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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 크래시 2 - 메타버스의 시대
닐 스티븐슨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6월
평점 :
사이버펑크하면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난다. 나는 정작 <매트릭스>가 대단한 인기를 누릴 때는 외면했다가 작년에야 전작을 깼는데 지금 보아도 재미있는 걸 보면 아직 가상세계의 수준이 거기까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간혹 미래를 다루는 SF 장르를 대할 때면 아주 오래전에 쓰였음에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감탄이 들 때가 있는 반면 아주 구닥다리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는데, 대략 그 기준이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과 비교했을 때 어느 지점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갈 길이 먼 우주나 외계 생명체를 다룬 이야기들은 여전히 미지의 분야라 현실을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어렵지만 작품에 담긴 미래적 요소가 이미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버린 이야기일 경우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작품을 미래를 잘못 예견한 점쟁이 정도로 취급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만 보자면 닐 스티븐슨의 <스노 크래시>는 구닥다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상에 기념비적인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메타버스라는 가상세계와 아바타라는 가상세계에서 인간을 대신하는 캐릭터의 개념이 지금은 너무 흔해서 식상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 모든 걸 닐 스티븐슨은 1992년에 발표한 <스노 크래시>에서 처음 사용했다는 걸 알게 되면, 게다가 그 1992년에 내가 뭘하고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왜 사이버펑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는지 금방 깨닫게 된다.
닐 스티븐슨의 작품은 디테일에 강하다. 비교적 최근 작품인 <세븐이브스> 역시 하드 SF로서의 위력을 어마어마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는데, 92년에 발표한 <스노 크래시>도 그에 못지 않은 디테일로 꽉꽉 채워진 작품이다. 아마도 92년도에 내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도 못했을 터이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가상세계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현실 세계에는 신종 마약으로 둔갑해 사람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컨셉은 어떤 면에서 현재 진행형일 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는 매체가 한정적이라서 정보를 쥐고 있는 자들이 승자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곳에서 필터링 없이 무분별하게 접하는 정보들이 사람들의 뇌를 점령하고 있다보니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조종하는 세력들이 판을 친다. 즉 작품 속에서 '엔'의 역할을 하는 귀 뒤에 안테나를 이식당한 이들처럼 '스노 크래시'에 중독되고 나도 모르게 '스노 크래시'를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있는 건 아닌 지 고민하게 만드는 딱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
책에서 묘사된 각종 미래적 모습들이 너무 믹스매치의 묘미를 자랑하는지라 좀 산만한 건 사실이다. 어떤 건 너무 나갔고 어떤 건 너무 뒤쳐진 모습인데 이 두개를 하나의 세상에 놓고 보자니 자꾸 삐걱댄다. 하지만 바벨탑 이야기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아이디어와 수메르 신화 속 엔키의 메를 바이러스와 묶어버린 엄청난 상상력에는 무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어찌 보면 그의 다음 수순이 하드 SF가 된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