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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조금 느리게
한수산 지음 / 해냄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좋은 책이 흔치 않은 시대다. 매일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이제는 문맹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기 힘든 시대인데 막상 정말 옆에 두고 오래 보고 싶은 '좋은 것'들은 참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 좋은 책이다. 내가 한수산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81년도에 있었던 '한수산 필화사건'부터였다. 내가 뭐 그 어린 나이, 옹알이나 버벅거리고 직립보행이나 겨우 했던 시기에 이 사건을 알았다는 건 아니고, 그보다 먼 훗날의 일이었다.

...81년 봄, 나는 어떤 신문에 연재중이던 소설의 내용으로 인해 그때 몸담고 살고 있떤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거기서의 며칠 밤을 이제와서 떠올릴 분노조차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도구만은 기억한다. 찢기고 부서져 가는 내 알몸 위로 쏟아지던 몽둥이, 물, 전기, 주먹과 발길, 매어달림... 그리고 굴비엮듯 끌려와 무슨 골프 코스라도 된다고, 같이 돌아야 했던 나의 정 깊었던 선배 친구들. ...다만 20여일의 입원생활을 끝내고 나오며 내가 한 결심의 부스러기란,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것이었고, 그 이름 노아무개를 잊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잊지 않았고, 담배는 하루에 세곽 이상 피워야 하는 정서 불안에 살아가고 있고, 그 '사건'에 엮어졌던 시인 하나는 지금 거의 폐인이 되어 있다. 81년의 그 참혹했던 기억과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새벽 나는 용서했다.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K331을 들으면서 북받쳐 흐르던 눈물, 내 영혼에서 새살이 살아나는 것같던 그 감동을 거치면서... 노태우라는 이름은 이미 나에게 객관이 되었다.

'신동아' 87년 12월, 노태우후보 부천유세 참관기에서, 한수산이 썼던 글 중 일부이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어느때보다도 객관적으로 암울했던 시대상의 절망과 분노와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객관적으로, 그토록 가슴 깊이. 그랬던 작가가, 자신을 고문한 기관의 수장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 이 땅에서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났던 작가가, 이제는 '단순하게 조금 느리게' 자신이 그 동안 배워오고 느꼈던 것들을 찬찬히 읊어주는 책은, 활자 없이 비어있는 여백만큼이나 읽는 사람의 가슴에 빈틈없이 꽉 들어찬다.

혹여나 스물을 넘지 않았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에이,재미없다, 하고 어딘가에 던져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에, 이 작가의 이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 그토록 많은 흉터를 몸에 지녔으면서도 삶의 느림과 단순함의 미학을 깨닫고 독자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부드러운 작가의 손짓에, 왠지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으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연락이 끊겼던 좋은 친구에게 보내주고 싶은 책이다. 참,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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