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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이후로 처음이다. 처음 읽었던 그 작품이 괜찮아서 후속작이 나오면 잘 찾아서 읽어야지하고 마음만 먹고 벌써 13년이 지났다. 이런다니까, 글쎄.. 어쨌든 우연히 <사랑 없는 세계>라는 다소 냉정한 느낌의 제목의 작품으로 저자와 13년만에 만났다.
이야기 속에는 두 세계가 존재한다. T 대학 근처에서 '엔푸쿠테이'라는 이름의 양식당을 운영하는 쓰부라야와 그곳에서 일하는 후지마루가 속한 세상. 그냥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사랑도 미움도 즐거움도 고통도.. 온갖 세상만사 두루두루 겪게되는 그런 곳이다. 다른 하나는 T 대학의 자연과학부 B호관에 있는 마쓰다 교수의 연구실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마쓰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세상이다. 거기서 일하는 대학원생인 모토무라는 그곳을 '사랑 없는 세계'라고 부른다.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넘이 없는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중략)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p96)
맙소사, 사랑고백을 했더니 경쟁자가 식물이라니, 들어는 봤나.. 이야기는 뻔하지 않다. 결국 경쟁자를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했다느니,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느니 하는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앞에 소설의 탈을 쓰고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무슨 교양과학서가 따로 없다. 후지마루와 같이 인간세상에 살고 있는 독자를 습기 머금은 온실 속으로, 현미경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애기장대의 세포 속으로, 식물이 지배하는 사랑 없는 세계로 데려간다.
교양과학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가끔 과학자들의 마음이 궁금할 때가 있다. 어떤 마음이면 그렇게 한가지에 몰두하여 마치 세상에 그것만 존재한다는 듯이 바라볼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마쓰다 교수님의 표현을 잠깐 빌리자면, 맛있다, 배가 고프다, 예쁘다처럼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한 욕구가 바로 기초연구에 대한 욕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즉, 배가 고프다라는 공복감이 연구의 세계에서는 '알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것.
뚜렷한 기승전결이나 롤러코스터 같은 클라이막스는 없지만 집에서 초록식물을 하나라도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사랑 없는 세계에 들어가보고 싶지 않을까.