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맘먹고 실제 읽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을 처음 본 건 미용실에 읽었던 한 잡지에 실린 이달의 책, 뭐 이런거였을 것이다. 책 제목이 맘에 들어 사진을 찍어 놓았다. 그 이후로 이 책은 내 휴대폰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다가 얼마 전에야 나의 눈에 띄는 기특한 능력을 발휘했다. 아..맞다, 이 책을 까먹고 있었네. 바로 주문하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안녕 주정뱅이'라니, 술꾼들이 읽으면 뭔가 자석처럼 착 달라붙는 운명의 기운을 느끼는 제목이 아닌가. 주정뱅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작가라니, 본인도 술꾼임에 틀림없다. (책 뒤에 작가의 후기를 읽어보니 술꾼 맞다 ㅎㅎ) 보통 단편을 담은 소설집이라면 단편 중 대표작이라 할만한 이야기의 제목을 소설집의 제목으로 내세우기 마련인데 이 소설집은 단편 7편의 제목 중 '안녕 주정뱅이'라는 글이 없다. 그냥 모든 이야기에 주정뱅이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술을 미화한다거나 반대로 혐오한다거나 하는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는 않다.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인생에 술이 필요한 사람들, 술이 생각날 수 밖에 없는 상황들,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상화되지 않은 인물들의 조금은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순간적인 숭고함 같은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삶에 칼로 잘라낸 듯한 완벽한 경계를 지닌 흑백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술이라는 것 역시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경계가 모호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여기 실린 일곱편의 단편들은 그 경계 언저리에서부터 좀 더 어두운 쪽을 향해 있는 이들에 대해 저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하는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첫번째 작품 <봄밤>이 나는 그렇게 좋았다. 특히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는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 이 부분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해서 마음을 추스려야 했을 정도로. 왜 그랬을까 지금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이게 문학이 던지는 예고없는 돌팔매질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술로 인한 희로애락의 도돌이표는 글을 쓸 때의 그것과 닮았다'라고 말하면서 '술'을 마시던 이가 '설'을 푸는 소설가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작가. '술'판이건 '설'판이건 결코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하지 않는 이 작가의 작품들을 좀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든 '설'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