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러너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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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 관련 영화는 제법 보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스파이들의 비밀스러운 삶과 멋있어 보이는 임무에 홀딱 반했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런 편견은 순전히 007 시리즈가 만들어놓은 허상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파이의 생활은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감시와 역감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불안감,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이중 생활의 압박감이 주는 스트레스 등이 보편적이었을 듯 하다.


   <에이전트 러너>는 스파이 문학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존 르 카레의 마지막 작품이다. 존 르 카레는 실제로도 영국 해외 정보국인 M16에서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진짜 스파이가 쓰는 스파이 소설이니 읽기 전부터 믿음직하다. 그의 다른 작품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과 BBC가 드라마로 제작하기도 했다. 세상엔 읽을 책이 너무 많다는 핑계로 존 르 카레의 마지막 작품이 나에게는 작가와의 첫 만남이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스파이들의 전성기는 아마도 냉전의 시대였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냉전이 종식된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스파이가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모르시는 말씀. 국가간에 영원한 우정을 맹세한 이들은 없는 법이다. 암튼 <에이전트 러너>는 한창 때의 스파이 활동을 뒤로 하고 이제는 한물 간 중년으로 조직에서 은퇴의 명령이 올 때만을 기다리는 내트라는 남자가 화자로 등장한다. 아내도 있고 딸도 있지만 스파이에게 가족이란 국가에 앞서지 못한다. 여러 임무로 해외를 떠돌다가 이제 영국으로 돌아온 내트는 인권변호사 아내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어딘지 서먹하고 이제 대학생이 된 딸은 반항기가 가득하다. 낙이라곤 배드민턴 클럽의 단신 챔피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이런 내트에게 은퇴가 아닌 임무가 주어지는데 영 낙동강 오리알 같은 처량함이 느껴지는 임무라 주저하지만 결국 승낙한다. 한직으로 쫓겨난데다 서먹한 가정생활까지 우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던 내트에게 배트민턴 클럽에서 에드라는 한 젊은이가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밀면서 그와 하는 시합과 시합 후 클럽 바에서 에드의 불평불만을 들으며 맥주 한잔 하는 새로운 즐거움이 생긴다. 에드의 안주거리는 주로 트럼프와 영국의 브렉시트다. 실제 작가는 브렉시트가 결정되자 그에 분노해서 아일랜드 국적을 딸 정도였다고 하니 작가의 영국과 브렉시트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 등 현대의 국제정세에 대한 시각이 제대로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트럼프는 진짜 어쩔?)


   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한물간 스파이의 회한이나 환멸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는데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긴장감 만빵이다. 이런 멋진 이야기를 막판까지 숨겨놓다니 역시 스파이 문학의 대가답다. 이런 이야기는 스포 절대 금지 명령 정도는 내려줘야 한다. 이야기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곳곳에 스며있는 작가의 자연스런 유머감각도 매력적이다. 또 한명의 작가에 입덕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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