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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상처 입은 용
윤이상.루이제 린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올해 7월 초 통영에 갔을 때 윤이상 작곡가의 고향이라는 생각만 했지 실제 그와 관련된 장소를 노력을 들여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윤이상 작곡가의 이념 논란으로 '윤이상 기념공원'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고 '도천테마파크'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현 영부인이 7월 독일방문 당시 윤이상 선생의 묘소에 통영 동백나무 한그루를 심으면서 윤이상 이름 되찾기 운동이 촉발되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이름을 정식으로 담은 기념관이 다시 오픈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세계적인 작곡가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을 요즘말로 하자면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어 평생을 조국을 등지고 살게 만든 죄를 어떻게 속죄할 것인지 묻고 싶다.
이 책은 1977년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의 대담집으로 2005년에 독일에서 출판된 것이다. 윤이상의 음악 세계와 그의 인생관 및 철학, 그리고 그에게 일어났던 동베를린 조작사건의 전말과 그 후 그의 음악들에 관해 일목요연하게 시간순으로 정리된 대담집이라 하겠다. 물론 음악을 잘 알지 못한 나로서는 전문적인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윤이상이라는 예술가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하는데에는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꿈과 역량을 맘껏 펼치기도 전에 반일 지하 운동으로 투옥되고 고초를 겪다가 해방을 맞이한 후 자신의 진정한 꿈의 실현을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늘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기는 했지만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추구하지 않았던 그에게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대화를 인용해본다.
윤이상 : 기본적으로 내 경우에는 예술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저 음악가이고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고 음악가에게 정치란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음악가인 나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밖에 없습니다. 즉 내 예술적 양심에 따라서 의식의 순수성과 광대한 차원을 향한 고도의 요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에 대해 당신에게 말했던 걸 다시 떠올려 보세요. 그는 단지 학자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앉아서 책을 읽고 시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홍수가 나 집이 잠겼을 때는 그 자신이 몸소 제방을 쌓는 일을 도왔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예술가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므로, 만인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만 하고 따라서 정치에 도움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단기간의 임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광대한 발걸음에 영향을 줄 수는 없고, 아주 일부만을 바꿀 수 있을 뿐입니다 (p290)
예술가로서의 그의 이러한 작은 책임을 간첩혐의를 씌워 납치해서 고문을 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사형을 구형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루이제 린저는 이 동베를린 간첩조작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면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야욕을 고발함과 동시에 미국과 독일의 방관자적 태도까지 비판하고 있다. 그 후로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문화계 블랙리스트나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에 화가 난다. 여전히 그의 음악이 나에게는 쉽지 않겠지만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그의 음악에 대한 많은 저술들이 나온다면 그가 음악 속에 담아내려고 했던 한국적인 정서들과 초현세적인 도의 정신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