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오후 4시의 천사들
조병준 지음 / 그린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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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프렌즈’에서 피비는 채식주의자다. 식탁에 올라오는 동물을 한 마리라도 줄이려고 고기를 먹고 싶어도 참는다. 피비는 동물뿐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도 욕망을 줄이고 필요하다면 손해를 마다하지 않는다. 조이는 이런 피비에게 순전히 타인을 위한 선행이란 없다고 말한다. 남에게 베푸는 선행에 기뻐한다면 기부한 돈이나 도움을 준 노동력은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소비한 거나 다름없다. 피비는 사람들을 도우며 기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그런 선행이란 없다고 인정한다.

설령 그런 선행이 없을지라도 봉사의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좋은 기업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수십억 원을 쾌척한 기업인이 남을 돕고자하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돈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면 그 행동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천국에 가기 위해 혹은 하나님을 위해 평생 봉사활동을 하고 그곳에서 마음이 위안을 얻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남을 돕는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는 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의 저자 조병준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일 아니냐? 이 세상에 완벽하게 타인을 위한 행동은 없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얘기죠? 내가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면 안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내가 행복한 걸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지? 

일단 내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복의 분량만큼 내가 사는 세상의 행복이 불어납니다.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이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만난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사실 그리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저자가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각자 나름의 사연을 지닌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부모님에게 혹은 연인에게, 사회에 상처받았다. 그런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캘커타에 와 어려운 이들을 돕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든 다시 캘커타로 돌아온 이든 모두 캘커타를 그리워했다. 그건 그들이 남을 도와서 얻은 만족감 때문이 아니라 돕는 동시에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픈 무릎에 맨소래담을 바르고서 기뻐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동안 그들 자신도 돌보아졌던 것이다.

매일 말썽만 부리던 비쁠로가 죽었을 때 멍하니 서 있다 바닥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죽어가는 딜립을 병원에 오지 못하게 하는 부모를 찾아가 애걸하는 건 애정 없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아픈 이를 병상을 차지한 환자가 아니라 친구로 여겼기에 환자의 아픔에 슬퍼하고 괴로워했고 이런 상호작용으로 자신이 지닌 상처까지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말고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비스킷말고는 무엇도 훔치지 않는 곳. 감정을 숨길 필요없이 서로 어루만져주는 곳이니 가능한 일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자원봉사자만이 아니라 그들이 돌본 환자들도 저자의 ‘친구’로 소개해서 좋았다. 의사와 환자, 돕는 이와 도움을 받는 이가 아니라 친구와 친구로 도움을 주고받는 일, 이것이 진정 봉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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