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나'라는 제목은 첫눈에 '너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할거야'라는 '어린왕자와 여우'를 떠올리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며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살았던 저자는 적어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모가 자신을 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능하면 스스로를 인간사회와 차단시키며 살아왔다. 오지에서 레인저 생활을 하기도 하고 황무지 땅을 사들여 오두막 한 채를 짖고 시간강사와 체험학습 등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야생과 관계맺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과 우정이나 사랑을 나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야생에는 인격이 없다고 믿었던 저자가 어떻게 '한없이 다정한 야생'을 느낄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맛도 냄새도 존재감도 없는 수은이 되려고 했던 저자가 야생을 통해 느낀 평범하지 않은 우정에 관한 고백이다.
야생은 먹고 먹히는 곳이다. 결코 다정하다고 할 수 없다. 내 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곳에 이미 살고 있던 동물들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혹은 잘해야 무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던 저자에게 관계가 생겼다. 매일 오후 4시 15분에 그녀가 사는 파란 오두막을 찾아오는 여우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으나 결국 저자는 여우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매일 찾아오는 여우와 함께 <어린 왕자>를 읽게 되었다.
그녀가 야생의 여우와 나눈 우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반려동물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린왕자에서와는 달리) 여우는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녀 역시 자연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궁금해지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심을 두는 츤데레 스타일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여우를 만난 이후 '여우와 나'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기는 하지만 책에는 그 이외에도 눈물 찔금나게 만드는 짠한 야생 속 우정과 필연적 현실이 담겨있다. 여우가 막내로 태어났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그를 돌봐왔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그를 위해 들고양이에게 내 준 테니스공(배불뚝이) 까치를 비롯해 밭쥐와 사슴처럼 누군가에게 먹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슬픔을 느끼게 한다.
자연의 섭리가 명을 내릴 때까지 지속될 줄 알았던 여우와의 우정은 산불로 인해 끝이 난 듯 보인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소설도 아닌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녀가 여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은 그녀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을법한데 그게 또 그렇게 눈물이 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