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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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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탐정인 필립 말로는 밥벌이를 위해 시시껄렁한 일을 하는 중입니다. 가출한 남편을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어느 부인의 의뢰를 받은 거죠. 필립 말로는 남편을 찾기 위해 흑인과 백인이 뒤섞여 사는 센트럴 로에 가지만 허탕을 칩니다. 의뢰인은 돈을 내지 않고요.
느와르라는 장르와 미수금된 푼돈은 뚝배기에 담은 냉면처럼 안 어울려요. 그런데 필립 말로에 대해 말할 땐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필립 말로는 도덕 재무장을 직접 주장할 만큼 영웅적인 캐릭터에요.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하죠. 본질이 이러면 자칫 잘못하다간 종이 인형 캐릭터가 되기 쉬워요. 그래서 세속적인 양념을 친 겁니다. 못 받은 돈에 연연하는 건 아니지만 초장부터 주인공이 돈 애길 하면 딱딱한 교조적 영웅은 면할 수 있죠.
본격적인 이야기는 센트럴 로에서 허탕을 친 필립 말로가 우연히 무스 맬로이를 보면서 시작됩니다. 무스 맬로이는 서커스단이나 입을 법한 희한한 옷에 거대한 체구를 구겨 넣고 있어 수녀들 사이의 스님처럼 눈에 띄어요. 필립 말로는 호기심에 무스 맬로이를 보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되죠. 사실 돈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여기서 필립 말로의 캐릭터가 좀 더 입체적으로 드러나요. 생계를 위해 탐정 일을 하지만 단순히 돈을 쫓진 않죠. 세속적인 면이 있지만 그걸 담는 큰 그릇은 순수해요. 타락한 도시에 살면서 도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니까요! 따지고 보면 필립 말로는 유별한 캐릭터가 아니에요. 그는 우리 대부분 같아요. 딱 보통 사람 말이에요.
<안녕, 내 사랑>은 캐릭터들이 끌고 가는 이야기에요. 모든 캐릭터가 주인공 필립 말로만큼 그려질듯 살아있죠. 바톤 핑크 시절에 존 굿맨을 연상시키는 무스 맬로이, 팜므 파탈이지만 순정이 있는 그레일 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할 것 같은 인물인 쥴스 앰소 등등. (유명한 이야기지만 하루키는 챈들러의 빅 팬이죠. <안녕, 내 사랑>을 읽어보면 하루키가 챈들러에게 얼마나 많은 문화적 할부를 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어떤 부분은 기시감이 들 정도죠.)
캐릭터가 중심인 이야기는 몇 번 읽어도 재밌어요. 다시 읽을 때마다 각자의 입장과 대사가 새삼스럽게 다가오죠. <안녕, 내 사랑>은 다 읽고 책장을 덮은 직후에 다시 읽어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숨은 알맹이처럼 곳곳에 있어요. 캐릭터 뿐 아니라 무심히 흘려보낸 서술이 나중에 큰 의미로 다가오기도 해요. 그래서 두 번 읽을 때야 아, 요런 게 숨어있었네 하고 깨닫죠.
구성의 면에서 보자면 <안녕, 내 사랑>은 훌륭한 소설이 아니에요. 정직하게 말하면 엉성해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탐정 소설과는 천지 차이죠. 사실 장르 소설은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이 묘미죠. 예컨대 작가가 미리 계획해놓은 미로를 따라 가며 누가 범인일까? 같은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 말이에요. 그런 면에서 보면 필립 말로는 참으로 무능한 탐정이죠.
캐릭터는 이렇게 풍부한데 구성은 왜 엉성할까요? 개인적인 상상일 뿐이지만 저는 챈들러가 순수 문학의 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 순수 문학을 쓰고 싶었던 챈들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중년이 돼서야 글을 쓰게 되는데 그것도 장르 소설이죠. 실제로 챈들러는 장르 소설을 쓰기 위해 일부러 ‘공부’를 했 다고해요. 장르 소설을 펴놓고 “구성”을 분석하고 공부한 거죠. 챈들러는 구성에 대해 ‘공부’하고 나서 아,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하고는 글을 쓸 땐 한 번에 한 단어씩 썼을 겁니다. 그러니까 미리 계획하고 치밀한 미로를 짠 게 아니라 글을 흘러가는 대로, 캐릭터가 흐르는 대로 둔 거죠. 아마도 챈들러는 다음 장에서 필립 말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을 거예요! 이런 관찰자적, 기록자적 태도는 다분히 순수 문학적이죠. 독자의 재미를 우선하는 장르 문학보다 순수 문학은 인간이라는 더 큰 질문을 다루니까요. 챈들러는 필립 말로를 장기의 말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보고 있는 거죠. 근거 있냐고요? 첫째는 챈들러가 장르 소설의 저 빛나는 보물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고 회의적이었다는 점과 둘째는 스토리와는 별개로 장황한 문장이에요. 챈들러는 비유의 달인입니다! 목소리가 간이식당의 저녁식사처럼 차가워졌다나!
<안녕, 내 사랑>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레이몬드 챈들러 자신일 거예요. 그가 작은 역할의 캐릭터에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걸 보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알 수 있어요. 그라면 길에서 마주친 누군가도 허투루 보지 않을 것 같아요. 챈들러가 실제로 친절한 사람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애는 있죠. 허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래야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