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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요즘도 초등학교 들어가면 국어책을 돌아가면서 읽히는지 모르겠다. 나 때는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책읽기의 재미를 가르쳐주려고 그랬다라기 보다는 한글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지 시험하는 용도였던 듯 하다. 이 책은 책읽기 특히 '낭독'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이들에게 독서란 무엇일까? 수레국화 요양원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열여덟살인 그레구아르는 학교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과목을 막론하고 학교의 모든 것이 싫었지만 특히 책은 한페이지 넘기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프랑스의 학교교육도 아이들이 책읽기를 좋아하게끔 최적화 되어 있지는 않는 듯 하다. 예전에 읽었던 프랑스 교사인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이라는 책에도 나오지만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읽어주던 책을 좋아했던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책읽기를 고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때 다니엘 페나크가 내린 처방은 '낭독'이었다. 그만큼 낭독이 가지는 힘은 무한하다. 왜 유명작가들의 경우도 보면 새 책이 출간되면 꼭 낭독회 같은 걸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랬던 그레구아르가 파킨슨병으로 수레국화 요양원에 자리잡은 과거 책방을 하던 피키에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책읽기, 엄밀히 말하면 낭독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사실 그레구아르는 힘든 주방 일을 한시간 덜해도 되기 때문에 피키에씨가 제안한 하루에 한시간씩 책 읽어주기라는 미끼를 덥석 문 셈인데, 이 때의 마음을 표현한 문장이 재미있어 인용해 본다.
콜레라를 피하려고 페스트를 택하는 것 같은 느낌 (본문 p27)
결국 그레구아르는 수레국화 요양원의 공식 낭독가로 자리잡고 요양원 사람들과 직원들, 심지어 요양원 사람들을 면회 온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그레구아르의 낭독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레구아르의 성장 소설이기도 한 작품에는 문화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들어있다. 지극히 프랑스적이라고 해야할까. 소설인지라 어느 정도 과장은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나라 요양원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들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자유로움, 즐거움은 나누고 슬픔은 함께 애도하며 필요할 때는 작당모의도 가끔 허용되는 그런 곳. 수레국화 요양원도 완벽한 곳은 아니다. 요양원의 이미지가 그렇듯 수레국화 요양원도 생의 마지막에 다 다른 이들이 잠깐 머무르는 곳, 이곳에 위탁된 이들은 가족에게도 잊혀진 이들이다. 이들에게 잠시나마 허용된 즐거움, 웃음, 어린이로 돌아가게 해주는 무해한 장난 등이 허용된다면 생의 마지막이 좀 더 편안하지 않을까. 책읽기와 낭독의 즐거움과 예찬이 주된 흐름이었지만 자신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게 뻔한데도 '노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잘못된 이미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