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나 - 한없이 다정한 야생에 관하여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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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와 나'라는 제목은 첫눈에 '너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할거야'라는 '어린왕자와 여우'를 떠올리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며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살았던 저자는 적어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모가 자신을 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능하면 스스로를 인간사회와 차단시키며 살아왔다. 오지에서 레인저 생활을 하기도 하고 황무지 땅을 사들여 오두막 한 채를 짖고 시간강사와 체험학습 등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야생과 관계맺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과 우정이나 사랑을 나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야생에는 인격이 없다고 믿었던 저자가 어떻게 '한없이 다정한 야생'을 느낄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맛도 냄새도 존재감도 없는 수은이 되려고 했던 저자가 야생을 통해 느낀 평범하지 않은 우정에 관한 고백이다.


   야생은 먹고 먹히는 곳이다. 결코 다정하다고 할 수 없다. 내 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곳에 이미 살고 있던 동물들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혹은 잘해야 무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던 저자에게 관계가 생겼다. 매일 오후 4시 15분에 그녀가 사는 파란 오두막을 찾아오는 여우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으나 결국 저자는 여우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매일 찾아오는 여우와 함께 <어린 왕자>를 읽게 되었다.


   그녀가 야생의 여우와 나눈 우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반려동물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린왕자에서와는 달리) 여우는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녀 역시 자연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궁금해지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심을 두는 츤데레 스타일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여우를 만난 이후 '여우와 나'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기는 하지만 책에는 그 이외에도 눈물 찔금나게 만드는 짠한 야생 속 우정과 필연적 현실이 담겨있다. 여우가 막내로 태어났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그를 돌봐왔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그를 위해 들고양이에게 내 준 테니스공(배불뚝이) 까치를 비롯해 밭쥐와 사슴처럼 누군가에게 먹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슬픔을 느끼게 한다.


   자연의 섭리가 명을 내릴 때까지 지속될 줄 알았던 여우와의 우정은 산불로 인해 끝이 난 듯 보인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소설도 아닌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녀가 여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은 그녀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을법한데 그게 또 그렇게 눈물이 나게 만든다.


애석하게도 나는 인간에 불과하다. 우리는 애통함을 겉으로 드러내어 슬픔의 정도를 표현한다. 하지만 야생동물은 겉치레로 애통해하기에는 너무 순수한 존재다. 그가 죽은 뒤 나는 덜 문화적으로, 더 야생적으로 - 짐승처럼 - 애통해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애통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인간의 슬픔에 이기적 측면이 있음을 금세 깨달았다. 나의 슬픔은 그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친구를 잃었지만 그는 목숨을 잃었으니까. 그는 너무 어릴 때, 너무 행복할 때, 너무 야심찰 때 죽었다. 그의 고통이 무한한데 내가 어떻게 고통의 얕은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겠는가? 여우가 어디서 삶을 막감했든 그는 여기 있고 싶어할 것이다. 파란 물망초에 코를 비비고 밭쥐를 덮치고 바위 위에서 햇볕을 쬐고 싶어할 것이다. 살고 싶어할 것이다. 나도 그가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의 바람이 그의 바람보다 간절한 척하며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다.

p428-429


   위에서 '끝이 난 듯 보인다'라고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여우는 죽었지만 우정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우를 닮아간다. 여우가 '그녀'라는 친구를 찾아냈 듯 그녀 역시 관계를 맺기 위해 여우처럼 행동하기로 한다. 여우는 이렇게 그녀에게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 게다가 우리 여우가 남긴 여우들이 아직 있다. 우리 여우가 남긴 그 유산을 지키는 것은 '우정의 핵심'이다. 그녀는 여전히 야생에서 생활하지만 전화로 수다를 떨 사람도 생겼고 휴가를 같이 갈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게 여우 덕분이다. 책의 마지막에 여우 사진이 딱 한 장 실려있다. 또 한 번 뭉클. 그녀의 야생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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