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 - 공주에 새겨진 조선 역사 이야기 공주가 좋다 2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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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번 웅진백제의 발굴 이야기에 이어 공주에 관한 두번째 이야기이다. 백제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공주라는 도시의 역사적 의의는 이미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한 나라의 수도가 되기 위해서는 지리적 위치도 좋아야 하지만 풍수적으로도 좋은 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두번째 시리즈에서는 공주가 조선시대에 충청감영, 즉 충청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이 설치된 도시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고고학적 근거나 사료가 거의 없던 백제나 고려 시대에 비교하여 조선시대는 일제강점기 때 사라지거나 파괴된 유물이나 문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비교적 풍부한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유물이나 기록들이 남아있어 이를 근거로 당시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관찰사와 감영의 변천사부터 시작하여 감영과 관찰사가 담당했던 여러가지 업무를 기반으로 공주라는 도시가 담당했던 역할이 어떠했는지 알려준다. 감영의 주된 업무는 당연히 고을의 수령을 감시하고 백성들이 잘 사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잘하는 것에는 상을 주고 못하는 것에는 벌을 주고 바로잡는 것이 관찰사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 이외에도 국가 재정을 위해 걷은 세곡을 정해진 장소까지 무사히 운반하는 것도 관찰사의 책임이었고 (이게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관찰사에게 징계가 내린다. 심지어 파직인 경우가 허다하다) 법 집행이나 병마와 도시의 방벽을 관리하는 것 역시 관찰사가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의무였다니 당시 관찰사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높았을 듯 하다. 실제로 과로로 쓰러져 죽은 관찰사도 있었다고 하니 업무의 과중함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 대전에 경부선이 놓이고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공주는 충청도의 중심 도시에서 밀려나게 되었지만 계룡산을 중심으로 중요한 국가의 제사를 담당하고 평안을 기원했던 각종 종교적 행사가 열린 곳, 한 때 3대 약령시라고 불리울정도로 번성했던 공주약령시, 국가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공주에서 일어난 승병과 의병들, 동학농민전쟁의 상징이 된 우금티, 거기에 국가의 난이 있을 때 임금이 향하던 곳이 바로 공주였다는 사실들은 공주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었는지 증명한다. 임진왜란 이후 충청감영이 세워진 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약 3백여년동안 공주가 감당해야 했던 조선의 역사 현장을 잘 담아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 도의 이름을 그 도에 속해있는 대표도시들의 이름 첫글자를 따서 만들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를 딴 것인데 대표도시들이 바뀌면 도의 이름도 바뀌었다는 사실. 충청도는 공충(공주와 충주)도 혹은 공홍(공주와 홍주)도로 불리기도 했다.


* 와..인조는 도대체 몇 번을 도망간거야..


* 우금티전투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을 괴멸시킨 충청도관찰사가 바로 을사오적의 박제순이란다. 더 놀라운 건 이 매국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가 아직도 공주 이인면에 있단다. 수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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