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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130여 페이지의 짧은 소설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쉽사리 소화되지 않고 되새김질을 요한다. 이야기가 한탸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다가 한탸의 내면의 소리와 외부 세계에서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어 생각과 사실의 구분이 어려울 뿐더러 문단의 호흡이 굉장히 길고 빨라서 책을 읽다보면 숨이 가빠지는 경험까지 하게된다. 마치 '마술적 사실주의'를 처음 접했을 때의 당황함 같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작중 화자인 한탸는 삼십오년째 폐지압축공으로 일하는 사람인데, 스스로 이 일을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라고 명명함으로써 자신의 일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낸다.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의 매 장의 시작을 '삼십 오년 째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삼십 오년 째 나는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 '삼십 오년동안 나는 폐지를 압축해왔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의 유일무이한 일임을 강조하는데, 그의 유일한 소망은 은퇴하는 날 자신이 쓰던 압축기를 사들여 정원 한켠에 놓고 그동안 모아놓은 책들로 '꾸러미'를 만드는 것이다. 옆에 5리터들이 맥주통을 놓고 마셔가면서 말이다.
한탸가 날마다 만들어내는 '꾸러미'들은 특별하다. 핏물 밴 정육점 종이, 신문지 뭉치, 유효기간이 지난 연극 팸플릿, 아이스바 껍데기, 더 이상 팔리지 않는 재고 서적 등 천장에 난 통로로 무더기로 쏟아지는 폐지더미 속에서 보물과도 같은 희귀한 책을 찾아내고 탐독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폐지 꾸러미들을 특별하게 장식을 하는데, 때로는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점식식사'로, 때로는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로 꾸러미에 그만의 아름다운 개성을 부여한다. 한탸는 폐지를 압축하는 것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p74)이라서 그들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본인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지하 작업장에서 자신의 시끄러운 고독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폐지더미 속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운 책들과 맥주와 그리고 은퇴 후의 소망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 소박한 즐거움들을 방해하고 그가 35년간 간직해 온 소망을 가차없이 흔들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한탸가 가진 압축기의 10배 이상의 성능을 가진 새로운 압축기계의 등장이다. 이로 인해 한탸의 지하 작업장의 존재가 위협받는 것은 물론이요, 신성해야 할 폐지 압축의 장소가 도살장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한탸는 무너진다.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는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바츨라프 광장의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처럼, 책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올라고 스미노프 양조장의 가마솥만큼이나 거대한 가마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중략) 책 더미들이 여기서 몽땅 파괴되었다...(중략) 그 책들은 어느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중략) 떨어지는 책들이 내장을 드러내며 여기저기 펼쳐졌지만 책장을 들춰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중략) 실수로 그 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중략)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p89-91)
한탸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삼십오년의 노력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 그의 하나뿐인 소망이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경이롭다. 한때 진짜 러브스토리였던 집시 여자의 이름이 바로 그 순간 떠올랐다는 사실은 그가 결국 비극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피엔딩으로 바꿔놓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