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발걸음 - 풍경, 정체성, 기억 사이를 흐르는 아일랜드 여행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구입할 때, 나는 리베카 솔닛의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그녀의 이름은 얼핏 들어는 보았으나 정확히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마음의 발걸음'이라는 제목과 '아일랜드 여행'이라는 말에 이끌려 구입한 후 서재의 여행서 코너에 얌전하게 꽂아 두었다. 이후 그녀가 쓴 동화 <해방자 신데렐라>를 먼저 읽었고 자연스레 이 책으로 이끌려 들어왔다.


   그런데 이 책은 나의 첫인상처럼 그냥 한 나라를 여행하는 낯선 이방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니다. 누군가 잘 짜놓은 계획에 따라 뒤에서 졸졸졸 따라가기만 하는 그런 여행기가 아니었다. 그제야 책의 원제인 <이주의 서 A Book of Migrations>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저자의 외삼촌의 뿌리찾기 덕분에 그녀의 직계 조상들이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아일랜드인임을 알게 되고 그 유전자 풀을 일부 공유하게 된 저자가 아일랜드 국적이라는 정체성을 얻게 되면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이렇게 일반 여행기와는 태생부터 달랐으니 당연히 이야기하고자 하는 방향이 다를 수 밖에.


   철저한 외지인일 수 밖에 없는 나로서는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건 영국이 아일랜드를 상대로 통치라는 명목하에 약 750년동안 가했던 잔혹한 행위들(일제 강점기 같은 시기가 750년동안 계속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이로 인한 IRA의 영국을 상대로 한 테러, 감자에 발생한 병으로 인해 닥쳤던 끔직한 대기근 정도이다. 아,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예이츠 같은 유명한 문학인들의 고향이라는 것도.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시작으로 호황을 누린 제국주의 시기,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를 하였기에 아일랜드인들의 이주도 당연히 있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대기근으로 100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반면, 그 시기 인구의 약 4분의 1인 200만명이 굶주림과 영국의 횡포를 견뎌내기 어려워 이주를 했다는 사실을 저자는 '아일랜드의 진짜 트라우마, 곧 아일랜드인이 침묵 속에 묻은 경험, 국민을 부양할 능력이 부족한 국가의 부끄러운 낙인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일랜드는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인구가 감소한 나라라고 함)


   저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얻게 된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잡고 '내가 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를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고 이 책은 그렇게 떠난 저자의 '마음의 발걸음'의 결과물이다. 처음엔 저자가 글을 써나가는 방식이 낯설어 가독성이 떨어졌다. 처음 몇 십페이지 정도를 세, 네 번 읽기를 반복했나 보다. 그러다 제2장부터 본격적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야 저자의 대단한 필력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읽어내는 다양한 시각이 놀라웠고 자신이 실제 살아본 적이 없는, 어떻게 보면 허상의 정체성일지도 모를 나라를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이나 경험과 결부시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에 감탄했다.


   책에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있다. 다시 한번 읽고 싶은 구절과 표현이 가득하여 필사로 남겨놓기로 한다. 가벼운 여행기인 줄 알았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지만 대단한 작가를 알게 되었으니 운이 곱절로 좋았던 거라 해두자. 이 책은 그녀의 청년기 때 쓴 것이라 하던데, 이후의 책들은 얼마나 더 큰 율림이 있을 지 기대하게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