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 초회 한정판 (2disc)
이안 감독, 이르판 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주제/줄거리는 이 싸이트를 참고 했다

영화나 소설의 줄거리는 역시 Wikipedia 에서 눈에 있다.

줄거리와 줄거리 이해에 도움이 되는 배경들: 영화는 줄거리를 모르고 한번 (마지막 반전이 중요한 경우) 그리고

다시 보면 재미 있을 .

주인공파이 어려서 부터 학교 선생님등의 영향으로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공통적으로 사랑이 있는 신의 존재(belief in a loving higher power) 믿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의 나라 인도는 20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 였지만

파이가 자라난 Pondicherry 소도시는 한때 프랑스 점령지의 수도이기도 했던터라, 지역과 구분되는 프랑스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문화적 배경은 힌두교에서 자란 파이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만나면서도 왜 선입관의 장벽이 낮을

있었는지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1975년은 인도 역사에서 국가 비상사태 (National Emergency)” 라고 불리는 시대다

인디라 간디가 1971년의 부정선거로 사임 압력을 받자 이에 맞서 2년여 동안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선거를 할때 까지 의회

민주주의가 실종되었던, 기득권 세력의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권위주의 체제가 이루어 졌던 시기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나름 발전을 이룬 논란의 시기이기도 하다. (인디라 간디는 1980년대에 재집권에 성공한다.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 인지 헷갈린다). 어쨋든 Pondicherry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아버지는 다가오는 경제적 혼란과 탄압을

걱정하며 1977년 가족과 동물원을 카나다로 옮기고자 한다. 항해중 일본 회사의 (Tsimstum ) 폭풍으로 침몰하고 파이를

제외한 가족은 모두 죽는다. 구명보트에는 호랑이,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가 함께 오른다. (소설에서는 학생 시절 파이가

16세기 유태인 밀교자 Isaac Luria 우주관을 잠깐 언급 하는데 5가지 빛으로 신이 세상을 창조 할때를 가르키는 단어가 바로

침몰한 배의 이름 Tsimstum 이다. 그리고는 결국 구명 보트에는 5 생명이 오른다.) 하지만 얼마후 호랑이와 소년만 살아 남는다.

구명보트의 몇가지 구조 도구와 물고기와 빗물로 연명하다가 식인섬을 거쳐 멕시코 만에 도착한다. 호랑이는 숲으로 사라지고

주인공은 구조된다. 사건 조사를 위해 찾아온 일본 보험 회사 직원들에게 동화 같은 동물 이야기와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

그러나 그들이 요구 했던, 현실성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회사 직원들은 호랑이 이야기를 택한다.


이름과 그 절묘한 상징성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집안의 오랜 친구 마마지아저씨가 좋아하던 프랑스의 수영장 클럽 이름 "Piscine Molitor” 였다. ‘

수영장또는 물고기의 특성이란 뜻의 프랑스어 Piscine는 앞으로 물에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한다. 하지만오줌싸다

발음이 비슷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자 필사적으로 원주율 파이Pi(p) 숫자를 외워서 친구들간에 불리우는 이름을 Pi

고치게 된다. 주인공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마치 파스칼이 말했다는 무한사이에 걸려있는

유한한 존재 인간처럼, 유한한 인간이지만 그 안에 무한한 정보량을 내포하는 존재를 무리수 파이로 상징하고 있다.

   리차드 파커는 벵갈산 호랑이의 이름으로 동물원 관리장부 기입실수로 Thirsty 대신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 역시

파이처럼 절묘한데 다른 기록에 남아 있는 몇몇 조난된 선원의 이름이기도 하다. 에드가 알렌 포의 유일한 소설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 of Nantucket (1838)에 등장하는 조난된 4명의 포경선 선원중 하나로 먹을것이 없게 되자 제비뽑기로

한명을 죽여서 인육으로 살자고 제안한 죽게되는 선원의 이름이다. 1846 침몰한 Francis Spaight 타고 있던 21명의 선원중 한 견습생의 이름이 리차드 파커 인데 역시 인육 관련 이슈가 있는 사건이다. 1884년에는 요트 Mignonette 침몰하는데

생존자 4명중 인육 때문에 살해된 선장실 급사 이름 리차드 파커가 범죄사건 기록에 남아 있다. 조난/인육과 연관있는 리차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주인공의 야수성/야만성/폭력성/동물적 본능 등을 상징하며 인육과 연관 있음을 암시한다. 어려서 부터

동물원에서 길러진 그래서 조그마한 공간에 갇혀 있기에 익숙한, 사람의 지시에 따를 줄도 아는, 하지만 야수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맹수. 소설에서는 주인공 파이가 조난당한 프랑스인의 인육을 물고기 미끼로 쓰는데 이처럼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다른

, 선원(얼룩말) 엄마(오랑우탄) 죽인 요리사(하이에나) 죽이고 인육을 이용하는(식인섬) 자신의 다른 면을 호랑이가

상징하고 있다. (이건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Cast Away의 배구공 친구 Wilson을 떠올리게 하지만 좀 차이가 있는듯)

생존의 싸움 vs 경계의 싸움후에 갖는 종교와 나레이션(이야기) 대한 생각

주인공파이 무한한 자연에서의 생존을 위한 싸움, 그리고 자기 영역 안의 경계를 지키는 싸움을 한다. 자기 영역안의

경계란, 앞에서 언급한 주인공 내면의 폭력성/야만성 문화성/종교성의 경계를 말한다. 파이에게 가장 위급한 것은 호랑이와

공존 하는 법을 터득 하는것 이었다. 이를 통해 파이는 인위적인 문화/윤리가 만든 규범의 제약을 야생적인 생존을 위해 깨뜨린다. (처음에는 생선 회를 먹고 나중에는 인육도…) 호랑이가 주는 절망할 겨를 없는 위협은 점차 습관화 되면서 종교 의식화 된다.

이러한 의식은 다시 견디기를 습성화 하고 강화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주인공은 믿음이 강해지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신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상황의 절박함에 대비되는 심화된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은 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화 시키고 이렇게 강화된 믿음은 생존 투쟁에 힘을 주고 이는 다시 믿음을 강화시킨다

 

227일을 지내면서 주인공 파이가 했던 질문, 극한 상황속에서 생존을 위해 지켜야 경계는 어디 까지 일까? 문화와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까지 생존의 은총을 허락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삶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의 멋진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한 답으로 자신이 살았으므로 삶은 의미가 있고 생존이야 말로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궁극적 가치라고 한다면

빈약해 보인다. 파이는 생존이 결국 신의 은총 (생존 의식, 구조 도구, 비 등등)없이는 불가능 하다고 느끼고 신의 섭리로

문명으로 돌아 오게 되었음에, 생존 있었음에 감사 뿐이다. 깨우침을 얻은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감사 밖에 남는게

없고 그래서 겸손해 밖에 없나보다. 그래서 병든 병아리처럼 힘 없어 보이지만 뭔가 내공이 있어 보이는 이분하지만

왠지 코미디언 한무를 닮았다는…(이건 영화 '밀양'의 저 유괴범과는 다른 평온함인데 불안하긴 마찬가지 인듯)

 

   어쨋든 신을 빙자해서 자기 정당화로 마무리한 느낌이 아쉽지만, 가족의 비극사가 자신의 살인과 인육화 행위를 정당화

한것은 아닌가 두렵지만, 그리고 이러한 논리의 정당성을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서 찾은 것은 아닌지 미심쩍지만, 성공과

형통만이 축복의 증거라는 성공신학과 파이의 믿음이 다를바 없다고 비난 있겠지만 () 아니고 무엇인가

존재하는가? 대한 고민 보다는존재이후의 의미만을 다루려 했던점이 아쉽지만, 그리고 주인공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다원주의자찜찜 하지만, 어줍짢은 저자의 세계관을 아이의 입으로 말하는 비겁함을 보이지만 그것이 작가의

한계라고 봐준다면 그럭저럭 줄만하다. 게다가 신이 있던지 없던지 하나가 분명 한데도 아무것도 않하는 게으른

불가지론자들을 - 보이는 사실에만 갇혀있는 이성주의자들을- 경멸하지 않는가? ‘이야기 무한한 상상력에 의해서 그

어떤것에도 갇힐 없다며 종교화된 신앙을 경계하는 주인공의 자세는 바람직 하지 않은가? (아쉬운 점은 역시 다원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 정도?).


다원주의의 실체

힌두교는 코끼리의 앞다리 하나, 이슬람교는 나머지 앞다리, 불교는 꼬리, 기독교는 뒷다리, 유대교는 다른 뒷다리

이렇게 하나씩 붙들고 아는체 한다고 생각하는 넘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아는 것 이므로 코끼리

앞에서는 모두 마음을 열고 다른 종교가 붙들고 있는 다리/꼬리/몸통을 이해하고 포용해서 코끼리를 보자라는게 다원주의다.

문제는 우리가 잡고 있는것이 코끼리의 것인지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붙잡고 있는 것이 코끼리의 일부분 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코끼리 전체를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다원주의는 코끼리를 보았고 알고 있다고

교만을 떤다.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독재자 나폴레옹의 코끼리라고나 할까? 이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요 상호이해를

주장하는 교조주의요 민주주의를 외치는 독재자다.(히틀러는 이때 독재자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렸을 적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마치 모두 체험 한듯 하고 영화는 짧은 시간에 세상과 자연의 잔인함과 아름다움, 풍요로움과 빈곤함, 절망과 희망을 보여 주려 한다. 노력은 가상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겪은 주인공은 마치

세상을 달관한 듯한 자세다. 보이는것 만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주인공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세상 너머의

무엇인가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흔히들 말하는 절대 타자를 체험 한듯 태도다. (타짜 말고.)

그래서 세상은 모든게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자의 고백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카타르시스를 주는 처럼 주인공의 호랑이 이야기 역시 세상 살이로 부터 정화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너머의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믿고 있는 기독교인에게는 2% 부족한 공허함을 준다. 왜냐면 세상 너머에 있는 무엇이란

다원주의와는 상관없이 실재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것이 무엇인지 바울이 말했었다. ‘사도행전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러한 아테네에서의 선교는 실패란 설이 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그건 나중에.)

관념화된 종교의 허상과 값싼 은혜

영화를 보면 인도라는 나라는 힌두교와 궁합이 맞는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여러 종교가 자연스럽게 공존 하나보다.

종교 의식과 교리 체계만이 종교가 아님에도 이러한 의식과 체계는 문화와 역사에 스며들어 다른 종교들과 상호 연관성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면 복잡하고 난해한 종교와의 공통점을 쉽게 찾을 없게 된다. 그래서 여러가지 주제를 나누기

보다는 단일한 주제로 논제를 단순화 시킨다. 하지만 단순화 주제라고 답이 간단치가 않고 그래서 그 답을 눈에 보이는

매일 매일의 삶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으로 넘겨서 소모적이지만 영원 같은 논쟁 속에서 종교적

생명을 유지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제기된 답은 생활에서는 소용도 없고 적용 되지도 않는 너무나 추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제 같지만 실재 하지 않는 가상 속에서나 답을 적용시켜 만족을 얻으려 한다. 동물원 호랑이와 바다에서

표류하는 그런 가상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실제 삶과 이원화 된다. 세상은 그냥 예전 처럼 굴러가고 껍데기 종교 의식

속에서 멋진 강해나 설교/설법등을 제시하는 종교 종사자들만 배가 부르게 된다. (책도 그다지 철학적 깊이가 있는

같지는 않고 다만 기존의 몇몇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나름대로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든점이 재미는 있는것 같다.

영화는 그것을 발달된 CG 정서에 맞는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 었다.)

신앙을 갖게 되면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은 죄를 모두 사탄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든지 또는 자신에게 들어온 악령들 때문이라고 하면서 쉽게 털어 버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인공은 작가가

죄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과 신의 관계에서 찾을 있도록 장치 안에서 고민 있다. 죄의 결과가 3자에게 미치는

효과가 매우 적은 비극적인 환경에서 (살인사건의 가능성이 있지만 오로지 생존자인 주인공만이 증인이 되는 현실.

게다가 살인도 정당방위일 가능성이 많은. 인육을 먹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은 채식주의자 였던 주인공이 생선회를

먹은것과 차이가 없지 않을까? 영화 밀양과는 다른 상황) 신의 섭리와 죄의 용서등에 대해서 신앙의 진정성을

통찰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와 상황 안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다른 모습인 리차드 파커와 결별하며

세상으로 돌아온다. 철저히 사실적인 동물로 그려지고 있는 호랑이는 멕시코 해안에서 파이와 헤어질 때도 뒤돌아 보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이별이 생뚱 맞게 이질적인 리차드 파커란 이름과 함께 주인공의 결별 의지를 보여주지만 그렇게

의지 대로 간단히 결별이 이루어 질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주어진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본성은 평온한 문명 세계에서만

잠잠 있는건데 그렇다면 주인공이 누리는 안식과 평화란 진리와는 거리가 상황 윤리 속에서의 안주 일 수 있다. 그게 영화가 주는 불안감이다. 게다가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는 실제 삶의 이야기를 호랑이 이야기로 덮어버리는 결말은

이야기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 중요시 한다는 작품의 주제로 볼때 이해 가능하지만이야기 사실 자체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간 결국 역사적 실제의 예수는 무시하고 케리그마의 예수만을 믿는 공허한 신앙이 되기 십상이다.

다른 이야기들

저자 1963 6 25 생으로 스페인에서 카나다 부모밑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카나다 외무부서에 일을 하게 되어

어려서 부터 알라스카, 프랑스, 코스타리카, 카나다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카나다 온타리오 Trent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전에 2책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라이프오브파이가 대박. 다양한 형식을 갖는다는

책은 초현실적 사실주의거나 성장 모험 이야기쯤 듯하다가 환타지 모험 나중에는 인터뷰 형식의 논픽션까지.

   소설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비교가 되곤 한다. 노인과 파이가 짐승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 적이자 동료 내지는

분신 ( 다른 자아) 되는 점이나 인간의 인내가 주제가 되는 점등이 비슷하다. 그리고 죽음과 파멸에 이르기 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2가지임을 이야기 한다. 패배 아니면 오래참음. 비교되는 다른 작품은 브라질

작가 Moacyr Scliar  1981 Max and the Cats 인데 독일에서 브라질로 항해하던 동물원 사육사 가족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청년과 제규어가 표류하는 구성은 닮았으나 다루는 주제와 이야기 전달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한다. 한편으로

헨리 루소의잠자는 집시 올리게 한다. 잠자는 집시를 달빛 아래서 어떤 영감을 주듯 내려다 보고 있는

사자는 집시의 꿈과 현실을 몽환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사자가 집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파이가 리차드 파커에게

들려 줄 이야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해요? 궁금하면다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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