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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제작자들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평점 :
일단 모든 걸 떠나서 재미로만 승부해도 순위권 안에 들 수 있는 책이다. 소재도 신박하고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 이외에 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보통 사람들이 종교로 믿는 신 말고, 아직 지구에 오지도 못한 외계인들 말고) 근거없는 믿음을 속 시원하게 그려내준 작품이다.
우연제작자들은 말 그대로 우연을 만들어내는 존재들이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지만 사람은 아닌 그들. 그렇지만 사람들을 위해 작게는 인연 맺어주기부터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거창한 일까지 인간들을 위해 우연을 만드는 이들이다. 우연 제작자들은 6급까지 급수가 있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2급 우연 제작자들이자 교육 동기인 가이, 에밀리 그리고 에릭이 이끌어간다. 이쯤 되니 <트루먼 쇼>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전혀 다르다! 우연 제작자들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의 역할은 경계선에 정확히 서는 것이다. 운명과 자유의 의지 사이의 회색 지대에 서서, 그 곳에서 탁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생각과 결론으로 이어질 상황으로 이어질 상황으로 이어질 상황을 만든다. 우리의 목표는 경계선 너머의 운명 쪽에서 작은 불꽃을 튀게 하여, 자유 의지 쪽에 서 있는 사람이 그 불꽃을 보고 뭔가 하기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큰 불을 내지 않고 경계선을 넘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능성의 창조자, 은밀한 암시를 주는 자, 매력적인 눈짓을 하는 자, 선택지를 발견하는 자다. (p92)
실수로 깨뜨린 것 같은 커피잔, 막힌 하수구, 고장난 신호등, 통계학 교수가 식중독에 걸리는 바람에 휴강된 강의 같은 것들의 뒤에 우연 제작자들이 있었던거다. 이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키면서 인간 세상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생겨나고 우리가 진짜 우연이라고 부르는 일들이 발생한다. 인간의 세상 너머에는 우연 제작자들 말고도 '상상 속의 친구'나 '꿈 방직공', '행운 유통사', '점화사' 등의 직업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이야기의 진짜는 우연 제작자들이 인간을 위해 하는 일에 있지 않았다! 우연 제작자들에게도 우연제작자가 있을까? 뫼뷔우스의 띠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우연의 홍수가 넘나 매력적이다. 그냥 신박한 SF인 줄 알았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동화같은 작품이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스포! 내가 이 아침에 글을 쓰는 이 행위도 알고보면 우연 제작자의 노트에 적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글을 마치는 순간, 누군가가 내 등 뒤에서 '임무 완수'라고 나직히 읊조리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나도 우연 제작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 누군가를 위해. 오늘 '우연'이라고 생각될만한 일이 여러분에게 생긴다면 '우연 제작자'가 임무 완수를 위해 정교하게 해놓은 장치임에 틀림 없으니 보이지 않는 우연제작자를 향해 미소 한번 날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