스라엘의 근본을 이루는 여정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유를 향한 부름이자 자신들의 종말론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히브리서 12장의 믿음의 조상들만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고 믿음으로 죽은게 아니라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는 끈임없는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타자성을 향해 부르심에 반응하며 죽을때 까지 살아가야 한다면 너무 변명스럽나? 그래도 그넘의 냄비근성 때문에 지 생전에 꼭 재림이 이루어질것이라는 망상 보단 멋이자너? (매일매일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면서 기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요나의 기적밖에는…) 나이가 들면서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또는 어딘가에 도착하고 정착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나 불안감이 평강을 방해할때, 문화와 세상가치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위 “영성”이나 또는 “가지고 있는 땅”이 초라해 보이는것 같은 생각이 평강을 방해 할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넘 심한 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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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있는 내용 3: 신학적 기류는 이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다고 한다. 볼트만 학파는 너트가 없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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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있는 내용 4: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 바리새인, 에세네파, 열심당의 영향 가능성을 잘 정리해 주고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넘들은 너무 문화 몰입한 넘들이란 거) 사해문서에 대해서도 맘에 들게 접근하는 블링블링한 르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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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있는 내용 5: 예수님의 말씀을 볼때 (목수 관련 용어보다는 건축 관련 용어와 농업에 관한 해박한 지식등) 목수가 아니라 건축업에 종사한 소작농일 가능성이 더 많다는데 나도 contractor를 할까나?
나름 멋내는 저자의 결론은 “문화적 전유 (고유성 appropriation)
없이 믿음을 지각하는 것은 육화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의미가 될것이다. 그러나 예언자적 저항의 의미를 상실하는 문화적 몰입은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호11:9, 민23:19, 사55:9)라고 하신 그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란다.
그러면서 좀더 구체적인 자세를 언급하며 마무리 한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서양화 되어 있다면 그것의 개선책은 셈족의 원천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더욱 충성하는 것이다. 성령은 신생문화, 하위문화, 대항문화등 모든 문화에 기독교 믿음을 더욱 개방하고 있다. 많은 목소리들을 경청해야 하는데 그 목소리란 유명 문화들의 영광일 수도 있고 가난한 이들의 신음일 수도 있고 지배문화에 대한 압제를 규탄하는 목소리일 수 있다. 이와 같이 복음의 메시지가 옛 문화들 그리고 새 문화들과 마주치는 것이야 말로 성령이 성령과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이 온 세상에 충만하신 성령과-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초기 교회에서 처럼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부름 받은 상태인데 (행6:7, 12:24, 19:20) 실상 말씀이 세상속으로 들어왔던 바로 그 첫날 부터 부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